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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팬데믹-53화 (53/323)

53화 완성 (3)

“잠시…….”

마침 대통령의 살심이 극에 달했을 때쯤, 비서가 안으로 들어왔다.

박태식 의원을 미안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면서였다.

물론 직접 입을 연 것은 대통령이었다.

“미안합니다. 원래 일정이 있는데 들어온 거라.”

“아, 네. 얼마든지요.”

원래 일정이 있었다.

그 말에 박태식은 기분이 좋아졌다.

지금 반응도 그렇고, 일정이 있었다는 것도 그렇고.

대통령은 이 건을 아주 크게 보고 있었다.

‘증거 영상 자체가 중요한 게 아냐.’

중요한 것은 언제나 사람의 마음이지 않나.

특히 대통령의 마음은 더더욱 중요했다.

종종 그 사람의 생각이 나라의 운명을 변화시키기도 하니까.

이 경우에는 박태식의 운명이 바뀔 터였다.

‘여기서 이제…… 협조할 생각이 있다고 해야지.’

이 얘기를 꺼내고 나면 김효상이나 정유현 등이 어떻게 나올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둘 다 진짜 의사이니만큼 반발할 가능성이 컸다.

뭐가 되었건 일을 덮고, 본인만 이득을 취하는 것이니까.

‘계속 반발한다고 하면…… 그때는 뭐. 알아서 하겠지.’

정유현은 몰라도 김효상과는 나름 의리 운운할 수 있는 사이이기는 했다.

하지만 대통령이 조건이 된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애도나 해 주면 될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박태식이 나름 장밋빛 미래를 꿈꾸고 있을 때, 대통령은 회의실 밖에서 황 팀장을 조우했다.

“각하.”

“인사는 됐네. 방법이 있으니까 만나자고 했겠지.”

“네. 일단 박태식 의원이 입수했을 것으로 예상되는 자료입니다.”

황 팀장은 방금 대통령이 본 영상을 보여 주었다.

박태식 의원의 비서가 뭘 알아내는 것보다는 들키지 않는 데에 주력하라는 말을 허투루 들은 결과, 그의 행적이 거의 고스란히 국정원에 포착되었다.

“경찰이라고 하기는 했는데……. 보여 준 신분증이 국회더군요. 그날 CCTV를 돌려 보니 박 의원 비서 얼굴이 나왔습니다. 검토한 자료는 바로 이 CCTV구요.”

“그래, 그렇군. 그래서?”

“그래서 박 의원 차량 블랙박스를 따 봤습니다.”

황 팀장은 여러 지명을 보여 주었다.

그러고는 그중에서 합정 긴자를 제외한 모두를 지웠다.

“딱 여기만 예약이……. 박 의원 이름으로 전화가 두 번 갔습니다. 그중 하나는 박 의원이 아니라 김효상으로 예약이 되어 있었습니다.”

“김효상…….”

“그때 CCTV를 보면 김효상 혼자서 온 게 아닙니다.”

“그럼?”

“여기…….”

황 팀장이 보여 준 자료 화면에는 웬 건장한 남자 하나와 여자 하나가 더 있었다.

의문을 품을 새도 없이 황 팀장이 말을 이었다.

“남자는 한국대학교 병원 감염내과 정유현 교수입니다. 여자는 오예리. 형사입니다. 그……. 터널 사고 당시에 다른 차량에 타고 있었습니다.”

“아……. 그 수락 마을에 있었다는 사람들이로구만. 포기한 게 아니라…… 박 의원한테 붙었군그래.”

대통령은 참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놈들이란 생각을 했다.

터널 사고를 봤으면 적당히 알아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누군가가 죽었고, 심지어 그 죽음에 대한 수사는 덮어졌다.

그 말은 곧 개인이 상대할 수 없는 누군가가 배후에 있다는 얘기일 텐데.

대통령이 저 상황이었다면 설령 죽은 사람이 가족이었다 해도 포기했을 터였다.

하지만 이 자리까지 오면서 세상에 마냥 합리적인 사람만 있는 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 지 오래였다.

“다 엮어서 보낼 수 있나?”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만……. 김효상만 있는 게 아니라 정유현, 오예리가 있는 게 마음에 걸립니다.”

“걸린다면?”

