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듀스 나노머신-120화 (120/124)

< 이제는 데뷔 2년차 (5) >

“어디서 온지도 모를 이 마물들! 결코 내 검이······ 아니, 내 정의의 검이 너희를 결코 용서치 않으리라!”

세일러 문이야?

거의 악을 써듯 질러대는 여배우의 대사에 현장에 있던 영화 관계자들은 모두 얼어붙고 말았다.

감정표현, 억양, 대사전달력. 무엇하나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는 칼을 뽑아드는 행동까지도. 게다가 목소리는 왜 저 모양인지.

차라리 국어책을 던져주고 읽으라는 편이 나을런지도 모른다. 적어도 손발이 오그라들진 않을 테니까.

얼굴에 철판을 깔지 않은 이상 저럴 수는 없다.

어떻게 저런 연기 실력으로 스스로를 배우라고 칭할 수가 있지?

그나마 그것도 혼신의 연기를 펼쳤다고 생각했는지 상체까지 들썩이고 있었다. 그나마 봐줄만한 건 섹시로 어필할 수 있는 몸매와 얼굴 뿐.

그마저도 없었더라면 오디션 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욕을 했을지도 모른다.

왕치홍 감독이 가장 먼저 탄식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여기저기에서 비슷한 소리가 뒤따랐다.

그 광경을 초조한 눈으로 보고 있던 배우의 매니저가 안절부절 한 표정을 지으며 끼어들었다.

“하하하, 오늘 장잉이 컨디션이 좀 안 좋나봅니다. 잠깐만 쉬었다가 하시죠.”

그러고서는 여배우에게 다가가 이를 악물며 입술만 달싹였다.

“내가 대본보고 연습 많이 하라고 했잖아.”

“어제, 회식 있었잖아요. 지금도 속이 울렁거린단 말이에요.”

“그러기에 내가 작작 좀 마시라고······!”

그 소리가 제법 컸는지 영화 관계자 사람들이 모두 둘을 쳐다보고 있다.

왕치홍 감독이 옆에 놓인 생수병을 집어 들면서 말했다.

“이만하면 충분히 본 것 같습니다. 그만 돌아가셔도 될 것 같아요.”

“아니, 감독님. 감독님! 오늘은 장잉이 몸이 좋질 않아서 그러니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돌아가세요. 더 이상 시간낭비하고 싶지 않으니까.”

매몰찬 대답에 장잉과 그의 매니저가 힘 빠진 얼굴로 몸을 돌리자, 왕치홍 감독이 얼굴을 쓸어내리며 옆에 놓인 생수병을 집어 들었다.

옆에 있던 관계자가 속닥이듯 말했다.

“어휴, 아무래도 KM프로덕션 김과장이 뭘 받아먹었나봅니다. 어떻게 저런 배우를 추천할 수가 있지? 그래도 필모가 나쁘지 않아서 한 번 와보라고 한 건데.”

“됐어요. 그보다 귀한 분 모셔놓고, 계속 안 좋은 모습만 보이고 있네요.”

왕치홍 감독이 옆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그 말에 가장 구석에 앉아 있는 여자가 깊게 눌러쓴 모자를 벗으며 웃었다.

곱고 작은 손으로 머리를 한번 쓸어내리자 비단결 같은 검은 머리가 잠시 흩날리더니, 가지런히 정돈된다.

“아니에요. 시간이 마침 남아서 잠시 구경 온 거뿐이니까. 신경 쓰지 말고 계속 진행하세요.”

심지어는 목소리마저도 곱다.

“그래도 아직 참가자들이 몇 명 남아 있으니 나머지는 괜찮을 겁니다.”

왕치홍 감독의 말에 옆에 있던 관계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감독님. 어제 말씀하신 그 한국 남자 배우는 오늘 오기로 한 것 맞죠?”

“2시까지 오기로 했으니까 조금 더 기다려 봐요. 아직 시간 좀 남았으니까.”

“네네. 도대체 어떤 분이기에 깐깐하신 감독님 맘에 들었다는 건지 모르겠네요.”

덩달아 옆에 앉아 있던 여배우도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저도 궁금하네요. 만약 같이 작품을 하게 된다면 저랑 같이 있는 씬이 가장 많을 텐데. 아······. 저 잠깐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될까요?”

“네, 그러세요. 저희도 잠깐 쉬었다가 하죠.”

*

하얀 피부와 마치 그려놓은 듯한 인형 같은 외모.

중국에서 한참 대세여배우로 떠오르고 있는 린즈밍은 다시 모자를 눌러쓴 채 오디션 장을 빠져나와 복도를 거닐었다. 오디션 장 앞에도 사람들이 몇몇 모여 있었지만, 청바지 차림에 편한 티셔츠차림, 그리고 모자까지 깊게 눌러쓴 터라 그녀가 린즈밍이라는 사실을 알아본 이는 없었다.

