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이변 (1)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미쳤냐?”
처음 원상의 말을 듣고 나서는 유현과 순규 모두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떻게 성인이 된 사람이 갑자기 키가 클 수 있겠냐, 뭐 이런 얼굴을 하고서였다.
감히 교수들 대화에 끼지 못하고 뒤에 서 있던 양재원 또한 비슷한 반응이었다.
다만 티를 내진 못할 뿐이었다.
여기 모인 3인방이 그래도 교수들 중엔 유한 편이고, 또 젊기도 해서 레지던트들과 상대적으로 허물없이 지내는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교수는 교수였다.
원한다면 언제든 재원의 인생 정도는 얼마든지 꼴 수 있었다.
“아니, 나 진지해. 지금 환자 호르몬 수치는 그 수준이야.”
“이 새끼 이러니까 헷갈리네.”
“그러게……. 너 나 정신과라고 무시하냐?”
“진짜라니까……. 너네 감이 없는 모양인데. 이 호르몬은 이거 말이 안 되는 거야. 누가 세팅해서 주사해도 이렇게는 안 될 거야.”
“흐음……. 진짜로 컸다?”
“뭐야. 그럼……. 진짜라고?”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는 정도도 아니고 그저 비웃고만 있던 둘이었지만.
워낙에 박원상 교수가 진지하게 말하고 있었기에 금세 태도를 고쳐먹었다.
원래 의사들끼리 환자 얘기할 때만은 장난치지 않는다는 불문율도 있지 않은가.
게다가 박원상은 호르몬에 미치다시피 한 인간이었다.
이놈이 호르몬 얘기를 할 때만큼은 믿어 주는 게 좋았다.
그게 설령 말이 안 될 것 같은 얘기라도 그랬다.
“그래, 진짜야. 나 눈썰미 좋은 거 알지?”
“그건 인정이지.”
박원상이 지금은 호르몬에 미쳐 버렸지만.
학생 땐 나름 연애에 미쳐 살던 시절도 있었더랬다.
당시 박원상의 생존 비결은 바로 사소한 변화 알아차리기였다.
유현 또한 몇 번인가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기에 이 점만은 마음속 깊이 인정하고 있었다.
“키가 컸어. 단지 살만 붙은 게 아냐. 골격이 변하고 있어. 저 환자 식단이 어떻지?”
“어떻긴, 병원식이지.”
“병원식……. 생각보다 영양소가 균형적이지. 한창 성장하고 있는 객체에 무한정으로 영양소를 들이붓는다면 이론적으로는 꽤 커질 수 있어.”
“이론적인 거잖아?”
“지금은 현상이야. 현상. 눈앞에서 커지고 있잖아.”
“허.”
박 교수의 시선을 따라 유현 또한 고개를 돌렸다.
굳게 닫힌 병실 문이 보였다.
치료 후, 안정을 위해 졸린 기운이 돌 수 있는 진통제를 놨으니 한숨 자야 정상일 텐데.
방 안쪽에서 우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새 무언가를 또 먹고 있는 모양이었다.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느낌이……. 진짜 이상한데.’
분위기를 보아하니, 박원상은 그저 호르몬 수치에 매료된 것으로 보였다.
호르몬 덕후가 실재할 수 없는 호르몬 수치의 집합을 봤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순규 교수는 연신 아까 환자에게 한 대 먹였던 주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기억 상실이라는 단어를 되뇌었다.
수치니 뭐니 다 모르겠고, 공격성과 기억 상실만 궁금한 모양이었다.
‘이놈이야 뭐 얼른 회진 끝내고 가서 쉴 생각이겠지.’
뒤에 선 양재원이야 뭔 생각하고 있을지 굳이 고민할 필요조차 없었다.
딱히 이놈이 잘못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원래 레지던트 때는 다 이런 법이었다.
유현은 좀 달랐지만.
자신이 특이한 편에 속한다는 것 정도는 옛날옛적에 깨달았다.
“그럼……. 일단 랩 팔로우업은 계속해야겠지?”
“어? 어, 당연하지. 계속해야지. 매일 해, 매일.”
“호르몬에 대해서는 약 쓸 필요 없을까?”
“저런 수치는 나도 처음이라……. 일단 보수적으로 접근해야 할 거 같아. 우리 쪽 학회 사람들이랑 상의해 보고 답신 줄게.”
“알았어.”
제아무리 신기한 환자가 있다고는 하지만.
마냥 여기 다 붙잡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다 각기 봐야 할 환자가 있고 또 따로 해야 할 일도 있을 터였다.
