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듀스 나노머신-123화 (123/124)

< 고공 행진 (3) >

확실히 SBN에서 신경을 많이 쓴 티가 났다.

돈을 얼마나 발랐는지, 일반적인 가요무대 훨씬 더 크고 화려하고 웅장하다. 그 크고 화려한 무대 옆에는 진행자들의 자리가 보이고, 바쁘게 카메라와 조명, 오디오 장비들을 들고 뛰어다니는 스텝들의 모습도 보인다.

가요대전 무대 위에서 부르는 노래는 모두 라이브로 진행된다. 진행자의 사인과 함께 대형 스피커에서 준비된 MR이 흘러나왔다. 리드미컬한 리듬 속에 서서히 울려 퍼지는 파워풀한 선율이 서서히 무대와 그 주변을 잠식해 나간다.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 입을 뗐다.

마이크를 통해 차분하면서도 깊은 울음이 있는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자 분주하게 움직이던 스텝들의 움직임이 마치 짜기라도 한듯 동작이 멈췄다.

그리고는 스텝 한 명이 두 손으로 가만히 몸을 쓸어내렸다. 등줄기에서부터 돋아난 소름이 어느새 팔뚝까지 번져 있었다.

“와······. 진짜.”

“플레어 라이브 실력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지만, 이건 뭐.”

“원곡 보다 더 좋은데? 노래 엄청 잘빠졌네. 최강민이 각색한 건가?”

지금 부르고 있는 곡은 20년 전 골든 디스크 수상을 한 ‘너에게 보내는 길.’이라는 곡으로 4인조 보이그룹이 부른 노래다. 3분 50초의 리허설 곡이 끝이 나고, 1시간 후. 관객들이 물밀 듯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1만 명이라는 인원이 객석에 가득 찬다.

전에도 말했다 시피 가요대전은 가수들에게도, 그리고 관객들에게도 축제의 장이다. 팬들의 응원에도 오늘만큼은 벽이 없다. 너나할 것 없이 LED봉을 들며 등장하는 가수들의 이름을 목이 터져라 불러댄다.

그에 대한 보답이라도 하듯 무대 위에 가수들은 공연을 펼치며 화답을 하고 있고.

그렇게 뜨거운 열기 속에서 밤이 점점 깊어갔다.

많은 환호와 갈채 속에서 1부, 2부로 나뉘어서 방영된 SBN가요대전이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다음날, 그 다음날.

연달아 이어진 KBN과 WBC가요대전 까지 모두.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가요대전이 가수들을 위한 축제의 장이라면, 올 한해 안방극장을 책임져준 연기대상과 올 한해동안 많은 웃음을 시청자들에게 안겨준 배우들의 축제인 연예 대상 시상식이 남아 있다.

그리고 나는 KBN 연기대상 시상식에 참가하기 위해 검은색 턱시도를 꺼내 입었다.

“와, 그렇게 입으니 결혼식에 들어서는 새신랑 같고 좋네.”

전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있는데, 옆으로 다가와 차조영 실장이 히죽 웃었다.

약을 올리는 건지 감탄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나뿐만이 아니라 차조영 실장도 늘 입던 작업복 같은 양복바지와 두터운 블루종을 벗어던지고, 스웨터와 코트를 잘 차려입었다. 그래도 명색이 시상식인데, 아무리 매니저라도 이 정도는 입어줘야 한다면서.

리무진을 타고 속속 배우들이 하나 둘 도착을 한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눈부시도록 좋은 밤입니다.”

베이글녀의 표본이라고 불리는 우주소녀 예나의 블랙 드레스를 시작으로 아찔한 가슴굴곡을 훤히 드러낸 빨간 드레스를 입은 임수양과 그에 뒤질 새라 누트 톤 드레스를 입은 김세연까지 손을 흔들며 등장하자 그 열기가 더욱 뜨거워진다.

줄줄이 협찬의 향연이 이어졌다. 시상식 때 입고 나온 누구누구 드레스라는 꼬리표는 몇 달이 가도록 내내 이어지며, 회자되기에 드레스 한 벌을 위해 몇 개월씩 시간을 소요하는 디자이너도 있다. 그 때문에 어느 유명디자이너의 드레스를 누가 입었나 하는 것

도 관전 포인트 중 하나이기도 하다.

엄청난 관심과 함성. 스포트라이트가 배우들이 리무진을 타고 내릴 때마다 쏟아진다.

그리고 그건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최강민씨! 오늘 한해는 거의 최강민씨의 한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시청자들에게 한 말씀만 해주시죠!”

“최강민씨! 오늘 멤버들은 같이 안 오셨나요?”

“최강민씨! 이쪽 한 번만 쳐다봐주세요! 최강민씨!!!”

아주 이름이 닳겠다.

차조영 실장이 차단 봉 뒤편에서 웃으라고 끊임없이 손가락으로 입 주변을 가리키고 있다. 웃으라면서.

그렇지않아도 리무진을 내린 다음부터 끊임없이 웃고 있다.

