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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팬데믹-124화 (124/323)

124화 위기 (2)

비는 그쳤다.

먹구름이 물러감과 동시에 햇빛이 귀신같이 마트 안으로 비춰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단 놈들은……. 한두 시간 전에 떴어.”

이순규 또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마당이었다.

피곤했으나, 다행히 마트엔 커피가 있었다.

제일 먼저 없어졌을 줄 알았는데, 남아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보통 커피라는 게, 졸음을 참기 위해 마시는 것 아닌가.

라드 놈들이 커피를 먹을 것 같진 않잖아?

졸리면 자야지.

‘기본적인 욕구를…… 끊어 낼 만큼의 이성이 있는 개체가 많다면 그게 더 문제지.’

이순규는 그런 생각을 하며 말을 이었다.

아직 놈들의 체취가 남아 있는 곳을 거닐면서였다.

병사와 놈들의 것으로 추정되는 핏자국이 잔뜩 남아 있었다.

햇빛은 어제의 잔인한 흔적도 그대로 비추었다.

“입구로 끌고 나갔는데, 그 후로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어.”

“비에 쓸려 나갔구나.”

유현은 피에 젖은 얼굴을 수건으로 닦고, 옷도 새 옷으로 싹 갈아입은 참이었다.

물이 없어서 제대로 닦아 내지는 못해 피 냄새가 옅게 나기는 했지만, 이순규는 오히려 그게 더 생존에 유리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쥐가 아직 있기는 하니, 냄새가 없진 않고 거기에 섞인 피 냄새는 위험해 보이지 않겠나 하는 것이 이순규의 생각이었다.

아니, 직감이었다.

‘나는 이제 직감이 더 정확해져 버렸지.’

좀 슬픈 일이긴 한데, 어쩌겠나.

일이 이렇게 된 것을.

“응. 뭐……. 추적할 건 아니니까.”

“그래, 그렇지. 흐음.”

유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간밤에 내린 비로 인해 사방은 젖어 있었다.

씻겨 내려갔다는 느낌은 딱히 없었다.

오히려 사방에 흐르고 있는 구정물로 인해 더 더러워진 느낌이었다.

왜 그러나 했는데, 하수구 중 일부가 역류하고 있었다.

아무도 관리하지 않게 된 지 시간이 좀 흘러서 그런 듯했다.

좋은 일은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잘된 일일 수도.’

불어난 물은 모기의 서식지가 되기 마련이었다.

또 여러 세균의 서식지가 될 터였고.

그 말은 곧 또 다른 전염병이 창궐할 거란 얘기가 되었다.

다른 생존자들이 있다면, 그들에게는 고통이 되겠지만…….

그들만의 고통은 아닐 터였다.

‘이건 라드들에게도 위기야.’

유현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다시 마트 안을 돌아보았다.

처음 왔을 땐 그토록 어두워 보이더니 하루 지났다고 적응이 됐나, 나름 밝아 보였다.

물론 유현에게만 그렇게 보일 가능성이 컸다.

다른 이들은 아직 새벽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람 하나가 끌려갔다.

습격을 받아서.

“일단 모여 봐요.”

그 증거로 늘 빠릿하던 오예리, 이진호 둘이 멍하니 앉아 있었다.

각기 가판에 등을 기댄 채로.

유현은 그런 둘에게 다가가 말했다.

둘은 일어나는 시늉을 하려다 말고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았다.

어차피 유현과 이순규 둘이 다가왔으니 일어날 필요가 없어서였다.

거기에 더해 지금은 힘이 없었다.

“어제……. 봤지만 역시 밖은 위험해요.”

유현은 주변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딱히 답을 기대하지는 않았던 터라 텀은 두지 않았다.

“식량을 생각하면…… 이곳을 몇 번 더 오가야겠지만…….”

유현은 철장 안에 갇힌 쥐를 올려다보였다.

또 하나가 저세상으로 가려 하고 있었다.

그냥 한 마리의 쥐가 죽는다 해도 마음이 좋지 못할 텐데.

지금 이 쥐는 한 사람의 구명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나마…… 병사가 없어서…….’

유현은 해서는 안 될 말을 애써 삼켰다.

그러고는 해야 할 말을 했다.