“또 다른 협력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거까지 캐내야 합니다. 헌데 그러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건 안 돼.”

대통령은 회의실을 돌아보았다.

안에 있을 박태식을 떠올렸다.

그는 분명 언론을 언급했다.

블러핑일 수는 있었다.

‘저놈도 욕심이 많지.’

어쩌면 이 증거와 정황을 덮는 것을 조건으로 대가를 요구할 수도 있었다.

합리적인 처사이기는 했다.

문제가 있다면 그러기 싫다는 점이었다.

대통령은 이미 후계를 정했으니까.

통제 불가능한, 심지어 비밀까지 알고 있는 놈을 뭘 믿고 차기로 민단 말인가.

대통령은 그 전대 대통령들처럼 비참한 말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죽여야 해.’

그러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사람 죽이는 건 일도 아니었다.

‘아……. 확고하시군.’

황 팀장은 대통령의 태도에서 흔들리지 않는 무언가를 느꼈다.

“그럼…….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

“어떤?”

“이런…….”

오히려 다행이다 싶었다.

그럴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짠 계획이 있었으니까.

대통령의 양심에 따라 거부될 가능성이 크기는 했지만.

“그렇게 하지.”

대통령은 양심이 없는 건지 뭔지 별로 고민도 하지 않았다.

“네,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만 실수가 있어서는 안 돼.”

“네. 명심하겠습니다.”

황 팀장은 고개를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와 동시에 대통령은 다시 박태식에게로 돌아갔다.

박태식은 계속 자신이 하고자 했던 말을 떠들었다.

아까처럼 밀어붙이기도 하고 뭐 여러 전략을 쓰면서였다.

하지만 대통령은 아까와 달리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귓등으로도 듣고 있지 않아서 그랬다.

어차피 죽을 놈 말인데 들어서 뭐 한단 말인가.

‘이상한데…….’

대통령의 돌부처 같은 반응은 박태식에게도 이상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분명 취소된 일정 때문에 나갔다 들어온 것 같은데, 이렇게 사람이 변해?

마음이 급해진 박태식은 예정보다 더 빨리 협조에 대한 얘기를 꺼내기로 작심했다.

“저랑 한두 해 보신 사이도 아니니……. 저를 잘 아시겠죠. 제가 자기 정치 욕심이 있어서 좀 부딪친 적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각하를 존중합니다. 제 손을 잡아 주시죠. 그럼 협조하겠습니다.”

이 얘기를 하면 대통령이 안도의 한숨이라도 쉴 줄 알았다.

그러나 대통령은 요지부동이었다.

아니, 뭔가 변화는 있었다.

웃음을 지었다.

“협조라. 그래 뭐……. 그렇게 해 보죠. 하지만 이렇게 성급하게 결정할 일은 아닌 거 같은데.”

“네? 그 사안이 얼마나 중대한데요. 이거 당장에라도…….”

“박 의원. 내게도 내 사람이 있어요. 박 의원보다 그 사람들이 모를 거 같은가? 새치기하려면 일단 앞에 선 사람들 의향을 들어 봐야지.”

“아.”

웃음은 곧 지워져서 어떤 의도로 지은 웃음인지는 파악이 불가했다.

다만 이어진 말에는 희망이 내포되어 있었다.

‘하긴……. 대통령도 따르던 사람들 콩고물 줘야지. 가뜩이나 지지율도 높은데……. 정권 교체 안 되고 넘어갈 거 같은 대선이 대체 얼마 만이냐고. 그거 양해 구하려면…… 그래,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지.’

다분히 박태식의 욕심이 가미된 희망이었다.

옆에서 보면 이게 얼마나 헛된 생각인지 바로 알 수 있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욕심은 사람의 눈을 어둡게 하는 법이었다.

박태식 정도 되는 사람도 어쩔 수 없었다.

대통령이 코앞에 있는 느낌이 들었으니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그래요. 내 늦지 않게 연락할게요.”

“네, 그럼.”

해서 박태식은 후후 웃으며 청와대를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합정동 자택으로 향했다.

대화를 곱씹어 볼수록 희망 회로가 불타기만 해서 기분이 점점 좋아졌다.

어찌나 기분이 좋아졌는지, 얼굴에서 쉬지 않고 미소가 흘러나올 지경이었다.

