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진화 (4)
“어, 우식아.”
“네, 선배.”
“너 왜 이렇게 살이 빠졌냐? 스트레스받는 일 있어?”
유현은 이순규에게는 진료 협조를 다시 한번 부탁하고, 양재원에게는 어디서도 관련된 얘기 하지 말라는 얘기를 한 후 밖으로 빠져나왔다.
한강 다리 밑을 향해서였다.
오랜만에 보는 우식이 초췌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로 서 있었다.
“네? 스트레스받는 일이 있냐고요? 그게 할 말이에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심정이어서 그랬다.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하나 가득 품고 살고 있지 않나.
그나마 유현을 만나면 답답한 속이 좀 풀릴 것 같았는데.
이 인간은 만나자마자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아무리 여유로운 성품이라고 해도 유분수지.
이 상황에서 스트레스받는 일이 있냐고?
진짜 한 대라도 때리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아, 그거 때문인가. 그래, 뭐. 그럴 수 있지.”
“멀쩡한 얼굴 보니까 묘하게 열 받네…….”
“아무튼, 그거 어떻게 됐어. 검사 들어갔어?”
“아, 그거요. 네. 들어갔죠. 요새 김효상 국장님도 휴가시라 안에 분위기가 뒤숭숭하거든요. 그래서 그리 어렵지는 않았어요. 근데…….”
“근데?”
“결과가……. 이상해요. 그거 박기태 환자 혈액 맞아요?”
이건 또 뭔 소린가.
유현은 아까 우식이 지었던 표정을 그대로 반사했다.
말없이 그냥 지그시 바라보고만 있었다는 얘기였다.
피가 다를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우식도 사실 그럴 것 같았기에, 바로 말을 이었다.
“안에서 검출된 바이러스가 있기는 있어요. 있는데……. 유전자형 검사해 보니까, 이미 등록된 적이 있는 형태랑 매우 비슷하더라고요. 단순히 식욕만 증가시켰던 변종이랑…….”
“아, 그거. 그것도 되게 특이한 변종이었지.”
“네. 걸리면 살찐다고 그래서 한창 엄청 조심했었잖아요.”
“그래, 그랬지.”
유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어쩌면 그게 이 바이러스의 기초가 되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ARS-24가 행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힌트를 거기서 얻지 않았겠나.
‘개새끼들.’
어떻게 이런 망할 물건을 만들 생각을 했을까.
“2차 감염자들……. 어떻게 생각해 보면 덩치는 컸는데, 박기태 환자랑 비교하면 그렇게 큰 것도 아니라면서요.”
“어, 원상이가 얘기해 줬어. 지금 박기태는 괴물이래. 키가 2미터가 훌쩍 넘고, 어깨너비도 1미터……. 그게 다 근육이라니까, 달려들면 막기 어렵지.”
“어려운 게 아니라 불가능한 거 아닐까요?”
“나는 막을 수도 있을 거 같아.”
“그……. 하긴, 선배도 괴물이니까.”
“못 하는 말이 없네, 이 새끼.”
우식은 유현이 장난스레 내지른 주먹을 피하면서 말을 이었다.
그럼에도 표정만은 심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멀쩡해 보이는 세상에서 이 둘만은 종말을 예견하고 있었으니.
“아무튼, 아무튼.”
게다가 맞으면 아플 테니 좀 급했다.
아무리 장난이라 해도 맞는 사람은 장난이 아닐 수 있으니까.
괜히 괴물이라고 불렀겠나.
의사인 주제에 피지컬이 어찌나 좋은지.
뭔 대회만 있다 하면 나가서 입상했던 사람이었다.
“그 검체는 결과가 별 의미가 없을 거 같아요. 치료제 만들어 봐야……. 아닌가? 어차피 2차 감염자 행태가 다르다고 했으니까……. 거기에 대한 치료가 되려나?”
“그럴 수도 있는데……. 개선 중이라. 어떻게 될지 몰라.”
“개선……? 뭘 개선해요?”
“바이러스를.”
“미친놈들 아냐? 이 새끼들 이거? 진짜…….”
“원상이가 괜히 불려 갔겠냐. 그래도 걔가 정보를 주고 있긴……. 있긴 한데. 그것도 며칠 끊겼네. 아, 순규가 와 가지고 나도 정신이 없었어.”
생각해 보니 이순규 치료한답시고, 또 지킨답시고 요 며칠 아무것도 못 하지 않았나.
당연히 박원상과의 접선은 뒷전이 되고야 말았다.