그것 때문에 입 꼬리주변이 경련이 일어날 지경이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드레스로 늘씬하고, 긴 기럭지를 뽐내는 여배우들과 깔끔함과 멋스러움으로 무장을 한 남자 배우들이 모두 레드카펫을 밟고, KBN 홀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소란이 잠잠해졌다.

KBN 공개홀안으로 들어오자 어마어마하게 큰 세트장과 화려한 시상식 무대가 보인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수십 개의 큰 원형 테이블이 놓여 있다. 이미 자리에 들어선 곳마다 배우들이 천지다. 그나마 가수로서 2년차라도 됐지, 이곳에서 나는 군대계급으로 따

지자면 막 입소한 훈련병이나 마찬가지다.

고개가 쉴 틈이 없다.

쉴 새 없이 머리를 조아리며, ‘안녕하세요. 최강민입니다.’ ‘반갑습니다. 선배님. 최강민입니다.’

누가 손만 툭 건드리면 자동처럼 인사가 튀어나갔다.

듣기 좋은 덕담이 오고가고, 내 팬이라고 자청하는 대선배님들과 사진도 찍었다. 자신의 딸, 혹은 아들들이 플레어 팬이라면서.

나중에 꼭 사인도 해달라는 신신당부를 한다.

물론 좋기만 한건 아니었다. 쟤는 뭔데 드라마 한편에 스타소리를 듣냐, 가수면 노래나 할 거지 연기 판에 뛰어들어 물을 흐려놓네. 질투와 못마땅함과 부러움에 얼룩진 그런 시선들도 뒤따랐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귀엽게 봐주는 분위기였다.

“오늘따라 강민씨 더 멋있네요.”

종갓집 식구들 팀과 함께 앉아 있는 서은채가 손을 흔들었다. 반가운 표정이 물씬 배어나온다. 그런데 뭔가 평소와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소위 말하는 드레스 빨인가?

그녀는 하얀 목선과 쇄골을 과감하게 드러낸, 블랙 앤 화이트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평소에는 예쁜 여동생이라면 지금은 여동생보다는 이성느낌이 더 강했다. 새하얀 피부에 뭘 발랐는지는 몰라도 아주 광채를 내고 있었다.

“은채씨도요. 더 예쁘시네요.”

보는 눈도 많고, 인사를 나눠야할 이도 많은지라 나중에 보자는 말과 함께 헤어졌다.

공개홀을 한 바퀴 돌고서야 꽃 미남 학교라고 종이가 쓰여 있는 테이블에 도착했다. 인사하는데만 30분이 넘게 걸렸다. 몇몇 반가운 얼굴들이 보인다. 몇 개월씩 나와 같이 현장에서 동고동락 했던 꽃 미남 학교팀들.

송희연 작가와 하윤성 피디, 그리고 김준호와 그 옆에 찰싹 붙어 있는 장선화. 이우빈과, 최하늘. 꽃 미남 2인방까지.

다들 옷차림에 엄청 힘을 준게 느껴진다.

특히나 송희연 작가는 늘 즐겨 입던 청 자켓을 벗어던지고, 여성스러운 수트로 제대로 차려입고 왔다. 그것은 하윤성 피디도 마찬가지고.

볼 때마다 턱수염도 제대로 밀지 않아 꼭 피시 방에서 게임만 하는 아저씨 같았는데, 오늘 보니 피시방 폐인이 아니라 게임하러 온 직장인쯤은 되어 보인다.

“여, 최강민씨. 오늘 의상에 엄청 힘줬네요?”

그리고 김준호가 능글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했다. 그 옆에 앉아 있던 장선화도 한 마디를 덧붙인다.

“최강민씨. 오늘보니 더 멋지네. 와, 이런 남자를 낚아채가는 여자는 대체······.”

그러더니 내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들릴까 말까한 소리로 속삭였다.

“혹시 애인은요? 내 주변에 최강민씨한테 관심보이는 여자배우들 여럿 있는데, 관심 있으면 연결시켜 줄까요?”

그걸 보고 있던 김준호의 눈에서 불똥이 튄다.

“뭐라고 둘이 속닥거리는 거야! 남친이 옆에 버젓이 이렇게 있는데.”

“너는 신경 꺼. 이건 최강민씨랑 둘이 할 애기니까.”

“뭐!? 너는? 이게 오빠한테 너가 뭐냐 너가! 사람들도 이렇게 많이 있는데. 진짜 말 곱게 안할래?”

헌데 장선화가 오히려 콧방귀를 낀다.

“꼬으면 너도 너라고 하든가. 그리고 나 빠른 생일자거든? 데뷔 일도 나보다 느린 게. 나한테 선배님이라고 불러.”

그러면서 둘이 또 붙어서 왈왈 거린다.

저건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분위기가 어느 정도 가라앉을 무렵, 무대 위로 진행자가 올라오는 것을 보며, 송희연 작가가 상체를 슬쩍 기울이며, 하윤성 피디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우리들 중에서 상 한, 두 개 정도는 나오겠죠?”

“당연하죠.”

그러더니 시선이 김준호와 장선화에게 잠시 머물다 사라진다.

