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듀스 나노머신-119화 (119/124)

< 이제는 데뷔 2년차 (4) >

“어휴, 장난이 아니네. 여기 있는 이틀 동안 제안 받은 프로그램만 20개는 넘겠다.”

차조영 실장이 둘째 날 저녁 엄살 섞인 표정으로 너스레를 떨었다. 표정과는 달리 입주변이 쉴 새 없이 웃고 있다.

기쁠 수밖에.

자신이 맡고 있는 그룹이 이렇게 인기가 좋은데 싫은 매니저가 어디 있겠는가?

아닌 게 아니라 기자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프로모션 현장에 나타나 예능, 토크쇼, 음악 프로그램 등, 쉴 새 없이 섭외 요청을 해오는데, 나중에는 어디가 어디인지 헷갈려서 메모를 펼쳐놓고 확인해야할 지경에 이르렀다. 스케줄을 다 마치고, 저녁 무렵 호텔로

돌아오자 애들이 물 먹은 빨래 마냥 축축 늘어진다.

“오늘만 힘내자고. 내일은 오전 인터뷰 한 개만 하고, 하루정도 쉬다가 천천히 돌아갈 예정이니까.”

“진짜요? 마지막 날 저희 스케줄 없어요?”

그 말에 장요한이 눈이 커졌다.

“아직까진 잡힌 공식 스케줄은 없어. 너희들도 처음 와보는 중국인데, 그래도 맛있는 것도 좀 먹고, 기분도 내다 돌아가야지. 안 그래?”

장요한은 물론 멤버들까지 입이 모두 찢어진다.

“베이징에 카오야라는 요리가 엄청 유명하대요. 저 그거 꼭 먹어보고 싶어요!”

“카오야? 맛있지. 그거 말고도 유명한 요리가······ 잠깐만 전화 좀.”

전화가 왔는지 차조영 실장이 핸드폰을 번호를 확인하더니, ‘NV에이전시.’라고 입모양을 벙긋거리고는 귀에 딱 붙였다.

“여보세요. 네네. 강민이요? 영화 감독님이요?”

차조영 실장의 입에서 튀어나온 소리에 멤버들이 모두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차조영 실장이 쳐다봤다.

영화 감독? 갑자기 영화 감독이라는 단어가 통화 중에 왜 튀어나오는 거지?

“조금만 더 자세히 말씀해보세요.”

차조영 실장이 침을 삼키며, 물었다.

뭔 소리를 하나 궁금한 건 다들 마찬가지다.

멤버들을 의식했는지 차조영 실장이 옆방으로 손가락을 가리킨 다음, 이동했다.

남은 이들은 뭔 대화내용이 오고가나 궁금함에 쑥덕거렸다.

“뭐지? 영화? 혹시 강민이형 영화캐스팅 제의 들어왔나?”

“아무래도 그런 거 같은데?”

남은 멤버들은 모두 궁금해서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상상력을 극대화시켰다.

궁금한 건 나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영삼이의 증폭모드를 이용해 통화내용을 엿들었다.

-영화감독님이 강민이를 직접 만나보고 싶다고요? 네네, 그 감독이야 저도 잘 알죠. 블랙홀 제작하신 감독님이잖아요. 그분이요? 정말 그분이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규모도 엄청나게 큰 블록버스터급 영화래요. 제작비만 거의 천억 원이래요. 천억 원. 젊고, 괜찮은 한국 배우 없냐고 물으시기에 제가 최강민씨를 적극 추천했습니다. 에이전시 측에 넘어온 홍보용 프로필도 보여드리고, 최근에 찍은 드라마, 티비쇼 말씀도 드렸고요.

-배역은요? 혹시 단역이라면······.

-듣자하니 꽤 비중 있는 주조연급이라던데요. 어때요? 어차피 최강민씨 다음 차기작 정하지 못한 걸로 아는데 마침, 감독님이 베이징에 계시니 제가 일정을 한 번 잡아보는 게······.

블랙홀을 제작한 감독이라면 왕치홍이라고 중국에서는 꽤 이름이 있는 감독이다.

한중합작 영화도 이미 두 편이나 제작을 했고.

특히나 대표작은 블랙홀인데, 7년 전 할리우드에까지 진출해서 아직도 대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네임파워도 물론 어느 정도 형성되어 있고.

그런 감독이 나를 만나고 싶어한다고?

-그건 강민이와 한 번 이야기를 해봐야할 것 같은데요.

-물론, 이야기를 나눠 보셔야겠죠. 대신 시간이 많이 없으니 오늘 안에는 확답을 주셔야합니다.

-오래 안 걸릴 겁니다. 이야기를 나눠보고 금방 다시 전화 드리죠.

달칵.

전화를 끊은 차조영 실장이 궁금증에 오도가지도 못하고 있는 멤버들과 나에게로 다가와 용건을 바로 말했다.

“왕치홍 감독님이라고 중국 영화계에서는 꽤 유명하신 분인데, 너를 한 번 보고 싶다고 하네. 이번에 한중합작 영화에 캐스팅하고 싶다면서.”