“그러기엔 위험해요. 우리도 너무 지쳤고……. 이 일을 다른 이들에게 해 달라 하기도 좀 뭣한 상황이에요.”

그 말에 드디어 오예리가 반응했다.

부정적인 반응은 아니었다.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좋은 사람이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라 해도 아니, 어렵고 힘든 일일수록 그냥 자기가 하는 것이 마음이 편한 사람.

그 점에 의지하기도 하고, 또 그 점을 이용하기도 하는 유현으로서는 살짝 미안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 최대한 많은 짐을 싣고 가도록 합시다. 배낭을 앞뒤로 메면…… 될 거예요. 먼 거리는 아니니까요. 비가 와서 거리에 물구덩이도 많고 해서 아직 나다니는 놈들이 많지는 않을 거예요.”

유현은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바늘은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른 시간이었다.

다른 놈들에게도 그럴 터였다.

“서두르면…… 9시 전에 들어갈 수 있을 거예요. 아니, 8시 전에도 가능하겠죠. 사실 거리 자체는 그리 멀지 않으니까요.”

걸어서 대략 한 시간 남짓한 거리이지 않나.

물론 가는 길이 험해 산책하듯 걸을 수 없으니 더 걸리기야 하겠지만.

하여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언제나 그렇듯 유현이 하는 말은 옳은 소리였다.

그러나 오늘은 듣기 좋은 말은 아니었다.

“유현아……. 그냥 가면 안 돼?”

이순규조차 이런 말을 해 올 지경이었다.

유현의 말이 맞는 말인 거 누가 모르겠나.

하지만 무서웠다.

유현은 그런 이순규를 돌아보았다.

‘착한 놈.’

그의 두려움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알고 있었다.

이순규는 사실 이 거리에 홀로 나와도 살아남을 수 있을 터였다.

인간이 식인을 못 한다는 것이 단기적으로는 악재일지 몰라도 길게 보면 유리하게 작용하지 않겠나.

그리고 이순규는 길게 볼 수 있는 인간이었다.

그러니 그가 두려워하는 건 또 다른 사람의 상실이었다.

“독단적으로 정할 생각은 없어. 하지만 반대하려면……. 근거를 대.”

“그…….”

이순규는 유현의 말에 턱밑을 쓸었다.

호르몬의 변화로 인해 굵고 풍성해진 수염이 까끌거렸다.

“음……. 위험해지지 않을까?”

“느려져서?”

“그것도 그렇고……. 쥐들도 간당간당하고……. 배낭만 해도 행색이 달라 보이잖아. 어제 그놈들…… 수준의 이성이면 위험할 수도 있어.”

“그건 그렇지. 하지만 그놈들……. 한동안 안 나설 거야. 일단 총에 맞은 게 둘이나 되잖아?”

이순규는 차분히 대화를 이어받았다.

이러한 태도는 어느 정도는 타고난 것도 있는데, 의사 생활하면서 훈련받은 것이기도 했다.

환자 치료라는 게 교과서에 나오는 것처럼 딱딱 되는 게 아니지 않던가.

토의가 필요한 환자도 많았다.

비단 정신과만의 일은 아니었다.

“무리가 넷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어.”

“그렇지. 하지만…… 그랬다면, 우리를 어제 쳤을걸. 하지만 안 오고 있잖아. 사람 하나 잡아간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거 같아. 둘은 부상을 당했고.”

“흐음……. 하긴, 그것도…… 그렇긴 해.”

“그러니 그 집단 자체는 걱정거리가 안 돼. 만약 걱정할 거라면…… 놈들이 이 아래에 있는 식량을 털 것이……. 그게 우려되는 점이지.”

“음.”

“그 전에 우리가 최대한 가지고 가는 게 좋아.”

유현의 말에 이순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러자고 말은 하지 않았다.

동의는 하겠지만 아주 썩 마음에 드는 일은 아니란 뜻이었다.

“오예리 형사님은 어때요.”

“저는……. 교수님 말에 동의합니다.”

“좋아요. 이진호 형사님은?”

“저는…….”

이진호는 다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젠가 다쳤던 다리였다.

라드에게 당한 건 아니었다.

도망치느라 넘어지고, 부딪쳐서 다친 다리였다.

또 동시에 유현이 치료해 준 다리이기도 했다.

