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 다른 예능 (5) >
“날씨 미쳤나? 비가 왜 이리 많이 오는······.”
서둘러 생존지로 복귀한 장요한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만 넋을 놓고 말았다. 지금쯤이면 당연히 집짓기에 한창일 거라고, 비가 와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멤버들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렸는데······.
떠나기 전 집을 짓겠다고 골랐던 공터 땅에, 영화에서나 봤을 법한 그림 같은 움막이 떡하고 자리하고 있었다.
“세상에 맙소사. 혹시 번지수를 잘못 찾아왔나?”
“멍청아. 여기가 무슨 아파트냐? 번지수를 찾게? 형들이랑 노아가 지어놨겠지.”
“이렇게 빨리? 그 잠깐 사이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움막 안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멤버 셋의 모습이 보인다.
눈만 밖에 꺼내놓고, 비 그치기를 기다리던 노아가 반갑게 손짓을 한다.
“형들! 빨리 들어와 봐요. 여기 겁나 아늑해요. 비 한 방울도 안 들어와요.”
비 맞은 생쥐가 돼서 돌아온 장요한과 박진우에게 입구 자리를 내어주자, 둘이 움막 안에 들어오고서는 감탄성을 내뱉었다.
생각했던 것 보다 더 따뜻하고, 훨씬 더 근사했다.
“형. 뭔 집을 이렇게 빨리 지었어요? 아직도 한창 짓고 있을 줄 알았는데.”
“뭐, 일단 급한 불부터 꺼야 했으니까. 비 그치면 조금 더 확장 공사를 하려고. 그보다 주위는 좀 둘러봤어?”
“아, 맞다. 형 나 게 잡았어요.”
장요한이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게 한 마리를 꺼내 자랑스럽게 흔들었다.
귀엽고 앙증맞은 게는 신기하게도 아직까지 살아서 집게발을 떨고 있었다. 헌데 크기가 워낙 작아 마치 꽃게 모양을 한 과자 같았다.
“해변가에 게 되게 많아요. 아참, 그리고 이것도.”
이번에는 반대쪽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한웅 큼 꺼냈다. 고동이었다.
“이거 먹을 수 있는 거 맞죠?”
“어, 먹을 수 있는 거야. 이거 끓여서 하나씩 빼먹으면 맛있어.”
“그쵸? 거봐. 맛있는 거라잖아!”
칭찬을 몇 마디 해줬더니, 박진우를 쳐다보는 장요한이 의기양양해진다. 광대뼈가 하늘로 승천한다. 안 봐도 뻔히 그림이 그려진다. 뭐 저런 걸 가지고 가냐고, 간에 기별이나 가겠냐면서 박진우가 핀잔을 줬겠지.
잘하면 턱으로 박진우의 정수리를 찍을 기세다.
“어? 비 그친 거 같은데요?”
입구 쪽에서 비를 피해 앉아 있던 박진우가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하나둘 밖에 나가서 보니, 마치 누가 마법이라도 부린 듯 거짓말처럼 하늘이 개어 있었다.
환한 햇볕이 마치 우리의 정글입성을 환영한다는 그런 메시지를 보내는 것 같다.
멤버들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볼까?”
“네에!”
활기찬 대답들이 들려온다.
*
이번에는 역할을 바꿔서 태현, 노아와 함께 한조로 주변을 탐색하기로 했다.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위험요소를 미리 제거해놓고, 생존에 필요한 식량, 필요한 것들을 지속적으로 공급하기 위해서는 주변 탐사가 필수적이었다.
떠나기 전 장요한과 김태현을 불렀다.
“나랑 태현이랑 노아랑 먹을 만한 열매나 근처에 식량 될 만한 것들이 있나 찾아보고 올 테니까. 둘은 여기 지키고 있어.”
“저희는 그동안 뭘 하고 있으면 돼요?”
장요한의 물음에 생각해둔 걸 내밀었다.
“자. 이거.”
