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 다른 예능 (1) >
배우가 작품을 고르는 데는 여러 가지 선택 기준이 있다.
전체적으로 흥미롭고, 밸런스가 잘 맞아 떨어지며, 작품이 관객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어떤 것인지, 들어온 배역이 나와는 잘 어울릴만한 역할인지, 또 그것을 내가 잘 표현해낼 수 있는 캐릭터인지 등을 보는 거다.
흥행이 확실히 보장되고, 누구나 보면 빠져들 수밖에 없는 매력적인 캐릭터의 배역이 들어온다면 어느 배운들 그 역을 마다할까.
10년이 넘는 무명배우 생활 끝에 작품하나 잘 찍어 인생역전하는 이야기는 이제 이 바닥에서는 신기한 일도 아니었다.
그만큼 작품과 배역이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건 나라고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행히 나에게는 그걸 조언해줄 이가 가까이 있다.
영삼이를 가만히 불렀다.
“영삼아. 네가 볼 때 이들 중에 쓸 만한 작품이 있어?”
-어떤 작품이 좋은 것인지에 대한 기준은 지극히 주관적이라 명확하게 해주지 않는 이상 설명 드리기가 애매합니다.
“그러면 좋아. 이들 중에서 손익분기점을 넘을만한 작품을 예상해본다면?”
-여지껏 흥행했던 작품들의 조건을 모두 충족시킬만한 작품은 ‘나의 이웃집 아저씨’, ‘특급작전007’, ‘임금님 귀는 당나귀.’ 이 세 작품이 있습니다.
세 작품의 내용들이 떠오른다.
나의 이웃집 아저씨는 잔잔하면서 감동을 주 포인트로 잡은 가족 드라마장르, 특급 작전 007은 제목에서도 느낄 수 있는 액션영화다, 그리고 임금님 귀는 당나귀는 코믹, 로맨스 장르.
이들 셋 중에서 나의 흥미를 가장 자극시킨 건 나의 이웃집 아저씨다.
영삼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설명을 이었다.
-나의 이웃집 아저씨는 다양한 장르성을 추구하는 작품으로 관객의 판타지 충족, 로맨스, 감동코드도 줄 수 있고, 무엇보다 저 예산이 가능합니다. 스토리를 좋아하는 일반적인 영화 팬에게 어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가족영화를 찾는 사람에게도 어필할 수 있고, 로맨스를 꿈꾸는 여성 관객들에게도 어필이 가능합니다.
평생 한 여자만을 바라보고, 그 여자를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해내며, 그녀와 다시 만나기만을 고대하며 살아가는 우직하고, 정직한 남자.
그 비현실적인 캐릭터에 왠지 웃음이 났다.
과연 이 세상에 그런 남자가 존재하기는 할까?
“말도 안 되는 말이지. 세상에 그런 남자가 어디 있다고.”
-그러니까 여성 관객들의 판타지를 충족해주는 영화죠.
하긴. 그런 의미로는 판타지가 맞네.
-마지막에 많은 돈을 되고, 부자가 되자 그녀와의 추억이 담긴 유년시절의 땅을 사서 집을 짓고, 그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그 남자의 매력은 아마 영화를 본 여성관객이라면 누구나 빠져들 수밖에 없을 겁니다. 유세철 감독은 그런 쪽 방면의 로맨스 부분을 극대화시키는데 탁월한 감독입니다.
“음······.”
그때 시끌시끌한 소리가 거실 밖에서 들려왔다.
차조영 실장이 왔나보다.
“얘들아. 준비 다 됐어? 이제 슬슬 나가봐야 돼.”
아니나 다를까 차조영 실장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네!”
산발적인 대답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대답을 하고 시계를 들여다보니 새벽 5시다.
2집 앨범을 내고, 앨범 나왔다고 홍보활동을 해야 하니 또 다시 살인적인 스케줄이 나를 기다렸다. 팬 미팅, 인터뷰, 방송 출연의 반복이다. 그나마 행사는 1집 때보다 줄어들기는 했는데, 그 대신 밀려드는 예능프로그램 때문에 몸이 죽을 맛이다. 거의 1집 앨범을 내고 나가는 횟수가 2, 3배는 늘어난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지금 예능계의 블루칩이다. 섭외대상 1순위.
예능프로그램에 나갈 때마다 반응도 좋고, 시청률도 최고점을 찍으니 거의 모든 예능 프로그램에서 한, 두 번쯤은 러브콜을 받아봤다.
그리고 주 연령층이 10-30대층인 어지간한 예능프로그램은 거의 다 나가본 것 같다. 딱 한곳만 빼고.
장요한이 차에 올라타서 말했다.
“난 진짜 그런데다가 데려다 놓으면 생존 끝내주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작살 만들어서 고기 딱! 문어를 잡아서 해신탕 딱! 목마르면 야자수 나무에 올라가서 코코넛도 따먹고.”
“네가?”
