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역공 (1)
VIP.
그러니까 대통령은 황 팀장에게 걸려 온 직통 전화를 받고 이마를 싸쥐었다.
“다시 말해 봐요.”
-네. 박태식 의원이 이미 영상 및 자료를 정유현, 오예리 형사에게 뿌린 후였습니다. 둘은 워낙 강경해서 통제가 안 되는 상태입니다. 지구 병원에 대해서는 언론에 살짝 흘린 거 같고요.
“하아.”
요약하면 X 됐다는 소리 아닌가?
현장에 김선태가 나가 있기는 했으나, 말 그대로 미연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나가 있는 것이지 아직까지는 작전에 참여하지 않은 상황 아닌가.
그렇다 보니 대통령으로서는 황 팀장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 새끼……. 일 그르치고 아무렇게나 씨불이는 거 아닌가?’
물론 의심이 한 자락도 생기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도……. 어찌할 방도는 없지.’
그러나 무용한 일이었다.
적어도 지금은 그랬다.
나중에 문책한다 해도, 그건 나중 일이었다.
지금은 벌어진 일에 집중해야만 했다.
“그럼 제가 뭘 해야 합니까.”
-지금 상황으로서는 모두 죽여야 합니다. 추후 사건 은폐를 요청합니다.
“박태식만이 아니라 나머지도? 그걸 어떻게 덮어!”
-덮으셔야만 합니다. 저희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런 망할.”
사람이 죽어 나간다.
총기 사고가 빈번한 미국에서조차 도심에서 벌어지는 살인 사건에 대해서는 미제율이 극히 낮았다.
하물며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CCTV뿐만 아니라 사람도 많았다.
게다가 지금 저 둘의 위치는 합정역.
그중에서도 주상 복합 아닌가.
증거가 안 남을 수가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 말대로면…….’
증거가 증인보다는 나을 터였다.
증거는 조작이 가능하니까.
“알겠습니다. 알아서 하시죠.”
-네. 헌데…….
“헌데 또 뭐요.”
-민간인 하나가 더 끼어 있습니다. 아직 신원 파악은 안 되었습니다.
“뭐? 어쩌다가!”
민간인이라니.
이 새끼가 진짜 일을 어떻게 하는 건가 싶었다.
역시 현장에서 굴러먹다 온 김태평을 중용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 보면 그를 현장에서 어느 정도 배제하게 된 것도 다 국장 때문 아니었나?
정치질에 휘말려서 진짜 인재를 못 알아본 죄업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우연히…….
“이런 멍청한. 황선우 팀장. 당신 이번 일 제대로 처리 못 하면 알지? 반드시 처리해. 깨끗이 정리하라고.”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통령이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두려운 일이었지만, 황 팀장은 전화를 끊으면서 미소를 지었다.
뭐가 되었건 다 죽여도 좋다는 답을 들어서 그랬다.
이게 아까 상황보다는 낫지 않나?
문책이 두렵긴 했지만.
일을 조지고 나서 그 책임까지 지게 되는 것보다는 나았다.
“명령 떨어졌어. 다 죽여.”
“네? 아……. 네. 근데…… 총은.”
총소리는 한 번이라도 들어 본다면 잊기 어려운 종류의 소음이라 할 수 있었다.
때문에 대한민국에서, 그것도 도심에서 총기 사용을 한다는 건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일단 총기 규제가 있는 나라라 그랬다.
그런데 남자들은 대부분 군대를 다녀와 총소리에 익숙했다.
이 아이러니가 경찰의 초고속 출동을 보장했다.
“안 가지고 왔잖아. 어쩔 수 없지. 칼로 죽여. 수도 훈련 수준도 우리가 훨씬 우위야.”
“네.”
때문에 정보기관도 총기 사용은 자제하는 편이었다.
적어도 대한민국 내에서는 그랬다.
그래도 괜찮았다.
상대도 총은 없었으니까.
게다가 지금 죽여야 할 대상은 의사, 형사 그리고 배달 기사였다.
세 사람에게는 칼도 없을 게 뻔했다.
“경찰을 부르긴 했는데……. 제때 올까요?”
요원들이 칼로 무장한 채 다가오고 있을 때 즈음, 유현이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그 말에 오예리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게 최선이죠.”