“의원님, 무슨 좋은 일 있으신가 봅니다.”

운전을 하던 기사가 이렇게 물어 왔을 정도였다.

그만큼 박태식은 평소에는 짓지 않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 그렇지, 하하.”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의원님이 웃으니까 좋네요.”

기사도 웃으며 합정역 근처에서 가장 높은 건물, 메세나폴리스에 박태식을 내려 주었다.

원래 집이 여기는 아니었다.

지역구가 있는 의원이 으레 그러하듯 박태식도 자기가 살던 곳을 떠나 이곳에 자리했다.

다만 아이들은 다니던 학교가 있고 또 친구가 있어 대치동에 남았다.

아내도 거기에 함께 있었다.

막내가 고3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뭐……. 청와대 들어가면 다 같이 살아야지.’

박태식은 적막감이 감도는 집 안에 들어섰다.

혼자 사는 집이 으레 그렇듯, 나갔다 들어오면 너무 조용하단 느낌이 일기 마련이었다.

꼴꼴꼴

박태식은 습관처럼 잔에 술부터 따랐다.

평소와 차이가 있다면 외로워서가 아니라 그저 기분이 좋아서 따른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술도 좋은 걸 따랐다.

발렌타인 30년.

언젠가 선물 받은 술인데, 혼자 먹을 때 까기는 그래서 막내 놈 대학 가면 같이 먹으려고 아껴 두고 있었더랬다.

‘정유현……. 김효상……. 오예리……. 그치들에게는 어떻게 둘러댄다?’

입 안에 감도는 위스키 특유의 맛과 향을 느끼며, 박태식은 세 사람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중 오예리는 고아에 가족도 없는 사람이니, 별 신경이 쓰이진 않았다.

그러나 나머지 둘은 달랐다.

특히 정유현은 나름 명사라면 명사인 사람이었다.

‘뭐……. 얘기 잘되면 그때 VIP한테 부탁해야지.’

이미 사람 몇 명 죽였는데 한 명 더 죽이는 게 대수겠나 싶었다.

그렇게 천천히 술과 기분을 즐기며 자작하고 있는데, 어디서 끼익 소리가 들렸다.

‘바람이 부나.’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워낙 고층이다 보니 바람이 세게 불면 어설프게 닫아 둔 창문에서 소리가 나서 그랬다.

저벅저벅

하지만 구둣발 소리가 나던가?

바람 소리가 그럴 수도 있던가?

예민해진 탓이라 여기려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저벅저벅

점점 더 노골적인 구둣발 소리가 들려와서 그랬다.

“뭐, 뭐야.”

박태식은 마침 술 먹느라 부엌에 있던 참이었다.

아무리 혼자 사는 집이라지만 가끔씩은 가족들도 찾아오는 집이기도 했다.

당연히 부엌에 칼 정도는 있었다.

‘어, 없어?’

그런데 있어야 할 자리에 칼이 없었다.

“박태식 의원님.”

그 칼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웬 등산복 차림의 사내의 손에 들려 있었다.

늘 오이나 무 따위나 자르던 칼이었으나 새카만 장갑을 끼고 있는 사람 손에 들려 있는 걸 보니 두려움이 솟구쳤다.

“누, 누구야. 당신! 내, 내가 누군지 알아!”

해서 박태식은 되는 대로 지껄였다.

그러자 상대가 피식 웃었다.

“방금 이름을 불렀지 않습니까?”

듣고 보니 그랬다.

상대는 이름만 아니라 직함도 붙여서 불렀다.

그 말은 곧 국회 의원 박태식을 죽이려고 온 사람이라는 얘기였다.

“대, 대통령이지! 내가……. 내가 협조한다니까! 언론은 농이지, 당연히! 그런 얘기를 어떻게!”

“쉬, 조용히.”

이번에 입을 연 건 또 다른 사람이었다.

역시나 구둣발에 등산복 그리고 장갑을 끼고 있었다.

그게 하나가 아니라 셋은 넘어 보였다.

‘주…… 죽는다…….’

사람 하나 더 죽이는 건 일도 아닐 것 같더라니.

그 대상이 나일 줄이야.

박태식은 벌벌 떨며 손을 내저었다.

조금이라도 죽음을 유예해 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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