제작PD와 투자사와의 미팅자리에 참석했다가 마침 같은 건물이고, 시간이 비어 오디션장에 들린 거다. 앞으로 오랫동안 같이 호흡을 맞춰야할 배우들의 얼굴들이 궁금하기도 하고.

헌데, 어째 된 게 기대보다 더 형편없다.

나름 투자금 100억 블록퍼스트급 영화이고, 이쪽 장르에서는 유명한 왕치홍 감독에, 투자사가 천홍 그룹인데도 배우들이 형편없으면 이건 보나마나 필패다.

답답한 마음에 화장실을 찾아 들어간 린즈밍은 수도꼭지를 틀고, 손을 씻었다. 그나마 시원스럽게 수도꼭지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을 보니 마음이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아씨, 괜히 오디션 장에 왔나? 마음만 착찹해지게.’

툭.

“아얏.”

뾰족한 비명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손을 털고 나가려는데, 누군가와 화장실 입구에서 부딪혔다. 상대를 탓하기에는 골똘히 생각을 하느라 앞을 제대로 안보고 걸은 자신의 탓도 컸다.

“괜찮으세요?”

유창한 중국어가 상대에게서 흘러나오자 린즈밍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깜짝 놀랐다.

우선 키가 엄청 크다. 자신의 키도 167cm라 적지 않은 편인데, 자신이 한참이나 올려다봐야 할 만큼.

그리고 하얀 피부에 당황스러운 표정이 묻어나오는데, 린즈밍은 순간 누가 사방에서 꽃가루를 뿌리고 있는 줄 알았다.

란즈밍은 오디션 장에서와는 또 다른 의미로 당황함에 빠졌다.

어떻게 남자가 이토록 근사하게 생길 수가 있지? 여태껏 제법 잘생겼다는 난다긴다하는 미남 연예인들을 많이 만나봤어도 눈앞에 보이는 이 남자만큼은 아니었다. 하물며 중국배우 중 가장 미남이라고 일컫는 왕지웅마저도.

뭐지? 혹시 배우인가? 헌데, 이렇게 잘생긴 배우가 중국에 있었나? 온갖 생각이 머릿속에서 널을 뛰었다.

“제 실수입니다. 다른 생각을 하는 바람에 이거 큰 실례를 범했습니다. 혹시 다친 곳은 없으신가요?”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란즈밍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평소 그녀의 목소리라고는 할 수 없을 만큼 조신하고, 여성스러운 목소리였다.

“괜찮으시다니 다행입니다. 저는 그럼 이만.”

“아······. 저기.”

“네?”

뒤돌아가는 남자를 불러 세웠다. 그러면서 그녀는 발을 동동 굴렸다.

‘지금 불러서 뭘 어쩔 건데?’

자신의 팬이라면 사인이라도 해주면서 대화라도 걸어보겠건만, 그런 것도 아닌 것 같고.

그러고 보니 모자를 꾹 눌러 쓰고 있어서, 상대는 자신이 란즈밍이라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피식. 자신을 향해 싱겁다는 듯이 웃는 미소마저도 어찌나 예쁜지.

“란즈밍? 여기서 뭐해? 곧 오디션 다시 시작할건데.”

복도 저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고 매니저가 손짓을 하고 있다. 자신이 금세 안돌아오니 찾으러 나왔나보다.

“지금 가요.”

이미 상대 남자는 고개인사를 한 채 자신의 갈 길을 가고 있었다.

그래. 이정도 얼굴이라면 틀림없이 배우일거야. 이곳은 프로덕션 회사이니 아마 오늘 오디션을 보러 올 배우일 가능성이 크고.

나중에라도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에 란즈밍은 오디션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

오디션 장에서도 왠지 조금 전 남자의 모습이 아른거려 좀처럼 집중이 안 됐다. 오디션을 보러 들어온 배우들이 행동연기를 해도, 대사를 쳐도, 전혀 귀에 들어오지가 않는다. 머릿속에 콱 들어앉은 것처럼 그녀의 머릿속은 오로지 한 가지 생각뿐이다.

‘이름이라도 물어볼걸 그랬나?’

그 찰나의 순간동안 그토록 강렬한 인상을 남겨준 사람은 당연코 처음이었다.

“란즈밍씨, 란즈밍씨?”

“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요? 몇 번이나 불러도 대답도 없고.”

“아. 잠시 딴생각을 하느라요. 왜요? 물어보실 말이라도.”

“아니에요. 방금 그 배우는 연기가 어땠는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란즈밍씨 반응을 보니 굳이 안 물어봐도 되겠네.”

“죄송해요. 연기를 제대로 보질 못해서······.”

“그러니까요.”

왕치홍 감독이 웃으면서 대꾸했다.