그건 다름 아닌 파이어 스틸이었다. 장요한이 그것의 정체를 알아보고는 감격어린 표정을 짓는다.
“제가 불 피워 봐도 돼요?”
“파이어 스틸 사용 방법은 알지?”
“당연하죠!”
장요한이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럴 수밖에. 생존의 법칙 촬영이 확정되고, 이곳에 오기 전에 빌라 옥상에서 몇 번이나 파이어 스틸가지고 불 피우는 연습을 했었으니까.
멤버들 몰래 틈틈이 옥상으로 사라지기에 뭐하나 싶어 봤더니, 그곳에서 각종 생존에 관한 연습을 하고 있었다. 새총 쏘기, 불 피우기, 매듭 묶기등.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는 와중에도 생존에 필요한 동영상을 틈틈이 찾아 시청하는 것도 봤다. 아마도 우리들 중 잘해내야겠다는 욕심이 가장 큰 건 다름 아닌 장요한일 거다.
그걸 뻔히 아는데, 다른 사람에게 불 피우는 걸 맡길 수는 없지.
“비 온 뒤라 쉽진 않을 거야. 마른 건초 같은 게 있으면 한결 수월하겠지만 그런 게 없으니, 아쉬운 데로······ 아, 그래 저거.”
바닥을 보니 몇 발자국 떨어져 있는 곳에 썩은 코코넛열매를 있었다. 그걸 집어와 도끼로 몇 번 내려 찍어서 속을 벌려줬다.
코코넛 겉은 딱딱한 섬유질로 감싸여져 있으나, 그것을 제거하면 안쪽은 비교적 부드럽고 촘촘한 섬유질로 되어 있다. 실제로 나도 만져보기는 처음이다. 촉감이 꼭 마른 지푸라기 같다.
그것을 몇 가닥 떼어서 건네줬다.
“자, 이거면 건초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을 거야. 여기에다가 불씨 붙인 다음에 장작에다가 붙여봐.”
“아······ 이거 티비에서 봤어요!”
개 껌 보고 달려드는 강아지마냥 썩은 코코넛 열매를 들고 장요한이 신기한 눈으로 한참동안이나 들여다본다.
그런 장요한과 김태현을 내버려두고 우리 셋은 해안가가 아닌 숲이 우거진 방향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평소에 사람의 발길이 닳지 않아서인지 길은 있지도 않고, 중간 중간 대못같이 튀어나온 뾰족한 가시나무들이 시야를 방해했다.
이건 무늬만 나무고, 거의 흉기나 다름없었다.
뾰족함이 거의 바늘 급이다.
“조심조심. 찔리지 않게.”
도끼 겸, 칼로 사용할 수 있는 정글도를 들고 나무들을 쳐내며 내가 길을 열었다.
김태현과 노아는 그 뒤를 따라오며 신기한 표정으로 두리번거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전진했을 무렵, 내가 영삼이에게 가만히 물었다.
-어때? 먹을 것은 좀 보여? 주의해야할 거라든가.
-근처에 독을 가진 곤충이나 뱀은 보이지 않지만 가시나무를 특히 주의하셔야할 것입니다. 가시 안에 독성은 없으나 한번 찔리면 통증이 대단합니다. 식량으로 삼을 만한 것은 가장 가까운 거리로 북동쪽으로 50m만 가면 열매가 몇 개 매달려 있습니다.
-열매? 뭐?
-스타 프루트요.
남몰래 환호성을 질렀다.
첫 열매부터 스타 프루트라니!
스타 프루트는 밝은 연두색을 띤 참외 같은 모양의 열대 과일로 단면이 별 모양이라 별사과나 오렴자라고도 불린다. 과육은 배처럼 물이 많은 편이며 노랗게 익을수록 단맛이 난다
비타민 C와 비타민 A, 섬유질, 칼륨이 많이 함유되어 있으며, 당과 나트륨은 적게 함유하고 있는 항산화 성분이 많은 과일이다.
