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박태식 (2)
둘은 말없이 수서역으로 향했다.
그사이 유현은 이순규와의 마지막 대화를 떠올렸다.
-조심해라.
분명 자신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 얼굴 표정 하며 말투 하며 평상시의 이순규와 정말이지 다른 점이 하나도 없었다.
‘죽었다 살아났음에도…… 같은 사람이라는 건가.’
변해 가고 있을 뿐…….
이순규는 여전히 이순규라고 해야 할까.
그랬으면 좋겠단 생각만 들었다.
이미 친구는 죽고 저기 있는 저것은 이순규의 탈을 쓴, 그리고 그의 기억을 공유하는 무언가란 생각이 자꾸만 들어서 더 그랬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아?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열차 안이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달리고 있었다.
어느새 아산역도 지나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긴……. 엄청 심각하시던데.”
“네, 뭐……. 아무래도 이게 그렇죠.”
“그렇긴 해요. 벌어진 일들만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데……. 앞으로 벌어질 일까지 생각하면…….”
오예리는 아직도 털모자를 쓰고 있는 채였다.
암 환자로 위장하라고 준 건데 기차에서도 쓰고 있을 줄이야.
병원 빠져나오자마자 벗으라고 해야 했는데 머릿속이 복잡해 저지른 실수였다.
‘하긴……. 이 사람도 머리가…… 복잡하겠지.’
유현보다도 더 험한 일을 겪지 않았나.
수락 마을에서 죽을 뻔했던 것은 유현 본인이긴 했지만.
사실 거대해진 노인 환자들로는 유현을 잡기 어려웠을 터였다.
그때도 다른 사람 걱정 없이 혼자 내뺄 생각을 했다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았을까?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다 죽었다고 했지.’
게다가 본인은 대기 발령.
잘못한 것 하나 없이 벌 받고 있는 셈이었다.
심지어 위에 있던 반장도 본청에서 유배되듯 지방으로 배치됐는데, 연락이 잘 닿지 않는다고 했다.
그 또한 협박에 시달리고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야말로 본인과 주변인 모두 고통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벌어질 일을 걱정할 수 있다니.
이 양반은 정말이지 제대로 된 형사였다.
“벌어질 일은 우리가 막아 봐야죠.”
“할 수 있을까요?”
“우리만으로는 안 됩니다. 박태식 의원까지는 어떻게든 연결을 해 봐야죠.”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맞겠죠?”
“일단 김효상부터 만나 보고요. 그 사람 의견에 따라 보죠.”
김효상 국장.
아직 의사 출신 보건복지부 공무원이 드물었던 시절, 청운의 꿈을 안고 들어간 인물이었다.
유현은 대학 병원 교수인 데다가 정책과 관련이 깊을 수밖에 없는 감염내과이지 않나.
그렇다 보니 김효상 국장이 아직 아무것도 아니었던 시절에도 본 적이 있었다.
‘반짝반짝하던 사람이었지.’
수가 체계를 비롯해 여러 가지를 보다 올바른 방향으로 바꾸려고 노력하던 이였다.
하지만 권력의 중심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점차 변하는 모습을 보여 주던 이이기도 했다.
개인의 영달이 오로지 윗분들의 손에 달려 있는 집단의 특성상 그럴 수밖에 없을 거 같긴 했다.
해서 실망만 하고 있던 차에 김선태 중령과 특임대의 존재를 알려 주었더랬다.
‘아직…… 완전히 변하지 않았다면……. 뭔가 해 줄 거야. 아니, 뭔가 해 주어야만 해.’
유현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오송역에서 내렸다.
그러곤 버스를 타고 세종시로 향했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것이 여러 가지로 편하겠지만, 장거리 이동을 차로 하는 건 아무래도 어려운 일이었다.
유현도 그랬지만 오예리도 문제였다.
아는 사람이 그렇게 죽었는데 또 차로 이동하는 건……. 일종의 고문이 될 터였다.
“주소가…… 여긴가요?”
“네. 우식이가 알려 줬어요.”
“음……. 꽤 좋은 데 사시네.”
