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공 행진 (4) >
차조영 실장이 운전석에 앉아 백미러를 힐끔 거렸다.
진귀한 장면이긴 하지.
매일 시커먼 남자 다섯 명에서만 타던 승합차에 우리가 데뷔한 이후, 처음으로 여자 연예인이 올라탔으니까.
서은채를 담당하고 있는 최형식 실장은 서은채가 치켜뜬 도끼 눈에 줄행랑을 놓아버렸고, 그 덕분에 서은채는 내가 타고 다니는 승합차 위에 올라타 같이 이동중이다.
서은채가 눈에 잔뜩 힘을 준 채 발끝을 까딱거린다. 시상식 때 봤던 드레스를 벗어던지고, 스키니 청바지에 두터운 패딩을 꽉 여민 채.
조금 전에 시상식에서 봤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완전히 다른 분위기다.
헌데, 벤에 올라탄 이후로도 뭔가 못마땅한 것이 있는지 팔짱을 낀 채 입을 꾹 다물며 나를 째려보고 있다.
그리고 그 서슬에 나와 차조영 실장은 침묵을 지킨 채 눈만 껌뻑이고 있고.
내가 뭘 크게 잘못했나?
아, 밥 산다고 해서 안 사서? 그거야 뭐. 다들 날림 멘트로 하는 말들 아닌가? 커피 한 잔 하자, 술 한 번 먹자, 밥 한 번 먹자등.
내가 논 것도 아니고, 2집 앨범을 낸 후로 몸이 두 개라도 바쁠 정도로 스케줄이 치여 지냈으니까.
배가 너무 고파서 예민해졌나 싶어 늘 차에 상비해두고 있는 초콜릿을 건넸다. 단 것이 들어가서 기분이 풀린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치켜 올라가있던 눈꼬리가 서서히 내려간다. 이제야 평소에 보아오던 서은채 얼굴이 됐다.
“그런데 뭐, 살 거예요? 오늘 상도 2개나 받았겠다. 중국 진출도 성공적이고, 축하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닌 것 같은데.”
저건 틀림없이 비싼 거 사달라는 소리겠지?
“뭐 먹고 싶어요?”
“소 먹죠. 소.”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이 튀어나온다. 그런데 오늘 분위기를 봐서는 혼자 한 마리도 거뜬히 먹어치울 분위기다.
뭐, 그래, 까짓 꺼.
여자가 먹어봤자 얼마나 먹겠어.
“그래요. 가죠. 소 잡으러.”
*
다음 날 아침.
박진우가 나를 보자마자 음흉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형, 어제 은채누나랑 밥 먹었다면서요?”
“어, 먹었지. 내가 밥 산다고 했거든.”
어제의 충격과 공포가 생생히 돋아났다.
왜냐하면 혼자서 꽃 등심을 7인분이나 먹어 치웠거든.
처음과는 확연히 달라진 식욕 때문에 깜짝 놀랐지. 아무래도 처음 만났을 때 조금 먹은 건 내숭임이 틀림없었다. 그땐 1인분밖에 안 먹었으니까.
“어땠어요?”
“많이 먹더라.”
“또요?”
또?
“은채씨 꽃등심 엄청 좋아하더라. 혼자서 7인분 먹었어.”
갑자기 박진우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나를 쳐다보는 눈동자 깊숙한 곳에 안타까움이 짙게 깔려 있다. 혀를 내차는 것 같기도 하고.
뭐지, 저런 눈빛은?
“뭐야, 왜 그런 눈으로 봐?”
“아니에요. 그냥 좀 딱해서요.”
“뭐가?”
“형은 어쩔 때 보면 참 못하는 게 없어 보이는데, 이럴 때 보니까 그쪽으론 영 꽝 같단 말이죠. 역시 신은 공평한 것 같아요.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주지 않은 걸 보면.”
그러더니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폭탄 같은 말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은채누나가 형한테 관심 있는 거 같아요.”
뭐? 서은채가?
눈이 번쩍 떠졌다.
“설마······. 그냥 팬심 뭐 그런 비슷한 거겠지.”
실제로도 서은채는 플레어 노래를 달달 외우고 다닐 정도로 많이 듣는다고 했으니까. 맨처음 만났던 날도 팬이라며 사인을 해달라고 했었지.
“글쎄요. 그냥 형은 모르는 게 나을 수도요.”
박진우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채 유유자적 방으로 사라졌다.
잠시 나는 생각했다.
서은채가 나를?
그리고는 재빨리 고개를 내저었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
*
추위가 성큼 다가온 1월.
가뜩이나 추운 날씨만큼 국민들의 마음을 얼어붙게 만드는 일들이 연속해서 터졌다.