기다리고 있었을까?
모를 일이었다.
하여간 오늘은 가 봐야 할 것 같았다.
그사이 연구에 진전이 있었다면, 그래서 박기태와 같은 환자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바이러스가 만들어지고 있다면 우식의 말대로 지금 검체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테니까.
“아……. 이순규 선배는 어찌 됐어요?”
“다행히 뭐……. 그냥 패혈증이었어. 지금은 다 나았어.”
“아, 그렇구나. 다행이네. 난 또 뭔 일 나는 줄 알고.”
“아무튼, 이거 받아.”
“이건 뭐예요?”
“박기태 환자 검체야.”
유현은 일부러 이순규에 대해서는 숨겼다.
우식을 믿지 못해서는 아니었다.
하지만 중요한 비밀일수록 아는 사람은 적어야 하지 않겠나.
양재원한테도 숨길 수만 있었다면 숨겼을 터였다.
애초에 이순규를 노티(Noti, 보고)한 사람이 양재원이 아니었다면, 필시 그랬을 터였다.
‘사실은 순규 거긴 한데……. 다행히 둘이 혈액형이 같더라고…….’
검체도 이순규의 것인데 그냥 박기태 것이라고 둘러댔다.
“전에도 받았잖아요.”
“이게 좀 더 전에 검사한 거야.”
“전이라면……?”
“뇌사 판정을 위해 나갔던 혈액이야.”
“아……. 그럼 뭔가 좀 다를 수도 있겠네요?”
“어.”
“와……. 이걸 어떻게 찾았어요?”
“생각해 보니까 연구용 데이터베이스로 내가 따로 보관해 뒀더라고. 뭐라도 나오면 좋은데.”
“그쵸. 이건 의미가 있을 수도 있어요. 와 양도 많네. 이거…… 선배 진짜 옵세(Obsessivea)네.”
혹 죽어 있을 당시의 혈액이라면.
그 혈액 안에 담긴 바이러스라면 뭔가 다르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이순규의 혈액을 거의 시간대별로 뽑아 둔 참이었다.
사실 일반적인 환자에서 이렇게까지 뽑는 경우는 없었지만, 우식이 보는 유현은 일종의 괴물이었기 때문에 그저 유현이니까 박기태 환자의 피도 연구 목적으로 이렇게 뽑아 놨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세계적인 감염내과 의사라는 명성과 평판이 의도치 않은 곳에서 도움이 된 셈이었다.
이걸 박기태에게도 했더라면 더 나았을까?
부질없는 고민이다 보니 고민도 더 이어 나가지 않았다.
“뭐…….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변종에 대해서는 좀 까다롭게 보는 편이지.”
“아무튼…… 알겠어요. 이건 제가 챙겨서 갈게요. 또 뭐 맡기실 일 없어요?”
“없어. 아, 근데.”
“근데요?”
“김효상 국장이 안 나온다는 건 무슨 일이야?”
“아…….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게, 음. 어……. 그러고 보니까, 딱 선배 만나고 온 날……. 다음 날부터 휴가 내셨는데.”
“어? 그래?”
“네. 어……. 그러고 보니까 좀 이상하네. 그때 뭔 일이 있으셨나……?”
유현은 우식의 어리둥절해하는 얼굴을 보면서 살짝 어이가 없어졌다.
‘진짜 정신이 없나……. 그걸 연결을 못 하나.’
김효상이 서울에 왔던 이유가 무엇이었나.
어떤 식으로든 박기태 환자가 사라졌던 일에 군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지 않았나.
그걸 말하고 나서 휴가를 냈다.
이건 분명 외압이 있었다고 생각해야만 했다.
달리 이유가 있을까?
아닐 터였다.
‘뭐……. 이제 와서 그게 급한 건 아니지. 이미…… 내가 직접 습격도 겪었고.’
하지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적어도 눈앞에 산적해 있는 일에 비하면 그랬다.
누군가, 아주 높은 사람들이 이 일을 추진하고 있다는 건 이제 뼈저리게 알게 되지 않았나.
김효상의 입을 닫는 일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터였다.
오히려 죽이지 않은 게 더 신기할 정도랄까.
‘그때 그 사람 죽였으면 나도 죽였겠지?’
여기까지 사고가 미치니까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김효상 국장……. 그 후로 본 적 있어?”
“네? 아, 네. 생전 휴가 안 내던 사람이 길게 내니까……. 어차피 집도 가깝겠다, 가 봤죠. 그랬더니 나오시긴 했는데 되게 잠깐 보기는 했어요. 골프 치러 가야 된다고 했었나.”