“뭐, 원래 의사가 공무원 하려면 집이 엔간히 살아야 가능하죠. 아니면 배우자가 개업을 했거나. 국장님은 둘 다예요. 와이프가 산부인과, 본인 집은 원래 좀 부자.”
“아…….”
도착한 곳은 세종시 내에서 제일 비싸다고 소문난 단지 내부였다.
다행한 일은 단지 내에 국가 공원이 낑겨 있어서 출입이 자유롭다는 점이었다.
해서 둘은 별다른 검문검색 없이 안으로 들어가, 우식에게 전달받았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근데, 받을까 모르겠네……. 내 전화도 안 받던데.
이런 말을 듣기는 했지만 일단 걸긴 걸었다.
“안 받네요. 확실히 그날 뭔 일이 있었나 봐요.”
“음……. 그날도 좀 허둥대기는 했었는데요.”
오예리는 고개를 갸우뚱대다가, 이내 뭔가 결심한 듯 말을 이었다.
“하는 수 없죠. 대기 타는 수밖에.”
“대기요? 안 나오면 어째요?”
“원래 수사는 그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무대뽀. 이것저것 재라고 배우긴 하는데……. 그게 현장에서는 무용지물이더라고요.”
“그래도……. 아예 숨은 거면 어쩌죠?”
“숨은 사람들도 쓰레기는 버려요. 저 동이죠? 아마 저 앞에 나올 겁니다. 그리고 수배자도 아니잖아요. 여기까지 왔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하고 있을 거예요. 늦어도 내일 아침이면…… 어, 저거. 저거 아니에요?”
저거?
유현은 음 하는 얼굴로 오예리의 손가락 끝을 바라보았다.
중간에 아직도 붙어 있는 밴드에 시선이 잠시 머무르긴 했지만, 정말로 잠시뿐이었다.
‘이상하네. 나을 때가 됐는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유현은 본능적으로 몸을 차 뒤로 숨겼다.
손가락 끝에 걸린 인물이 바로 김효상이어서 그랬다.
거리도 그리 멀지 않았다.
“진짜네. 그냥 나오네요?”
“그렇죠, 뭐. 저건 숨은 게 아니라 그냥 칩거 정도라고 봐야 되잖아요. 수배자가 아니니까요. 게다가 수배자도…… 어지간히 조심하는 사람 아니면 집 앞 슈퍼 정도는 나와요. 생각보다 사람이 갑갑한 거 견디기 어렵다니까요.”
“하긴……. 뭐 그렇죠.”
단순 비교는 어렵겠지만.
인턴이나 레지던트도 갇혀 지내기는 매한가지 아니던가.
초반에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 모든 욕구를 수면욕이 이기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게 오래되다 보면 답답해서 잠시라도 걷고 싶어졌다.
유현도 그랬다.
덕분에 병원 근처에 그나마 걸을 만한 길을 다 꿰고 있었다.
“하여간…… 덮칠까요?”
“덮쳐요? 지금까지 수배자는 아니라고…….”
“그렇다고 갑자기 우리 나타나면 도망갈걸요. 몰래 다가가서 덮치는 게 낫죠.”
“그런가. 음. 그러죠. 그럼 저는 어떻게?”
아무래도 이런 건 경찰이 전문가 아니겠나.
게다가 방금도 쓰레기 버리러는 나올 거라는 말이 딱 들어맞은 상황이었다.
해서 유현은 어느 정도 기대를 품은 상태로 물었다.
오예리는 그 순진무구해 보이는 눈을 가만히 마주하고 있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범죄자도 아니고……. 중년 아저씬데요. 동도 알잖아요. 미리 저기로 이동하죠. 그리고 중간에 딱.”
“좋네요.”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긴 했다.
막말로 도망간다고 해서 못 잡을 만한 사람도 아니지 않나.
도망간다고 하면 이쪽이 문제가 아니라, 무리해서 넘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만 들었다.
“김효상 국장님.”
해서 둘은 김효상의 동 앞에서 대기하다가, 무방비로 들어서는 김효상의 팔을 슥 잡았다.
양측에서 잡았기 때문에 도망갈 수 없으리란 생각을 하면서였다.
“으, 으엇.”
“어……. 혼절…… 어쩌죠?”