잇달아 대형 크레인 전복 사고로 십여 명의 인부들이 아까운 목숨을 잃는가 하면, 대형 병원에서 불이 나 수십 명의 환자들이 탈출을 하지 못해 목숨을 잃는 사건도 발생했다. 산불이 나고, 온갖 종류의 정치비리들이 쏟아져 나오며, 한동안 뉴스에서 떠들썩하게 떠들어댔다.
아주 개판도 이런 개판이 따로 없다.
전반적으로 사회 분위기가 어수선한 시점이라 한 동안 이와 같은 냉랭한 분위기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그 차가운 바람은 방송가에도 불어 닥쳤다.
더군다나 이 시기가 되면 개편 시즌을 준비해야하는 달이기도 하다.
몇 달, 혹은 몇 년을 잘하던 프로들이 시청률 부진으로 인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기도 하고, 트렌드에 맞춘 번뜩이고, 새로운 프로그램들이 그 자리를 꿰고 불쑥 등장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30대 싱글 족들이 크게 늘면서 케이블 방송을 중심으로 각종 여행관련 프로그램이나 맛집, 싱글 라이프에 관련된 프로그램들이 크게 각광을 받고 있다.
1월이 지나고, 2월 달이 될 무렵에는 달력에 가장 먼저 설날이 보인다.
그리고 설날 하면 아이돌들과 천만 아이돌 팬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프로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아이돌 육상, 볼링, 양궁, 리듬체조, 에어로빅, 수영등의 다양한 스포츠 종목들을 놓고 아이돌끼리 대결을 펼치는 일명 아육대.
MBN방송국에서 매해 설날이나 추석 때마다 진행하는 프로그램인데, 언제부턴가 아육대는 아이돌들의 축제의 장이 된지 오래다.
워낙 종목도 다양한데다가 참여하는 아이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지라 출연 장벽이 그리 높지 않기에 신인 아이돌 그룹들의 대거 참여가 가능했다.
그러한 이유로 신인들에게는 자신들의 얼굴과 그룹을 노출시킬 수 있는 자연스러운 마케팅이 가능하기 때문에 아이돌들에게도 인기가 높은 프로중 하나다. 또한 아육대를 통해서 자신의 신체적 건강함을 과시할 수도 있기에 타 방송국 피디나 관계자들에게도 어필도 가능하다.
각 종목의 메달자들에게는 금, 은, 동메달이 수여되는데, 가짜가 아닌 진짜가 수여된다.
“어휴, 또 난리들이구만. 이맘때만 되면. 아주 그냥.”
아육대를 맡은 최중현 메인피디가 게시판 글들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워낙 프로그램 사이즈가 크다보니 아육대가 개최되면 달라붙는 피디도 많고, 작가들도 수십 명이 동원되기도 한다.
“왜요? 또 항의글 올라왔어요?”
이보라 메인작가가 상체를 기울이며, 최중현 피디가 보고 있는 화면을 쳐다봤다.
게시판이 온통 아육대에 관한 글들로 난리가 아니었다.
“우리 오빠들 다치게 하면 가만 안 둬요. 저번에 보니까 경기장 바닥이 그냥 시멘트던데, 우리 오빠들 뛰다가 넘어지면 어떻게 보상하실 건데요. 민폐 프로그램이다. 그냥 폐지해라. 어휴, 어째 올해는 강도가 더 쎄지네. 이러다가 테러 들어오는 거 아니에요?”
최중현 피디가 한숨을 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럴지도. 하아, 나도 진짜 이 짓 그만두고 싶다.”
“안하면 되잖아요?”
“내가 뭐 힘 있어? 국장님이 까라면 까야지. 그리고 예능 프로그램 하다가 다칠 수도 있는 거지. 애들 의욕이 앞서서 다친 걸 나보고 어쩌라고? 그러면 올림픽 같은 경우는 해마다 부상자 나오니까 국가적인 차원에서 개최하지 말라고, 천 만 서명 운동이라도 할까? 스키 점프 같은 건 어떻고? 착지 잘못해서 넘어지면 최소 골절인데.”
“하긴. 이걸 기회의 장으로 삶는 아이돌도 많으니까요. 운동돌이라는 이미지 만들기도 좋고. 따지고 보면 이만한 프로그램이 없죠.”
“내 말이! 그런데 시청자들은 그런 걸 안 알아준단 말이지!”
“팬들이 뭐 그런걸 아나요? 자기들이 응원하는 아이돌들이 생채기라도 하나 나면 득달같이 물어뜯으려고 들지.”
“그래서 올해는 세트장에 더 신경 쓰고 있잖아요. 작년에 메트로 최은수랑 또 걔 누구냐. 뉴보이스 정현. 계주 달리기하다가 넘어져서 무릎 까졌다고 팬들이 아주 그냥 생 난리를 친걸 생각하면. 어휴······. 그 덕분에 세트장 허술하다고 시말서까지 썼잖아요.”