자두 같은 식감에 새콤한 풋사과 맛.
생각만 해도 침이 고인다.
아, 물론 나도 먹어본 적은 없다. 그냥 사전적 지식일 뿐이다.
나는 자연스럽게 방향을 틀어 그쪽으로 일행들을 인도했다.
그리고는······.
“엇, 과일이다. 스타 프루트 같은데?”
입술에 침을 바르고는 외쳤다.
“네!? 스타 뭐요!?”
“스타 프루트.”
“저도 들어본 적 있어요. 엄청 맛있다고 하던데.”
자연스럽게 열매가 달려있는 나무 앞에 가서 손을 뻗어 과일을 채취했다.
먹을 만한 정도로 익었는지 제법 노란색 빛깔이 영롱해 보인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있는 둘의 눈빛도 몽롱해진다. 오전 기내식을 먹은 후 아무것도 먹지 않은 뱃속에 먹을거리를 보자 군침이 도는 모양이다.
나는 정글도로 단면을 잘라 김태현과 노아에게 내밀었다. 신기하게도 들은 대로 정말로 잘라놓은 단면 모양이 별모양이다.
“자, 먹어봐.”
스타 프루트를 받아든 둘이 조심스럽게 한입씩을 베어 물었다. 그 순간, 둘의 표정이 이채롭게 변화한다. 동공이 점점 확장되더니, 이내 입 꼬리가 씰룩거린다. 신세계를 맛 본 뭐, 그런 표정.
먹을 만은 한가보다. 뱉질 않는 걸 보니.
나도 서둘러 옆에 있는 열매를 따서, 반으로 자른 다음 입에 가져갔다.
솔직한 감상평으로는······ 막 맛있지는 않다. 처음 먹어보는 맛. 환장할 정도로 맛있는 건 아니고. 그냥 괜찮다 정도?
하지만 허기가 진 상태라 그런지 순식간에 열매 하나가 전부 뱃속으로 들어갔다.
배가 고프니까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지.
그리고 가지고온 보따리 안에 열매 2개를 더 따 챙겨 넣었다.
“이거는 가지고 가서 애들 맛보라고 가져다주자.”
“어? 다 안 따가고요?”
아직 나무에 매달려 있는 스타 푸르트 열매가 더 있기에 노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당연히 싹 쓸어갈 줄 알았는데, 열매를 남겨둬서 궁금했나 보다.
내가 웃으며 대답했다.
“조금만 더 들어가면 먹을 거 천지야. 이건 먹고 싶으면 내일 다시 따먹자.”
“네······?”
이 형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먹거리가 천지라고?
나를 쳐다보는 둘 얼굴에 딱 이렇게 쓰여 있다.
내가 웃으면서 둘의 등을 툭 밀쳤다.
“따라와 봐.
*
“아, 저기 바나나 있다. 그런데 좀 덜 익었네. 그래도 구워 먹으면 고구마 같고 맛있을 거야. 이것도 좀 따가자.”
“저기, 파인애플이네? 이건 좀 작다. 이것도 한번 맛봐봐.”
“이게 바로 카사바 줄기야. 이거 파면 고구마 나온다? 한 번 파볼래?”
“이건 카이옌 고추. 이건 양념장으로 만들어서 사용하자.”
“후식으로 파파야 어때? 잘 익은 파파야가 저기 보인다.”
그야말로 먹거리 풍년이다.
우리는 GPS를 단 파워 블로거처럼 먹거리를 탐방했다.
계속해서 애들이 입이 쭉쭉 벌어진다. 금세 가지고 온 보따리가 먹을 것으로 가득 찼다.
처음에는 설마설마 하는 심정으로 따라오던 애들이 이젠 나를 신 보듯 쳐다보고 있다.
“형, 제가 생존의 법칙 프로 보진 않았는데요. 원래 이렇게 먹을 게 항상 많아요? 듣기로는 엄청 굶고 돌아가서 막 변비 생기고 그런다고 하던데요?”