“팔자 좋아 보이던?”
“네? 아뇨, 뭐……. 그냥 좀.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 좋아 보이긴 어렵죠.”
“하긴 그렇지. 아무튼, 살아 있다 이거지.”
“네? 아니, 뭔 말을 그렇게 무섭게 해요. 이런 상황에 살았네 어쩌네 하니까 꼭 죽을 거 같잖아.”
그랬다가 도로 가라앉았다.
김효상이 살아 있다는 건, 어찌 되었건 상대도 이제 더 이상 폭력적으로 일을 처리할 생각은 없다는 거니까.
생각해 보면 이게 맞는 일이었다.
아무리 높은 사람이라고 해도 치안 좋은 대한민국에서 함부로 사람 죽이고 다닐 수는 없지 않겠나.
‘최소한의 안전은 보장된 셈이야. 그래도 조심은 해야겠지만…….’
유현은 조금이나마 안심했다는 얼굴로 우식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조심히 가고. 다음 주에 또 보자. 공유할 내용이 생길 거야, 아마.”
“아, 네. 급한 일 있으면 전화하시고요. 이거 어차피 선불폰이라 추적도 안 되는데 왜 이렇게 조심하는 거야. 나 세종에서 왔다 갔다 하기 빡세다고요.”
“뭐…….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지. 그리고 이렇게 건네줄 것도 있잖아.”
“오늘은……. 하긴 오늘 이건 좀 크네. 알았어요. 그럼 다음 주에 봐요.”
우식은 그런 유현을 향해 볼멘소리를 하다가, 이내 총총걸음으로 사라져 갔다.
주위에서 따라붙는 사람이 있을까 주의하면서였다.
오히려 저런 태도가 더 수상해 보일 거란 생각이 들었지만.
유현은 굳이 지적하진 않았다.
지금껏 안 걸렸으면 앞으로도 안 걸릴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하긴……. 생각해 보면…… 그때 왔던 놈들 허접하기 그지없었지.’
요원이라는 놈들이 유현과 오예리 형사 둘에게 막히지 않았나.
아무리 병원이라는, 그중에서도 센터라는 특수한 환경이었다고 해도 전혀 타격을 주지 못했던 건 좀 심하다 싶었다.
‘아마 그때 폭발……. 그거 때문에 그쪽으로 인력이 몰리지 않았을까? 우리 같은 잔챙이보다는 연구실 보안이 중요할 테니까.’
박원상도 사람 같지 않아 보이는 이들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주요 인력은 그쪽으로 다 빠진 게 틀림없었다.
국정원이 CIA처럼 예산이 많은 곳도 아니니, 인적 자원이 무한정 나올 수도 없을 테고.
“흐음…….”
덕분에 유현은 요 몇 주를 통틀어 제일 편안한 걸음으로 다리 밑을 빠져나왔다.
그러곤 박원상 아파트 주변의 공영 주차장에 차를 대고, 으슥한 밤길을 통해 아파트 안으로 향했다.
제법 경비가 괜찮은 아파트이긴 했지만 이미 몇 번이나 와 봤던 유현의 침입을 막을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없어…….’
쪽지를 꽂아 두기로 약속했던 층에 도달했으나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누군가 이걸 치웠을까?
그랬을 가능성은 적어 보였다.
그랬다면, 유현이 전에 왔을 때 일부러 버려 둔, 박원상이 피웠던 작은 꽁초도 없어졌을 테니까.
‘이건 있는데…… 쪽지는 없다…….’
박원상이 남기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게 옳아 보였다.
‘아니……. 걔가 그렇게 무책임한 놈은 아닌데…….’
물론 흥미가 옳고 그름 위에 있는 녀석이기는 했다.
하지만 하기로 한 일을 아예 쌩 까는 놈도 아니지 않나.
그렇다면 이건 왜 이렇게 되었을까.
‘혹시……. 못 왔나.’
그랬을까?
확인해 볼 수 있는 방법은 있었다.
전화만 걸면 될 일이었다.
제수씨에게.
“어, 오랜만이야. 혹시 원상이 있어? 어? 아아. 이번에 디아블로 나와 가지고, 혹시 같이할 생각 있나 해서. 어, 없어? 어……. 안 왔어? 며칠째? 아……. 학회 일로……. 시험 문제 내러 들어갔다고? 아아아. 그렇구나. 알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