“맥은 있어요. 그냥 기다리면 깰 겁니다.”
그런데 그냥 기절을 해 버렸다.
사람이 원래 너무 놀라면 그럴 수 있다는데, 유현은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걸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러나 당황하지는 않았다.
사람이 그리 쉽게 어떻게 되진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어서 그랬다.
오히려 유현이 떠올린 생각은 이러했다.
‘몰려 있나 본데……. 대체 뭔 일을 당한 거야.’
김효상이 변해 가고 있긴 했지만 하여간 그 당시로써는 흔치 않은 결정을 한 사람이지 않나.
본래 남 일에 참견하길 잘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의대에는 더 많지 않던가.
아마 김효상이 공무원 하겠다고 나섰을 때 주변에 있는 모두가 말렸을 터였다.
그걸 딛고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는 건 어느 정도 강단이 있단 얘기였다.
실제로 유현이 본 김효상 또한 그런 인물이었고.
그런데 기절을 해?
“괜찮습니까?”
고급 단지인 게 다행이었다.
둘은 어렵지 않게 파라솔까지 달린 자리에 앉아 김효상이 깨어나길 기다렸다.
과연 유현의 말대로 김효상은 기다리기만 했는데도 멀쩡히 눈을 떴다.
표정은 다시 까무러치고 싶은 듯해 보였지만 여의치 않은 일이었다.
원래 몸이라는 게 그렇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닌 법이었다.
“여긴……. 여긴 어떻게.”
“어떻게는요. 우식이한테 물어봤죠. 저희가 설마 해킹이라도 했을까 봐요?”
“그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죠…… 지금은.”
김효상은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한숨을 푹 하고 쉬었다.
많은 일이 있었던 듯해 보였다.
‘흰머리 봐라…….’
머리가 빠지지 않은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지금 김효상의 몰골은 엉망이었다.
“김효상 국장님.”
유현이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 오예리가 나섰다.
형사 특유의 날카로운 얼굴을, 그러나 동시에 살며시 미소를 지어 가면서였다.
어느 쪽에 장단을 맞춰야 하나.
김효상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여기까지 온 걸 보면 아시겠지만……. 지금 상황이 보통 심각한 게 아닙니다.”
“그렇다 해도 저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아뇨, 있습니다. 박태식 의원을 연결해 주세요. 자세한 얘기는 거기 가서 하겠습니다.”
“네……? 박 의원님을?”
그러나 얘기의 끝이 자신이 아니라 박태식을 향하고 있단 말을 듣자, 마음이 편해진 모양이었다.
그는 한숨을 푹 쉬더니만 본격적으로 대화를 이어 나갔다.
“박 의원님은 왜요?”
“들으면 위험해질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요?”
“이미 위험하긴 합니다. 제가 움직이지 않아도 된다면 뭐……. 그리고 박 의원님…… 제가 꽤 가까운 사이라 잘 아는데 의뭉스러운 데가 있는 사람이에요. 어떤 얘기를 어떻게 꺼내느냐에 따라 달리 움직일 수 있어요.”
전형적인 정치인이라는 얘기를 길게 늘어놓은 느낌이었다.
오예리는 몰라도 유현은 여태 정치인들에게 당한 게 좀 있어서 더 그랬다.
하여간 말로는 다 해 줄 것처럼 하다가 결국에는 예산 문제 들먹이면서 뒤통수치던 게 한두 번이던가.
카메라 앞에서와 뒤에서의 행동이 너무 달라서 이 사람이 설마 연기자인가 하는 생각마저 든 적도 있었다.
“그럼 들으시겠어요?”
“네.”
오예리의 말에 김효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오예리는 직접 얘기를 하는 대신 유현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일련의 과정을 더 정확히 알고, 사태의 심각성을 잘 전달할 수 있는 게 유현이다 보니 그랬다.
‘듣다 보면…… 이 사람도 움직일 수도 있어.’
유현은 일말의 기대를 품고는 입을 열었다.
“우선……. 실험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빠르게요.”
“그 말은…… 어떤 실험인지…….”
“군대가 개입했다는 건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조만간 그 바이러스……. 무기화될 거예요.”
“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