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화가 필요하다면 (3) >
알았다고 대답을 한 후 통화를 끊었다.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대표님이 왜 저를 보시자고 하시는 거죠?”
“드라마 성공을 축하해주기 위해서?”
“원래 이렇게 소속 연예인을 잘 챙겨주시고 하시는 분인가요?”
차조영 실장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누구냐에 따라서 다르겠지. 직접 대표님이 따로 불러내서 밥을 사주겠다는 건 그만큼 네 입지가 커졌다고 보면 될 테니까. 좋게 생각하라고. 여태껏 대표님이랑 식사를 한 연예인은 강동운, 김성영, 유상철. 최근에는 서은채 정도였으니까.”
모두가 이름만 대면 알만한 R&N을 대표하는 간판스타들이다.
“아······.”
헌데, 말이 좋아 점심 한 끼지만 정도운 대표를 면전에 대놓고, 밥이 잘 넘어갈까가 의문이다. 그런데 다행히 그런 고민은 자연스럽게 해결됐다.
점심식사 약속이 취소됐다. 바로 다음 날 아침.
허리케인이 R&N엔터테인먼트를 덮쳤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허리케인이.
*
R&N엔터테인먼트 1층 로비.
붉은 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선글라스를 낀 채 들어오고 있다.
운동으로 잘 관리된 몸매와 들어갈 때는 들어가고 나올 때는 확실히 나온 몸매 라인.
연예인 뺨치는 분위기. 어깨까지 내려온 짙은 붉은색 맴도는 머리카락이 걸을 때마다 찰랑거린다.
나이는 서른 중반 정도? 하얀 피부와 도도한 이미지와 잘 맞아떨어지는 그런 외모를 지닌 여자였다.
돌연 로비 한복판에서 여자가 걸음을 멈추고는 눈을 감은 채 숨을 크게 들이쉬며 주위를 훑는다. 마치 오랫동안 오지 못했던. 그리운 고향에 돌아온 듯 한 그런 표정으로.
“음. 오랜 만이네. 여기도.”
그걸 본 직원 하나가 못 볼 걸 본 사람의 표정으로 옆 사람의 팔을 툭툭 건드렸다.
“야. 저기저기!”
“왜에에······?”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직원이 여자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표정이다.
그 광경을 지켜본 여자가 입 꼬리를 슬쩍 올리고는 손을 흔들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또각또각 하이힐 굽 밟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진다.
여자가 사라졌지만 그 여파는 엄청났다. 1층 휴게실에서 있던 이들이 숨을 몰아쉬며 경악에 가까운 표정으로 수군댔다.
“뭐, 뭐야? 저 여자가 왜 여길 나타나?”
“그, 그러게요. 미국으로 영영 간 거 아니었나?”
“듣자하니 미국에 법인 회사 세우고 돈 엄청 깨 먹고 철수한다는 소리가 있었는데. 그 말이 진짠가 보네.”
한참 로비 안이 떠들썩했다. 그리고 소란이 잦아질 무렵, 여직원 한명이 누군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여기로 출근하진 않겠죠?”
“에이, 설마.”
띵.
1층에서부터 올라간 엘리베이터가 곧장 5층에서 멈춰 섰다.
드르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어떻게 오셨······.”
인기척에 습관적으로 대답하던 여비서가 불쑥 튀어나온 얼굴을 확인하곤 얼어붙었다.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이다.
예상했다는 듯이 선글라스 낀 여자가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오랜만이네요. 오빠, 안에 있죠?”
여비서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네? 네에. 대표님이 안에 계시긴 합니다만 지금 안에 본부장님과 회의를······.”
“김본부장 말이에요? 아. 됐네. 그럼. 신경 쓰지 말고 일봐요. 내가 알아서 들어갈 테니까.”
선글라스 낀 여자가 상관없다는 여유 있게 손을 휘휘 내젓고는 성큼성큼 대표실로 직행했다.
여비서가 얼른 데스크에서 쫓아 나와 여자 꽁무니를 쫓았다.
“저기, 잠깐만요. 기다리시면 제가 대표님께 언질을······.”
선글라스 낀 여자가 돌연 걸음을 멈춰 세우고는 고개를 홱 돌렸다. 얼굴에는 불쾌감으로 일렁거렸다. 턱을 찌를 듯이 치켜든 통에 여비서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김 비서. 내가 누군지 몰라요?”
“아, 아니, 아는데요. 대표님이 회의 중이실 때는 아무나 들여보내시지 말라고 하셔서······.”
“아무나?”
삽시간에 목소리가 앙칼지게 변했다. 여자가 선글라스를 확 벗어 재꼈다. 신경질적으로 올라간 눈썹이 사정없이 꺾였다.
“지금. 나한테 아무나라고 그랬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저는 단지······.”
쩔쩔매던 여비서는 그 같은 호통에 당장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은 얼굴이 됐다. 코뿔소처럼 콧김을 내뿜은 여자가 라마즈 호흡을 하는 것처럼 길게 숨을 들이셨다가 내셨다. 선글라스는 다시 착용하고는 입술을 달싹였다.