“최우수상 정도는 이미 맡아놓은 것 같고, 잘하면 대상까지도 노려볼 만할걸요? 올한 해 동안 딱히 히트를 친 드라마가 없으니까. 그리고 일단 신인상은 무조건 확정 아니겠어요? 최강민씨가 있는데.”

그러더니 송희연 작가가 나를 힐끔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안 그래요. 최강민씨?”

아, 여기서도 이 소리를 듣는구나.

그렇지 않아도 연말에 가까워질수록 신인상은 무조건 내거라며 아궁이에 불 지피듯 바람 넣는 사람들이 하도 많아 귀에 못이 박힐 지경이었는데.

하윤성 피디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참한다.

“꽃미남 학교 시청률 이끌어낸 일등공신이 누군데, 신인상은 당연한 거지. 나는 운 좋으면 최우수상까지도 노릴 수 있다고 봐. 더군다나 이제는 한류스타인데 상하나 안주는 게 말이 안 되지.”

김준호까지 덩달아 그 위에 숟가락을 올려놓는다.

“최강민씨가 처녀작만 아니라면 진짜 이건 대상도 노려볼 각인데. 그래도 신인상 정도는 기대하고 있어 봐요. 내가 봤을 때 그건 무조건 줄 거 같으니까.”

모두들 상에 대한 기대감을 듬뿍 드러낸 채, 연기대상 수상식의 막이 올랐다.

그리고.

“축하드립니다. 신인상. 꽃미남 학교에 출연하신 최강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모두의 예상대로 올해의 신인상은 나에게로 돌아왔다.

곧 이어진 연출상 수상에서는 하윤성 피디가 상을 수상, 송희연 작가는 작가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올 한 해 동안 KBN드라마를 빛낸 최고의 연기자를 뽑는 네티즌상은 내가 받았다. 어떻게 보면 네티즌들이 직접 투표를 해서 뽑은 상이라, 대상만큼의 값어치가 있는 값진 상이었다.

베스트 커플상에도 나와 장선화가 후보로 올라갔지만, 상을 받진 못했다.

김준호가 그걸 보고 고소하다며 한참동안이나 낄낄거렸다.

이제 남은 것은 최우수상과 대상뿐인데. 남자 최우수상 후보명단에 김준호의 이름이 올라갔다.

“에이, 혹시나 했는데.”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표정이 기묘하게 바뀐다.

좋으면서도 아쉬운 듯.

그런 상반된 표정.

그걸 보고 장선화가 나지막하게 혀를 내찼다.

“양심 좀 있어라. 방송국이 뭔 죄야. 너한테 대상 줬다가 네티즌들한테 뭔 욕을 먹으라고?”

눈썹을 꿈틀거린 김준호가 입술을 비쭉거린다.

“누가 뭐래? 난 이것도 좋다고!”

최우수상은 결국 김준호에게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또한 후보에는 올라갔지만 상을 받진 못했다. 장선화는 쟁쟁한 여자후보들을 제치고, 당당하게 여자부문 연기 대상을 손에 거머쥐었다.

이쯤 되면 거의 꽃 미남 학교의 상잔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 작품에서 나온 상만 무려 다섯 개다. 다섯 개.

화려하게 2부까지 진행된 KBN연기 대상의 막이 서서히 지고, 기대 반, 설렘 반으로 참석했던 배우들이 방송이 끝나자 하나, 둘씩 공개홀을 빠져나갔다.

나갈 때 떠오른 표정들이 모두 제각각이다.

상을 받아서 기쁜 건지, 더 큰 상을 바랬는데 실망한 건지.

아직도 얼굴에 눈물자국이 남아 있는 배우들도 있다. 진심인지 아니면 그 또한 연기의 연장선인지는 몰라도 분명한건 이 자리는 배우들에게 한해를 마무리 짓는 그 무언가 의미가 있는 자리임은 분명했다.

헤어짐이 다가오자 오랜만에 만난 꽃 미남 학교 팀들도 다들 아쉬움에 꼭 자리 만들어서 다시 한 번 뭉치자고 신신당부를 했다.

아마 할 이야기가 넘칠 거다. 중국에서 꽃미남 학교가 대박이 터져서 그걸 안주삼아 씹으면, 하루 종일이라도 떠들 수 있을 거다.

또 촬영도중에 생긴 에피소드가 좀 많아야 말이지.

그리고 그들과 헤어지고, 막 공개홀을 빠져나가려고 할 때 누군가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다가왔다.

서은채였다.

“어휴, 왜 이렇게 말붙이기가 힘들어요? 한참을 기다렸네.”

“······ 그랬어요?”

“아이돌이 바쁘다바쁘다 하지만 진짜 이렇게 바쁜 줄은 몰랐네. 어쩜 그동안 연락이 그렇게 없어요? 그리고 도대체 그 먹자는 밥은 언제쯤 살 건데요?”

“아, 그건, 제가 나중에······.”

“도대체 그 나중이 언제냐고! 밥 한번 먹자고. 밥 좀!”

깜짝 놀랐다. 평소에 얌전하기만한 서은채에게 이런 모습이 있었나?

그녀가 도끼눈을 치켜떴다.

“지금 당장!”

< 고공 행진 (3) > 끝

ⓒ 윤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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