장요한의 호언장담에 박진우가 옆자리에 앉으며 혀를 내찼다. 어느새 입가에는 비웃음이 서려있다.
“문어는 고사하고, 지렁이라도 잡아보기는 했냐?”
“어, 잡아봤거든?”
장요한이 자랑스럽다는 듯이 턱을 내밀며 대꾸했다. 하지만 여전히 박진우 입가에 서려있는 비웃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퍽이나. 미꾸라지가 무섭게 생겼다고 추어탕도 못 먹는 주제에. 넌 인마 무인도 같은데 가면 그냥 식충이야. 식충이. 식량만 축내는.”
“흥, 그러는 지는. 넌 뭐··· 뭐!”
턱을 내밀며 반격을 시도하려는 장요한의 눈이 바쁘게 좌우로 움직였다.
어려서부터 레저스포츠를 좋아해서 스키, 웨이크보드, 수영, 테니스등. 여러 가지 운동은 조금씩 다 해봤다는 박진우는 최근에도 시간이 나면 수영센터에 수영을 하러 나간다. 집에서도 틈틈이 홈 트레이닝을 하고 있고.
꼬투리를 잡으려고 해도 마땅한 게 떠오르지가 않는다.
결국 포기다.
신체를 사용해서 뭔가를 하는 일은 상대가 되질 않았다.
“에이씨. 난 그래도 달리기 잘하잖아 달리기! 야생 닭 같은 거 나오면 전력 질주해서 잡으면 돼지. 멋지게 몸을 달려서 다이빙으로 딱! 얼마나 좋아?”
“네가 거기 가서 닭을 잡으면 내가 너 동생이다.”
박진우가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기다렸다는 듯이 장요한이 눈을 치켜떴다.
“어, 진짜지? 방금 한말 꼭 약속 지켜라.”
“졸리면 헛소리 그만 하고 잠이나 자. 어차피 갈 일도 없을 테니까. 지금 우리 스케줄에 생존의 법칙이 가능하기냐 하냐? 그런데 가면 보통 스케줄 5, 6일은 비워놔야 할 텐데. 일 없어. 멍청아.”
“그, 그렇겠지?”
옆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노아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래도 형들이랑 그런데 가면 진짜 재미있을 거 같아요. 그때 두바이 갔을 때도 진짜 재미있었는데.”
두바이 때 있었던 일들을 상기시키는지 노아의 얼굴에는 달덩이 같은 미소가 환하게 떠올랐다.
그리고는 덧붙였다.
“만약에요. 그런데 가게 되면 제가 형들이 잡아오는 걸로 요리 맛있게 해드릴게요. 저 생선 같은 것도 손질 잘해요.”
멤버들끼리 한참동안이나 생존의 법칙에 대해서 떠들어댔다. 생존과 모험, 그리고 탐험에 대한 남자들의 갈망은 역시나 가슴 깊은 곳에 누구나 묻어놓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생존의 법칙은 그야말로 남자들의 로망에 불을 지펴놓기에 충분한 그런 프로그램이었다.
도무지 떡밥이 식지를 않는다.
“뭔 이야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고 있어?”
뒤늦게 차에 올라탄 차조영 실장이 운전석에 앉은 채 뒤돌아서서 물었다.
“아, 생존의 법칙이야기하고 있었어요. 저희는 언제쯤이면 거기 나갈 수 있어요?”
장요한의 질문에 동시에 차조영 실장의 눈이 커졌다.
“어? 그렇지 않아도 그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너희들 생존의 법칙에서 섭외 들어왔거든.”
“진짜요! 진짜!? 언제요!?”
말 떨어지기가 무섭다. 반응이 아주 격하다.
“한 삼일쯤 됐지. 왜? 그 프로그램에 나가보고 싶어?”
“네에에!!!”
멤버들이 동시에 차가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어째 차조영 실장의 반응이 좀 미적지근하다.
차조영 실장이 턱을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음. 사실 그렇지 않아도 팀장님이랑 이야기를 해봤는데. 그거 찍게 되면 거의 1주일은 스케줄을 비워놔야 해서. 돌아와서 시차적응도 해야 되고······. 아마 위에서 허락을 안 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인데. 뭐, 그래도 너희들이 찍고 싶어 하니까 내가 이야기는 해볼게.”
차조영 실장은 생존의 법칙 촬영에 대해서 다소 부정적인 견해를 내놓았다.
하긴, 간단하게 계산기만 두들겨 봐도 답이 나오는 상황이긴 하다.
1주일동안 생존의 법칙을 찍으므로 해서 얻어지는 이익과 그것을 포기하는 대신 1주일동안 억을 수 있는 이득을 비교해보면, 당연히 도움이 될 만한 것은 후자다. 플레어에게도 회사에게도. 수익성을 놓고 따져 본다 해도 비교가 안 되겠지. 그 1주일동안 광고라도 한편 찍는다면 생존의 법칙 출연료보다도 많아질 테니까.