“어, 안 그래.”
단호박처럼 선을 그었다.
그건 누구랑 오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전방 30m 덤불 속에 파인애플이 있습니다.
오케이.
나는 영삼이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들어가서 로켓 모양으로 생긴 이파리를 쭉 잡아 당겨서 정글도로 밑둥을 쳐냈다.
“읏챠. 우리는 살쪄서 돌아가자. 자, 여기.”
“어어, 형! 이거 제가 생각하고 있는 그거 맞아요······?”
“어, 맞아. 파인애플.”
내 손에 들린 파인애플을 보더니 가뜩이나 커진 애들 눈이 더 커졌다.
파인애플이 황갈색에서 군데군데 노랑 빛이 맴도는 게 참, 먹기 좋을 만큼 잘 익었다. 달콤한 냄새가 진동한다. 당장 잘라서 맛보고 싶을 만큼.
“그런데 생각보다 크기가 좀 작네. 이건 저녁에 생선구이 먹은 다음에 입가심으로 먹자.”
“저희 오늘 저녁에 생선도 먹어요?”
애들이 눈을 치켜떴다.
내가 웃으며 대답했다.
“응, 다들 생선 구이가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네.”
*
“야, 오늘 안에 불은 피울 수 있는 거야?”
박진우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장요한이 하는 모양새를 쳐다본다. 뭘 웅크리고 계속 꼼지락거리고 있기는 한데, 영 미덥지 않은 눈초리다. 그도 그럴 것이 장요한이 파이어 스틸을 넘겨받은 지 족히 1시간은 다 됐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불씨 구경조차도 못하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하지만 그 누구보다 이 상황이 답답한 건 장요한이다.
“아씨, 이게 왜 이렇게 안 되지? 옥상에서 할 때는 잘됐는데.”
탁, 탁, 탁.
파이어 스틸에서 튀겨낸 불똥이 몇 번 강렬하게 허공에서 튀더니, 이내 조용히 사그라진다. 몇 번을 다시 해봐도 마찬가지. 복창이 터질 노릇이다.
벌써 이 짓만 1시간째 무한 반복 중이다.
“으으으.”
그걸 보고 있는 장요한이 부글부글 끓는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이내 집념과 오기 섞인 표정이 얼굴에 자리한다.
“좋아.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끝까지 해보자.”
하지만 집념의 파이팅 시간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먹거리를 들고 나간 일행들이 되돌아왔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들고 간 텅빈 보따리에는 먹을 것이 가득 했다.
일행들이 돌아오기 전까지 불을 멋지게 피워놓고, 한껏 자랑하고 있으려던 장요한의 어깨가 금세 축 늘어졌다.
꼬라지가 꼭 비 쫄딱 맞은 강아지 새끼 같다.
평소에는 사고도 잘치고, 주의가 산만한 탓에 매번 구박을 받지만 이곳에서 만큼은 멋지게 1인분 이상의 역할을 하고 싶어 하던 거 같던데. 그게 생각처럼 잘 안되니, 초조하고 답답하고, 자신에게 화가 나기도 하고 그렇겠지.
자괴감 속에서 허우적대는 걸 내버려둘 수가 없어서, 슬쩍 다가가 조언을 던져줬다.
“비가 온 뒤라서 습해서 그런 걸 거야. 잠깐만 기다려봐.”
이미 물기가 젖어서 쓰질 못하는 코코넛 섬유질은 내팽개치고 움막 아래에 깔아두었던 낙엽, 풀등을 꺼내서 부싯깃을 만들어줬다.
그리고 잠시 후.
“어어어··· 됐다! 됐어! 형형. 불 붙였어요. 내가 불을 붙였다고요! 이야호호홋!”
등 뒤에서 괴성소리가 들려왔다.
< 또 다른 예능 (5) > 끝
ⓒ 윤민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