“아니, 시발 이게 또 뭔 소리야! 경찰이 제때 올 거냐니! 설마 살인범이 근처에 있는 거 아냐?”
둘은 침착했으나 배달 기사는 그럴 수가 없었다.
천성의 차이도 있겠지만, 일단 마음의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어서였다.
이 둘이야 그간 별의별 일을 다 겪지 않았나.
최선을 다해 침착을 가장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놓치고 있던 부분이 있었는데, 배달 기사의 흥분이 그 부분을 일깨워 주었다.
“아, 그럴 수도 있겠는데……. 우리 엮으려고 했다가 실패로 돌아간 거, 다 보고 있는 거 아닙니까?”
먼저 입을 연 것은 유현이었다.
딱히 배달 기사를 배려하지는 않았다.
평소라면 응당 그러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지 않나.
여유 부리다가는 진짜 X 되는 수가 있었다.
“아, 그럴 수도 있겠어요.”
“뭐가 시발 그럴 수도 있어! 당신들 피서 왔어?! 왜 이렇게 한가한데!”
유현은 오예리의 말에 답하며 걸음을 옮겼다.
“제일 좋은 건 역시 경찰이 와서 이 현장을 우리랑 같이 보는 거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이분 바디 캠에 증거 영상이 있지 않습니까? 도망가는 게 나을 수도 있겠어요. 아니, 도망가야 할 거 같습니다.”
그렇게 현관 가까이에 다다른 유현은 귓가에 울리는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분명 계단 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이곳이 저층이라면 억지로라도 그럴 수 있지 여길 텐데, 28층이지 않나.
게다가 한두 명이 아니었다.
우르르 몰려오고 있었다.
“경찰은 아니겠죠?”
“아니죠. 저렇게 파이팅 있게 현장 출동하는 사람은 없어요.”
“야야! 뭐 어떻게 되는 거냐고!”
곧 그 소리는 전원에게 전달되었다.
오예리는 우선 엘리베이터를 눌렀다가, 1층에 있음을 확인하고는 기다리기를 단념했다.
“야아! 이 시발, 뭐냐고!”
배달 기사는 계속해서 비명을 질러 댔다.
성가신 일이었으나, 굳이 말리지는 않았다.
누구라도 저 소란에 반응한다면 좋은 일이었으니까.
다만 나머지 둘은 생각을 해야만 했다.
계단으로 튈 것인지 말 것인지를.
“수가…… 위아래 비슷한 거 같죠?”
“네.”
“뚫을 수 있을까요?”
“무장하고 있다면 어렵죠.”
오예리와 유현 모두 삼단봉 정도는 들고 있었다.
비무장한 사람이라면 한두 명쯤 상대해 봄 직한 무기였다.
하지만 무장한 사람이라면 어떨까?
그냥 무장이 아니라 흉기를 들고 있다면 어떨까?
도망이 최선이었다.
미 특수 부대도 맨손으로는 칼 든 사람하고 싸우지 않는다고 하지 않나.
“그럼……. 일단 집 안으로 돌아가죠. 문 잠그고. 최대한 농성해 봐야죠.”
“네. 그리고 아는 사람 있으면 다 연락해서…….”
“이리로 오게 하면 되겠네요. 설마 저 미친놈들이 다른 사람들까지 어떻게 하진 못하겠지.”
“네. 그리고 제 지인은 경찰이에요.”
“아하.”
유현은 재빨리 배달 기사를 다시 집 안으로 던지고는 문을 잠갔다.
대화를 하면서도 몸은 쉬지 않았다.
걸쇠까지 다 걸어 잠그고는, 가구를 옮겨 문을 틀어막았다.
덜컥
그 순간 문고리 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름이 등골을 타고 내려왔다.
“이 시발!”
흥분한 배달 기사의 욕을 뒤로하고, 유현은 우선 뒤로 물러나 오예리를 도와 바리케이드를 설치했다.
육중한 철문이지만 언제 어떻게 열릴지…….
띠디디띠디
상대는 망설임 없이 번호를 눌렀다.
그러자 덜컥 소리와 함께 잠김이 풀리고 문이 열렸다.
아니, 열리다 말았다.
걸쇠를 걸어 놓은 덕이었다.
“저저. 저 시발. 미친 새끼들!”