해서 유현은 우선 호르몬에 대해서 묻고 이순규를 돌아보았다.
이순규는 여전히 주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딱히 다친 것 같아 보이진 않는데, 여간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하긴 냅다 환자를 후렸는데 그럴 만도 하지.’
요즘 세상에 고소라도 하겠다고 덤비지 않는다면 그게 천운이었다.
“그리고 순규야. 저거 공격적인 건 어쩌지?”
“일단……. 두고 봐야 될 거 같아. 계속 그러는 게 아니라서 안정제를 주사로 주기는 좀 뭣하고…….”
“그렇다고 그냥 둬?”
“아니, 약을 주긴 줘야지. 내가 처방 내릴게.”
“오케이, 좋아. 아, 이게 명색이 ARS-24 전문가인데……. 아예 처음 보는 증상만 있으니까 손을 쓸 수가 없네.”
유현의 너스레를 끝으로 다들 할 일을 하러 돌아갔다.
다만 거기에 묻혀 가려는 재원은 유현에 의해 멈춰야만 했다.
“넌 어디 가. 우리 환자가 박기태 하나야?”
“아…….”
“앞장서. 나머지 봐야지.”
“네.”
본래 감염내과는 입원 환자 자체는 적은 과로 인식되던 때도 있었다.
주로 협진을 보는 과이지, 직접 환자를 받는 경우는 적었다는 뜻.
하지만 그것도 이제 다 옛말이었다.
ARS-24로 인한 팬데믹이 온 세계를 휩쓸고, 그것도 모자라 엔데믹이 된 지금에 이르러서는 제일 환자가 많은 과 중 하나가 된 지 오래였다.
그만큼 정부 보조금도 많아서, 신규 교수도 많았다.
덕분에 유현은 비교적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과 내에서 위치가 낮지 않았다.
“아, 교수님. 이번에 변종 확인하셨다면서요? 축하드립니다.”
회진을 돌고 있으려니 얼마 전 신규 발령받은 후배 하나가 인사했다.
“아직 확실하진 않아. 너무 행태가 특이해서 이게 정말 ARS-24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아예 다른 병인지 모르겠어.”
“그런가요? 질본하고는 소통하고 계시는 거죠? 그쪽이 이런저런 정보가 많잖아요.”
옛날 질본, 그러니까 질병관리본부 시절에는 그 위상이 지금 같지 못했더랬다.
그저 유행병 돌면 보고나 좀 받고 취합하고 하는 수준이었는데, 이젠 아니었다.
전 세계 질병관리본부들이 다 같이 정보를 주고받게 되었기 때문에 민간에서 정보력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적어도 감염병 한정에서는 민간이 공공에 온전히 의지하는 시대가 와 버린 것이었다.
“아……. 어, 하고는 있는데 그쪽도 아직 이런 변종이 있다는 보고는 없나 봐. 몰라 오늘 우식이 보기로 했어.”
“아, 최우식 선배요? 아, 그렇지. 서기관이시죠?”
“응. 잘나가. 힘들어서 그렇지.”
“안부 좀 전해 주세요, 선배.”
“그래.”
유현은 몇몇의 인사를 더 받아 주면서 회진을 끝냈다.
다행히 박기태 환자를 제외하면 특이한 환자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물론 여전히 간간이 입원하는 ARS-24 환자들 때문에 보호의를 입었다 벗었다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기는 했지만.
그나마 한국대학교 병원은 격리병실에 음압 시설이 아주 잘되어 있어서 절차가 조금은 간편한 편이었다.
“오케이. 그럼……. 이 환자 셋은 내일 퇴원시키고. 이 환자들은……. 모레 봐서 퇴원. 나머지는 일단 처방 유지.”
“네, 교수님.”
“아, 박기태 환자는 일단 협진 회신 오면 그거 따르고 있어. 나 잠깐 나갔다 들어와서 직접 챙길 테니까 처방 건들지 마.”
“네, 교수님. 저 오프라 그런데…….”
“아, 오프야? 그래. 빨랑 나가라.”
“네, 감사합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격변하는 의료 체계에서 하나 불변하는 게 있다면 레지던트들의 고생이었다.
물론 주 근무 시간 제한이 없던 유현의 레지던트 때와 비교하면 개꿀이었지만.
굳이 그런 꼰대 같은 소리를 할 이유는 없지 않겠는가.
심지어 유현이 현재 전공의 주당 근무 시간 88시간 시대를 연 주역이었다.
그런 주제에 요새 전공의들은 논다 어쩐다 얘기하는 건 인지 부조화라고 생각했다.