멤버들이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사이 차는 서서히 출발해서 도로 위에 들어섰다.
샾으로 향하는 길.
잠깐 신호등에 멈춰선 사이 차창너머를 쳐다봤다.
1집 때만 해도 거리에서 우리의 흔적을 찾기란 하늘에서 별 따기 수준이었는데, 이제는 제법 어렵지 않게 우리의 흔적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어느 작은 서점 앞에 붙어 있는 우리의 신곡 홍보 포스터, 그리고 버스 정류장 앞에 붙어 있는 우리가 탄산수를 들고 찍은 사진, 치킨집 앞마다 붙어 있는 사진, 통신사 대리점 앞에 붙어 있는 입간판까지······.
곳곳에 눈을 돌리는 곳마다 흔적이 묻어 있다.
이러한 것들은 힘들고 지칠 때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갈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특히나 탄산수 회사에서 이번에 우리로 광고모델을 바꾸고 나서 매출이 18%나 올랐다고 팬 미팅, 사인 회등 플레어와 관계된 모든 행사에 탄산수를 무한정으로 제공해주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덕분에 차 트렁크에도 탄산수를 한 박스 쟁여놓고 다니는 중이다.
시끌시끌하던 분위기가 언제부턴가 조용하기에 뒤돌아 봤더니, 멤버들은 목 베개나 쿠션등을 목에 끼고 잠들어 있었다. 이제는 거의 자동이다. 차에만 타면 바로 곯아떨어지는 것이.
지난 1년 동안 연예계 생활을 하면서 터득한 일종의 생존 습관 같은 거다.
매일같이 잠이 부족하니, 어떻게 해서든지 잠을 보충하려는 의지랄까나.
아함, 그러고 보니 나도 좀 졸립기는 하네.
*
R&N대표실.
정도운 대표의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뭐, 생존의 법칙?”
“네. 뭐하는 프로그램인지는 아시죠?”
“알지. 제작진이 미리 섭외해놓은 외딴 섬에서 출연자들끼리 알아서 생존하는 뭐, 그런 프로그램이잖아?”
“예, 맞습니다. 그거.”
“그 프로 시청률이 얼마나 나오지? SBN에서 하는 프로그램이었던가?”
정도운 대표의 물음에 김관수 본부장이 잠시 생각을 해보더니 답했다.
“네. SBN꺼고, 시청률은 13프로에서 14프로정도쯤 나옵니다.”
“예능치고는 괜찮네. 왜, 그 프로그램에 애들이 나가고 싶어해?”
“차 실장이 혹시 가능한지 대표님께 여쭤보라고 해서요. 알다시피 그 프로그램 촬영을 하려면 거의 일주일 스케줄을 통으로 비워야하는지라······.”
“흠. 일주일이라······.”
정도운 대표가 푹신한 의자에 몸을 기댄 채 한손으로 턱을 괬다. 그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든가 고민에 잠기면 나오는 일종의 습관이다.
앞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마신 김관수 본부장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그나저나 전무이사님은 한동안 안보이시던데 혹시 어디 가셨나요?”
“도로 미국 갔어.”
정도운 대표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툭하고 내뱉었다. 허나 그 여파는 결코 작은 게 아니었다. 김관수 본부장은 순간 자신이 잘못들은 줄만 알았다.
“네!? 이곳에 아예 눌러 앉을 것처럼 구시던 분이요?”
“투자금 더 내놓으라고 시위하러 온 거지 뭐.”
정도운 대표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100억 약속하고 미국으로 돌려보냈어. 걔랑 같이 있다가는 내가 제 명에 못살 것 같아서. 그보다······ 자네 생각은 어때?”
“네? 음. 전무이사님을 되돌려 보내신건 대표님께서 아주 잘하신 일이라고······.”
“아니.”
정도운 대표가 말허리를 자르고 들어왔다.
“······그거 말고. 생존의 법칙 말이야.”
“네?”
“걔네들이 하고 싶어 한다며? 그래서 자네에게 묻는 거야.”
잠시 김관수 본부장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물론 하고 싶어 하면 시켜야죠. 하지만 혹시 있을지도 모를 부상 같은 것도 염려해야하고, 무엇보다 그거 촬영하는 동안 손실되는 금액이 만만치 않을 텐데, 회사를 생각한다면 당연 저는 반대입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말이야 때론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들도 있지 않겠어? 이번에 최강민이 퀴즈 프로그램에 나가서 상금을 전액 기부했듯이 말이야.”
“무, 물론 그거야 그렇죠.”
소파 테이블 모서리를 손끝으로 툭툭 건드린 정도운 대표가 이내 결심했다는 듯이 말했다.
“섭외가 박 팀장을 통해서 들어왔다고 그랬지?”
“네.”
“그러면 박 팀장 회사에 들어오는 대로 나한테 좀 들리라고 그래.”
< 또 다른 예능 (1) > 끝
ⓒ 윤민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