“진짜요? 왕치홍 감독님이라면, 어, 어······.아이씨, 갑자기 왜 생각이 안나지.”

장요한의 더듬거림에 차조영 실장이 웃으며 대꾸했다.

“블랙홀 제작하신 분이시지.”

“아, 맞다. 블랙홀! 그분 되게 유명한 감독님 아니세요?”

“유명해. 중국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손꼽히는 명감독님이셔. 좀 다혈질이기는 해도, 배우 위해줄 줄 알고, 실력 확실하다고 소문이 자자해. 원래 신인 급들은 캐스팅을 안 하시는데, 어쩌다보니 이런 기회가 강민이한테까지 오게 됐네.”

단숨에 장문의 말을 내뱉은 차조영 실장의 시선이 내게로 고정됐다.

어째, 캐스팅 제안을 받은 사람은 난데, 정작 차조영 실장의 눈에 기이한 열기 같은 게 섞여 있다. 그리고 그 흥분은 멤버들에게까지 전염됐다.

“들어온 배역이 어떤 거예요? 장르는요?”

“음. 판타지 쪽 장르인데, 요즘 중국에서 이런 쪽 영화가 크게 각광받고 있거든. 역할은 새로운 차원의 문이 열리고, 괴물들이 쏟아져 세상을 점령하는데, 자금성까지 밀고 들어온 괴물들에 맞서 옹화공주를 데리고 탈출해서, 세력을 연합해서 괴물들과 맞서 세상을 구하는 뭐, 그런 내용? 태생은 미천한데, 얼굴 잘생기고, 로맨틱하고, 날렵하면서도 운동신경은 좋은 그런 한국 배우를 찾고 있나봐.”

“소오오오름. 딱 강민이형이네! 형형, 이거 무조건 한다고 그래요! 무조건!”

“저도 찬성. 이번 기회에 왕치홍 감독님 눈에 콱 도장찍어놓으면 혹시 또 알아요? 그걸로 대박 터질지?”

멤버들이 자기들 일처럼 어깨를 들썩거리고 있다.

그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차조영 실장이 마른 입술에 침을 묻히고는 재차 물었다.

“어때, 감독님 한 번 만나볼래? 마침 여기 베이징에 와 있으시다 던데.”

“네. 그럴게요.”

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다음 날.

차조영 실장과 함께 미리 약속된 베이징의 어느 카페로 들어갔다.

우리가 들어서자 손짓을 하는 사람이 보인다. 이미 몇 번 얼굴을 봐서 익숙한 NV에이전시 사람과, 그리고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중년 사내.

아, 저 사람이 왕치홍 감독이구나.

보는 순간 바로 알겠다.

헌데, 옷차림부터가 범상치가 않다. 대부분 유명 감독님이라면 어느 정도 정형화된 이미지가 있다.

덥수룩한 턱수염에 캐주얼한 차림, 빨간 모자, 뭐 그런 것들.

헌데, 완전 반전이다.

염색을 한 듯 멋스러운 백발머리에 단정하게 머리를 빗어 넘기고, 하얀색 정장에 백구두까지 신었다. 겉보기에는 감독이 아니라 아주 점잖고, 젠틀한 노신사 같다.

간단한 서로의 인사가 오고가고, 네 명이 모두 자리에 앉았다.

출입구에 들어선 순간부터였을까.

왕치홍 감독의 한 쌍의 눈동자가 계속해서 따라다녔다.

그리고 인사를 나눈 후에도. 앉아서도 마찬가지였다.

“어휴, 감독님 이러다가 최강민씨 뚫어지겠어요.”

보다 못한 NV에이전시 관계자가 옆 좌석에 앉아 중국어로 너스레를 떨었다. 그제야 아차 싶었는지 왕치홍 감독이 눈에 힘을 풀었다. 째려보듯 할 때는 눈매가 매섭더니, 웃으니까 인상이 제법 온화했다.

“미안합니다. 사람을 관찰하는 게 습관처럼 배어있어서요. 아참, 그보다 최강민씨라고 하셨죠? 중국어는 조금 하시나요?”

“네, 알아듣고 말하는 것 정도는 무리 없습니다.”

내가 중국어로 성큼 대답하자 왕치홍 감독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중국어를 잘하시는 군요?”

에이전시 사람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최강민씨 중국어에 능통하다고. 저희도 처음에 보고 깜짝 놀랐다니까요? 아, 일단 차부터 시키고, 천천히 말씀 나누시죠.”

차가 나오고, 그 뒤로 일상적인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생각보다 왕치홍 감독은 유쾌하고 엉뚱한 사람이었다. 감독들 중에는 자신만의 독특한 정신 세계를 가진, 그런 부류들이 있다고 하는데, 왕치홍 감독도 따지고 보면 그런 부류에 속했다.

“제가 오늘 왜 이렇게 하얀색으로 맞췄냐면요. 저한테 올해 삼재가 끼었다고 하더라고요. 흰색이 액운을 막아준다고 해서 이렇고 하고 다닙니다.”

심지어는 양말도 하얀색이다. 이쯤되면 속옷도 흰 속옷일 확률 백프로다.