‘좋아……. 더 챙길 자료는 없지?’
유현은 혈액 검사 수치 및 영상 검사 그리고 환자 사진 등을 점검했다.
이럴 거면 그냥 우식이 이리로 오는 게 어떤가 싶었지만.
질본이 보유한 자료는 외부로 반출이 안 되었다.
즉 어떤 도움이라도 받고자 한다면 이쪽에서 가는 게 옳았다.
부웅
유현은 자료를 챙기자마자 차를 몰고 질병관리부 서울 지부로 향했다.
저녁이라 좀 막히긴 했지만, 그래도 ARS-24 시대가 오기 전과 비교하면 훨씬 나았다.
이제 사람들은 이전보다 덜 만나고, 덜 나왔다.
부우웅
막 도착하려니 전화가 왔다.
최우식이었다.
“성질도 급하지. 다 왔어.”
-아, 그래요? 이해 좀 해 주세요. 저도 뭐 말씀드릴 게 있어서 그래요.
“그래? 뭐 좀 나왔나 보지?”
-네. 근데 이게……. 우리도 정상적인 루트로 입수한 게 아니라 통화로는 어려워요.
“음.”
정상적인 루트가 아니라니.
이게 질병관리본부 서기관 입에서 나온 말이 맞나.
나 혹시 국정원 요원 같은 애랑 통화하는 건가.
-복잡해요, 이게. 들어오시면…… 그때 얘기해요.
“알았어. 나 주차 중이야.”
-네.
하여간 무슨 얘기가 나올지 기대가 됐다.
해서 유현은 차를 대강 집어넣고는 곧장 1층 로비로 향했다.
맨날 오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들어가려면 절차가 복잡했다.
이제 그 어떤 정보보다도 감염병에 대한 정보 및 국가적 대응 체계 등이 중요해진 탓이었다.
“어, 선배. 이쪽이요. 회의실 빌려 놨어요.”
“둘이 들어가는 건 처음이네.”
“일단 이거 잠그고…….”
“잠가야 되는 정도야?”
“네. 이것 좀 보세요. 전에……. 흑룡강성 대병원 케이스 말씀드렸었죠?”
“어? 어.”
“암만 봐도 괘씸하더라고요. 분명히 정보가 있을 거 같은데 안 줘. 그래서 인터넷을 좀 뒤져 봤더니, 이걸 파는 놈이 있었어요.”
“팔아? 뭘.”
“봐 봐요.”
우식은 문을 잠그고는 USB를 꽂았다.
그러자 영상 하나가 재생이 됐는데, 지독하리만큼 화질이 좋지 못했다.
일부러 이렇게 만든 느낌이었다.
요새 나오는 물건으로 찍으면 그게 아무리 싸구려라도 이것보단 잘 나왔다.
“뭐야.”
“이거…… 그 병원 CCTV 자료래요. 몰라, 나도. 위에다 보고했는데 사기당한 거라고 개무시하더라고요. 화질 보면 그렇게 말하게도 생겼지.”
“그런데 너는 아니라고 생각해?”
“저는 형한테 지금 형 환자 얘기를 들었잖아요. 행태가…… 비슷해요. 자 봐요. 여기.”
“어…… 아. 이게 그 공격당했다던…… 의사인가?”
“네. 그런 거 같아요. 보면 물었죠. 그러고 나서 전에 중국에서 보내 준 자료 화면을 보면……. 이 환자 맞는 거 같죠?”
“그렇네. 으음. 잠깐만 멈춰 봐.”
유현은 전에 봤을 땐 놓쳤던 무언가를 찾은 느낌이었다.
“아, 네.”
우식은 유현의 말에 따라 즉시 영상을 멈췄다.
유현이 이럴 땐 반드시 작은 거 하나라도 나오기 때문이었다.
촉이 좋다고 해야 할까?
하여간 유현에게는 의학 지식 외에 뭔가 더 있었다.
“이 환자……. 턱이, 턱이 좀 아크로메갈리(Acromegaly, 말단 비대증) 같지 않냐?”
“네? 아…… 그렇게 들으니까 그런 거 같아요.”
“지금 내 환자도 호르몬이 높거든? 이 환자도 호르몬 영향으로 이렇게 됐다고 하면 억측일까?”
“같은 환자군 같다 이거죠?”
“그래. 가능성이 있지.”
“음…….”
“그리고…… 이 호르몬 변화에 의한 행태 변화가 정말 ARS-24에 의한 거라고 한다면…….”
“한다면요?”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닐 거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