“아무튼 올해만큼은 한 명의 부상자도 없이 무사히 끝나야할 텐데.”
최중현 피디는 거의 비는 심정이었다.
말 많고 탈 많은 아육대를 무사히 끝낼 수만 있기를.
“아, 그보다 올해는 좀 눈여겨볼만한 아이돌 있어요?”
“음. 있지.”
잠시 생각에 잠긴 최중현 피디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누구요?”
“플레어 출전하잖아. 그래서 벌써부터 다들 난리고.”
“아, 맞다. 최강민인가 걔 말씀하시는 거죠? 저도 생존의 법칙 봤어요. 그런데 최강민이 이것저것 다 잘하는 건 봤지만 스포츠 종목을 딱히 잘하는 건 못 본거 같은데요?”
“그냥 하는 것만 봐도 딱 견적 나오지. 몸매도 날렵하고, 체력도 좋은 것 같고. 벌써부터 아이돌 사이에서는 견제하는 분위기던데?”
“그래요?”
“나도 개인적으로 기대되더라고. 과연 최강민이 얼마나 잘할 수 있을지 말이야.”
*
아이돌 육상대회에는 보이그룹과, 걸 그룹. 총 150명 정도의 아이돌들이 스포츠 종목으로 겨루게 된다. 한 명이 여러 종목의 중복 출전도 가능해서 대체적으로 자신 있어 하는 종목을 2, 3개씩 출전하기도 한다.
녹화는 총 이틀로 나눠서 진행되고,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남자 60m달리기, 여자 60m달리기, 남자 400m 계주, 여자 400m계주 등의 육상종목을 하고, 잠실 실내 수영장에서 수영종목으로 대결을 펼친다.
그 밖에 종목은 여자 양궁, 여자 리듬체조, 남자 에어로빅, 농구, 남자 볼링, 여자 볼링. 남자 씨름 등이 있다.
녹화는 총 이틀로 나눠서 진행되는데, 이 맘 때가 되면 팬들의 불안감이 증폭되기도 한다.
수많은 아이돌들을 한 자리에서 봐서 기쁘기는 하지만 꽃다운 청춘의 남자, 여자 아이돌들이 한 장소에 모여드니, 당연히 팬들로서는 긴장이 될 수밖에 없다.
손끝만 마주쳐도 불꽃이 튀는 청춘들이기에 실제로도 아육대에서 만나 남, 여 아이돌들이 호감을 표현하는 사례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드디어 꽁꽁 얼어붙었던 1월 달이 지나고, 2월 달이 찾아왔다.
아육대 녹화 당일날.
녹화를 위해 멤버들과 나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차에 올라탔다.
60미터 달리기는 박진우가, 400미터 계주에는 노아를 제외한 멤버 넷이 나가기로 했고, 그 밖에 농구, 볼링, 씨름에도 참가하기로 했다.
내가 나갈건 400미터 계주와 농구, 씨름이다.
녹화 장에 도착하니 이미 많은 아이돌그룹들이 저마다 가벼운 옷차림을 입은 채 몸을 풀고 있었다. 이렇게 아이돌끼리 만나는 경우는 보통 가요프로그램에 출현했을 때나 가능한데, 그와 같은 곳은 선배들이 워낙 많아 지금과 같은 자유로운 분위기는 결코 아니었다.
헌데, 지금은 아이돌들이 마치 봄 소풍을 온 것처럼 화기애애하다.
개막식과 프로그램을 진행해줄 남자 아나운서 전백무와 최선영 아나운서가 이미 도착해 있었고, 개막식 축하공연을 해줄 예능인들도 보인다.
복장도 모두 그럴 듯하게 검은색 양복에 넥타이까지 맸다.
마치 스포츠 해설위원들 같다.
실제로도 각 종목마다 자문 역할을 해줄 해설위원들도 섭외가 됐는데, 모두 국가대표 경력이 있든가 혹은 국가대표 코치를 맡고 있는 이들이다.
11069석을 수용할 수 있는 잠실 실내체육관에 관객들이 객석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개막식, 축하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멘트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자 객석에서 ‘와.’ 하는 엄청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게이트 한쪽에서 예능인들에게도 익숙한 DJ쿠가 손을 흔들며 입장을 한다. 그의 손짓과 함께 EDM이 흘러나오자 가을 낙엽만 봐도 꺅꺅거린다는 소녀들이 그루브를 타고, 팝핑을 하고, 몸을 흔들며 아주 난리가 났다.
< 고공 행진 (4) > 끝
ⓒ 윤민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