문틈으로 칼을 쥔 손이 불쑥 들어왔다.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사시미가 아니라 더 날카로운 칼이었다.
본격적으로 사람 담그려고 할 때 쓰는 칼인 모양이었다.
의사로서 볼 때 저 칼에 맞으면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기사가 보기에도 그런 모양이었다.
아까보다 한껏 더 힘을 내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모, 못 들어오게 해!”
잘하는 일이었지만 좀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상대는 요원들이지 않나.
“일단 벽 뒤로 와요. 총 들고 있을 수도 있어요.”
“총? 아니, 시발 이게 대체.”
배달 기사는 욕을 늘어놓으면서도 일단 벽 뒤로 왔다.
오고 보니 아까 놀래서 던져 놓았던 치킨이 보였다.
저거 배달하러 들고 왔다가…….
시신도 보고 칼도 보고 이제 총?
허탈감에 다리에 힘이 쭉 풀렸다.
“근데 없는 거 같네요.”
“네. 있었으면 일단 쐈을 거예요. 걸쇠라든지.”
반면 유현은 오예리와 함께 고개만 내밀고 현관 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쾅쾅상대는 칼 손잡이 부분으로 걸쇠를 내리치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저게 쇤데 저런다고 깨질까 싶은 광경이었다.
하지만 마냥 마음을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어어. 나 유현인데. 여기 신고 좀 해 줘. 올 수 있으면 오고.”
-네? 교수님? 어딜요? 합정……?
“어어.”
-아……. 그럼 저 당직 빼 주시는 거예요?
“어어. 근데 혼자 오진 말고 경비원분이라도 달고 올라와.”
-뭔 일인데 그래요?
“위험한 일.”
-하씨.
유현의 전화는 아무래도 좀 효과가 덜했다.
“어, 일로 와.”
-네, 선배.
“이유도 안 물어?”
-어련히 알아서 부르시겠어요.
오예리는 사정이 훨씬 나았다.
그래 봐야 몇 명 부르지는 못했다.
아는 사람이 적기도 하거니와 이런 상황에서 부를 만큼 친한 사람은 이미 다 죽어서 그랬다.
“어어. 시발 X 됐다니까. 형님이 이렇게 떠는 거 봤어, 못 봤어.”
구원은 의외의 부분에서 일어났다.
“그래. 시발 웬 미친 새끼들이. 어어. 저거 저거. 걸쇠 저거. 야 새꺄. 군말 말고 와! 이리로!”
-알겠어요. 애들 싹 끌고 갈게요! 대신…….
“아, 시발 배달 못 받은 거 벌충해 준다니까! 나중에 형 시체 앞에서 궁상이나 떨지 마!”
-아, 뭔 일이래. 아무튼, 갑니다. 일단 저까지 6명 가고 있어요. 한 1분이면 가요.
“그, 그래.”
배달 기사가 인싸였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욕만 지껄이더니만 아는 사람은 되게 많았다.
심지어 이 시각 오토바이 모는 사람들로.
“이, 일단 다 온다니까. 버, 버티자고요!”
“오.”
“오는 지랄. 저 미친놈들 저거. 사람 담그려고 저거. 말 한마디 안 하고. 여기 사는 사람들은 시바 다 어디 갔나. 이 지랄을 치는데 왜 아무도 안 나와!”
그런다고 초조함이 어디 가지는 않았는지 아까랑 비슷하게 떠들어 댔다.
“빨리해! 왜 그것도 못 하고 있어!”
“이게, 이게 잘.”
“아호.”
물론 초조하기는 황 팀장과 요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아파트 복도에서 칼 들고 옹기종기 모여서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란 말인가.
아까 박태식이 담글 때만 해도 좋았더랬다.
프로페셔널해 보이고.
진짜 요원 같고.
지금은…….
‘아, 이거 왜 안 돼.’
오합지졸 그 자체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걸쇠가 아까보다 훨씬 더 심하게 덜컹거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랄까?
“아 왜 이렇게 시끄러워.”
“위에 뭔 일 났나.”
동시에 다른 집에서 하나둘 고개를 들이밀기 시작했다는 건 문제였다.
여기서 잡히면, 그야말로 끝장이었으니까.
팍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칼 손잡이를 휘두르는데 돌연 걸쇠가 떨어졌다.
문이 덜컹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