중국 사람들은 미신이나 그런 것들을 잘 믿는다고 하더니, 그 말은 사실이었구나.

그래도 이건 좀 과하지 않나?

말이 덧붙여서 들려온다.

“사주를 봐주던 그 분이 덧붙이기를, 올해 한해가 가기 전에 동쪽에서 돼지를 타고 기인이 찾아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나를 본다.

“최강민씨 프로필을 봤는데, 돼지띠시더라고요. 그래서 느낌이 아주 좋습니다. 최강민씨가 출연한 드라마랑 티비 쇼 프로그램을 봤는데, 제가 생각해두고 있는 배역과도 잘 어울릴 것 같아서 한 번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거든요.”

혹시 돼지띠라서 그런 건 아니고?

어쨌든 왕치홍 감독의 말이 이어진다.

“많이 알려지지 않은 신선한 얼굴을 찾고 있었는데, 직접 뵙고 보니 어느 정도 부합하는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헌데 출연하신 드라마나 영화가 워낙 없어서 참고하기가 조금 힘든 건 사실입니다. 괜찮으시면 비공개 오디션을 한번 진행했으면 좋겠는데, 괜찮으실까요? 저 뿐만이 아니라 납득시켜야할 사람들도 있고.”

납득시켜야할 사람? 투자자를 말하는 건가?

에이전시측 사람이 슬짝 차조영 실장에게 한국어로 말을 흘렸다.

“이분과 같이 일하기로 한 프로덕션이 천홍 그룹 계열사거든요.”

차조영 실장이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천홍 그룹이요?”

천홍 그룹은 원래부터 영화배급을 도맡아해 오던 중국에서도 손꼽히는 대기업이다.

중국 경제의 성장률은 차츰 둔화하고 있으나 영화 시장만큼은 고속성장을 하고 있다. 2010년 15억 달러에 불과했던 중국의 박스 오피스규모가 7년만에 여섯 배 가까이 성장했다. 곧 최대시장인 미국을 추월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어 중국에서도 많은 그룹들이 영화시장에 눈길을 돌리고 있는 추세였다.

예를 들어, 블리자드의 첫 영화화로 야심차게 제작했던 ‘워 크래프트, 전쟁의 서막’은 1억6000만 달러를 투자해 제작됐지만, 본무대인 북미에서 겨우 4736만 달러를 벌어들였을 뿐이다. 이 정도면 망해도 보통 망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2억1354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글로벌 총 흥행 수익이 4억3000만 달러였으니, 해외 수익의 거의 절반가량을 중국에서 벌어들인 셈이다.

천홍 그룹도 그 대열에 합류해 최근 급성장하는 자국 영화시장을 등에 업고, 영화제작에까지 열을 올리고 있는데, 그 첫 번째로 제작하는 영화가 바로 왕치홍 감독과 함께 만들기로 한 바로 이 영화다.

“아참, 혹시 영화 제목은 정해졌나요?”

“그럼요. 천몽입니다. 천몽.”

천몽이라.

왠지 모르게 와닿는 느낌은 좋다.

“어때? 감독님 만나 보니까. 생각 있어?”

생각은 이곳에 오기 전부터도 있었다.

어차피 딱히 차기작도 정해진 것도 없겠다 이제 2집 앨범 활동도 서서히 휴식기로 들어서니, 차기작을 정해야할 시기가 온 거다. 아무리 기다려 봐도 이만한 기회는 오기 힘들 것이다.

“좋아요.”

내 대답에 차조영 실장이 왕치홍 감독에게 물었다.

“그러면 비공개 오디션은 언제 진행하면 좋을까요? 알다시피 저희가 내일 모래 정도에는 한국으로 돌아가야 해서요.”

“말 나온 김에 괜찮으시면 바로 내일 보는 건 어떠십니까?”

“내일요? 이렇게 급하게요?”

“네, 마침 내일 조연급 1차 비공개 오디션이 있는 날이라서요. 내일 보신다면 다시 입국해야하는 번거로움도 줄이고, 저희 측에서도 일이 한결 수월해질 것 같은데······. 아, 혹시 오해하실까봐 말씀드리는 건데, 최강민씨가 볼 배역은 경쟁 배우도 없습니다. 최강민씨만 혼자 보는 단독 오디션입니다. 추천 들어온 것은 많은데, 아직까지 이렇다 할 눈에 띄는 한국 배우들이 없어서요.”

내 의사를 타진한 차조영 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보기로 한 분이 총 다섯 분인데 길어야 1시간도 안걸릴 겁니다.”

보통 왕치홍 감독정도의 위치면 나 정도의 신인 급 배우들에게는 갑질 행세를 하려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러한 점은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점잖고 예의바르다.

시원시원한 면도 없지 않아 있는 것 같고.

“알겠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인터뷰 스케줄이 있으니 오후에 비공개 오디션을 보는 걸로 하도록 하죠.”

“그러면 그때 뵙겠습니다.”

< 이제는 데뷔 2년차 (4) > 끝

ⓒ 윤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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