“다른 생각이 안들 정도로 배우의 연기나 대사가 인상 깊었다면 란즈밍씨가 이런 반응을 보일 리는 없었겠죠. 자, 다음 오디션 볼 분 들어오라고 하세요.”

문이 열리고, 다음 오디션 참가자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최강민이라고 합니다.”

‘어? 이 목소리는······.’

고개를 푹 눌러쓰고 있던 란즈밍의 눈이 번쩍 떠졌다.

*

“공주마마. 한시도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모를 마물들이 궁궐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어서 빨리······.”

멈칫.

연기를 하고 있는 최강민의 행동이 정지했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

먼 허공을 응시하는 그의 눈동자에는 기이함이 서리기 시작한다. 새카맣고, 그리고 투명한 그의 눈동자가 한번 깜빡이더니, 이내 입에서는 강렬한 함성이 터져 나온다.

“거기 누구냐!!!”

허리춤에서 뽑아 올린 검이 허공을 향해 폭사되어나가더니, 이내 벽을 뚫고 그 뒤에 숨어 있는 마물의 미간을 관통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허상일 분이다. 대본에 그렇게 적혀 있었으니까.

허나, 현장에서 그걸 보고 있는 왕치홍 감독은 물론 영화사 대표, 투자사 관계자들까지 모두 전심에 소름이 돋아 가만히 몸을 쓸어내렸다.

매서운 일갈, 진짜로 허공에서 뭔가를 발견한 듯한 표정 연기. 더군다나 잘못하면 오글거릴 수 있는 무공을 발산하는 모습까지.

마치 진짜로 백린공주의 호위기사인 황지위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표정, 눈빛, 손짓 하나하나에도 마치 숨을 불어넣은 것처럼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왕치홍 감독은 몸이 근질근질 했다. 어서 빨리 저 모습을 이런 허접한 오디션 장이 아니라 카메라에 담아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을 만큼.

사실 왕치홍 감독은 자신이 오디션을 보라고 권유하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잘할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헌데, 이건 기대했던 것의 그 이상이다.

“어때요? 조금 이상했나요? 무공을 사용하는 이런 연기는 해본 적이 없어서.”

“아주 좋았어요. 더 이상 좋을 수가 없을 만큼. 혹시 전에 이런 액션 연기를 해보신 적이 있어요?”

여태껏 입을 꾹 다물고만 있던 영화사 대표가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아니요. 처음입니다. 한국에서 액션 연기를 배우기는 했지만 실제로 남들 앞에서 연기를 해보는 것은 처음이네요.”

“그렇다면 뭐, 이건 타고났다고 할 수밖에 없네. 아, 내 정신 좀 봐. 좋은 연기 잘 봤습니다. 내부적으로 상의를 해본다음에 결과를 말씀드리도록 할게요.”

“네. 감사합니다.”

최강민이 고개를 숙이고, 오디션 장을 빠져나가기가 무섭게 내부에 있는 사람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와, 저 친구 뭐에요. 감독님이 데리고 오신 거 맞죠? 저 방금 소름 돋았잖아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한국인 진짜 맞아요? 뭔 중국어를 토박이마냥 저렇게 잘해요? 발음도 좋고.”

“솔직히 한국인 배우라고해서 기대를 별로 안했는데, 저 정도면 누구랑 붙여놔도 안 밀릴 것 같은데요? 어때요, 린즈밍씨가 보기에는요?”

“아······. 저는요. 그게.”

우물쭈물 거리던 린즈밍이 입술을 달싹였다.

“방금 나가신 분 성함이 어떻게 된다고요?”

“최강민씨요. 한국인이에요.”

“아······.”

왕치홍 감독이 질문을 한 사내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지금 린즈밍씨 표정 보면 모르겠어? 황지위 역할은 방금 그 친구로 하자고.”

-황지위 역할은 더 이상의 오디션을 볼 필요가 없을 것 같아 이렇듯 빨리 연락드리게 됐습니다. 최강민씨 오디션 결과는 당연히 합격입니다.

“아, 그래요? 감사합니다.”

-자세한 일정과 계약상의 문제를 논의하고 싶은데요. 어떻게 하면 되나요?

“제가 한국에 귀국하는 데로 회사랑 의논해보고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차조영 실장이 가만히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멤버들이 덕지덕지 달라붙었다.

“뭐래요? 합격이래요?”

“멍청아. 방금 다 같이 들었잖아. 합격이라고. 난 당연히 합격될 줄 알았어. 강민이형을 오디션에서 떨어트렸다면 그건 관계자들 눈이 어떻게 된 거겠지.”

말은 그렇게 해도 박진우의 입 꼬리가 연신 내려갈 줄을 모른다.

저건 엄청 좋아하는 거다.

그리고 한국으로 귀국한 다음 날.

기다리고 기다리던 생존의 법칙 녹화분이 방영됐다.

< 이제는 데뷔 2년차 (5) > 끝

ⓒ 윤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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