치료라고 해 봐야 부목을 대 주고 약을 먹는 게 고작이긴 했지만.

‘무섭지 않은 건…… 아냐.’

다리 다쳤을 때를 생각하면 여전히 손이 벌벌 떨려 왔다.

어제 일?

그건 더 무서웠다.

제기랄.

‘그 새끼…….’

주시하고 있던 놈이었다.

언제고 죽일 준비가 되어 있던 놈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죽기를 바랐던 것은 아니었다.

세상에 라드에게 잡혀가다니.

교수님이 병사를 쏘지 않았다면, 그는 산 채로 잡혀가지 않았겠나.

끌려가서 무슨 짓을 당하게 되었을까.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저는…….”

“힘들면 힘들다고 해도 좋아요.”

“힘듭니다. 힘든데……. 이 짓을 또 하긴 싫어요. 그러니까…… 챙겨서 가죠.”

“감사합니다.”

유현은 떨리는 이진호의 손을 잡아 주고는 아래로 향했다.

이미 한참 전부터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에, 망설임은 없었다.

손에는 가방도 여러 개 들려 있었다.

나머지 일행은 그 뒤를 따라 걸었다.

내켜 하는 이는 없어도, 서두르지 않는 이 또한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해가 점점 더 밝아 오고 있었으니까.

‘여기서 더 시간 끌었다가……. 혹…… 어제 그놈들이…….’

이순규는 뒤를 연신 돌아보며 걸어 내려갔다.

그에 비해 유현은 재빨리 내려가 대충 칼로리가 높아 보이는 것들로 가방을 채웠다.

부피가 큰 것은 제외해야 했기에 초코바 등이 주를 이루었다.

“대강 담아! 빨리!”

“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서둘렀다.

유현을 따라 고칼로리 음식을 위주로 담았다.

그렇게 서두른 덕에 위로 올라왔을 땐, 불과 10분도 채 지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마음은 바빴다.

누구보다 유현이 그랬다.

자기 고집 때문에 사람이 더 죽어 나갈 수도 있어서 그랬다.

‘나…… 나도 위험할 수 있겠지.’

사실 얼마간 잊고 있었더랬다.

은신처에 숨어 지내면서.

마침내 쥐를 만들어 내면서.

또 한 번 아무 피해 없이 식량을 들고 오면서.

세상이 한번 망했다는 걸 외면하게 되었던 듯했다.

그러나 어제 병사가 다치고 나서.

아니, 수술을 하면서 확실히 알았다.

‘조심해야 해.’

이제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이 되어 버렸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찰박

해서 유현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면서, 끊임없이 앞과 쥐 그리고 일행을 살폈다.

넷.

여기서 하나라도 빠지면 위험해질 터였다.

아니, 죽을 터였다.

찰박

밤새 내린 비로 인해 도로는 물바다가 되어 있었다.

구정물이 이리저리 흐르고, 물웅덩이도 많았다.

그 때문에 피하려 해도 어쩔 수 없이 밟아야 하는 구간이 있었다.

그나마 군화 비슷한 신발이라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죄 젖었으리라.

찰박

넷이 걸어가면서 내는 소음은 그리 적지 않았다.

일단 너무 무거웠다, 다들.

짊어지고 있는 짐이 적지 않아서.

“이거 위험할까?”

걷는 이에게도 거슬릴 정도의 소음.

유현은 침착한 얼굴로, 속으로 불안함을 갈무리한 채 물었다.

이순규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모르겠어. 가까이 있지는 않은데……. 일단은 안에 있는 거 같아. 최근에 이렇게까지 비가 온 적이 없어서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주변을 둘러보면서였다.

어느새 유현보다도 훌쩍 커진 키를 이용해 꽤 멀리까지 내다보고 있었다.

평균 체격보다는 훨씬 큰 유현이나 이진호도 애를 쓰고는 있었지만, 그보다 더 멀리 보는 건 불가했다.

해서 오예리 형사를 포함한 셋은 이럴 때 그냥 이순규를 보았다.

그가 계속 두리번거리면 괜찮은 것이었다.

아니면 안 괜찮은 것이고.

“왜…… 멈춰?”

그때 이순규가 어느 한 지점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총을 꽉 쥐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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