“오랜만에 돌아와서 기분 좋은 상태니까 기분 망치게 하지 말아요. 한두 번도 아니고, 앞으로 두고두고 오래 볼 사인데, 이런 식으로 내 행동에 딴죽 걸지도 말아줬으면 좋겠고. 내말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네? 네네.”
여비서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기를 풀풀 내 풍긴 여자가 선글라스를 도로 낀 채 대표실로 들어갔다.
목 졸린 후 숨을 토해내듯 숨을 길게 내쉰 여비서가 오싹해진 몸을 양손으로 쓸어내렸다.
*
“그래서 중국 쪽 에이전시와는 수익배분을 4:6까지 생각하고, 추진하는 걸로······”
말을 하다만 김관수 본부장이 순간 뒤를 돌아봤다가 메두사라도 본 표정으로 그대로 얼어버렸다. 놀람을 넘어서 경악에 가까운 표정이 얼굴에 떠올랐다.
“오빠. 나 왔어.”
좀처럼 감정표현이 드문 정도운 대표도 예고 없이 들이닥친 여동생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뭐야. 언제 귀국했어?”
팔짱을 낀 여동생. 정수연이 두 사람의 반응에 실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에요. 두 사람 반응이 왜 이래? 나 안 반가워요?”
김관수 본부장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어서 오세요. 너무 갑작스럽게 오셔서··· 언제 귀국하셨습니까? 오신다는 소식은 못 들었는데.”
“제가 뭐 언제는 온다 간다. 보고하고 다녔어요? 그냥 내키니까 왔지. 어제 서울 도착해서 호텔에서 묵고 있어요. 1년 만인가요. 본부장님?”
“예. 전무이사님도 잘 지내셨죠? 한데, 그보다 진짜 무슨 일이십니까? 미국에 있는 회사는 어쩌시고, 이렇게 말도 없이······.”
“아, 미국 회사요? 보고는 계속 받고 있으신 줄 알았는데요. 이대로는 계속 적자폭이 커질 것 같아서 그냥 접기로 했어요.”
“아네, 접기로······ 네!? 사업을 접기로 하셨다고요?”
김관수 본부장의 눈이 커졌다.
무슨 사업 접는다는 이야기를 이렇게 호떡 뒤집듯 쉽게 말한단 말인가? 소리 없이 입을 벙긋거리며, 정도운 대표에게 언질 받은 게 있냐고 물었다.
그가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김관수 본부장이 작게 헛기침을 토해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전무이사님께서 불과 두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2, 3년은 노력을 더 해봐야 한다고 말씀을······.”
정수연의 목소리가 말허리를 잘랐다.
“진창물인 걸 아는데, 굳이 발을 담구고 있을 이유가 있나요? 한시라도 빨리 발을 빼는 게 현명하지. 안 그래요?”
그 말에 김관수 본부장이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정도운 대표도 정수연을 복잡한 표정으로 보고 있고.
“뭐에요. 그 할 말 잔뜩 많은 눈빛들은? 자신만만하게 브로드웨이에서 한국 뮤지컬을 흥행시켜보자고 갔던 제가 실패했다고 하니까 고소하기라도 하세요?”
“아, 아닙니다. 제가 어찌 그런 생각을······.”
김관수 본부장이 얼른 대꾸했다.
“뭐, 상관없어요. 사실은 사실이니까. 브로드웨이 문턱이 생각보다 높더라고요. 그래서 생각보다 더 잘 안됐어요. 계속 적자폭이 커지는데 미련하게 붙잡고 있을 이유는 없잖아요. 우리가 뭐 자선 사업하는 단체도 아니고. 제 말이 틀렸어요?”
실패했다는 걸 너무 당당하게 말하니까 할 말이 없어진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정도운 대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뭘 할 생각인데?”
“뭘 하긴. 내수나 다져야지. 요즘 걔네 누구냐. 플레어? 걔네 반응이 그렇게 좋다며? 듣자하니 걔네 중국 진출을 위해 오빠가 해외 출장 잦다는 소리가 들리던데. 가족 좋다는 게 뭐야. 이럴 때 옆에서 든든하게 지켜주는 게 가족이지. 앞으로는 그 짐 나눠서 져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정도운 대표가 인상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그······ 말뜻은. 앞으로 회사 일에 간섭하겠다는 거야?”
정수연이 엄지와 중지를 퉁겼다. 딱 소리가 났다.
“역시 오빠랑은 대화가 빨라서 좋아. 근데 어감이 좀 그렇다. 간섭이라니. 나는 일을 하려는 것뿐인데.”
정수연이 몸을 빙그르르 돌렸다.
더 이상은 대화를 지속하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내 사무실은 아직 그대로지? 아휴, 오랫동안 사용을 안 해서 먼지나 안 쌓였나 모르겠다.”
제 할 말만 던져놓고, 거침없이 뒤돌아서서 나가는 정수연을 보며, 정도운 대표가 턱을 문질렀다. 골칫덩이를 보는 듯 한 그런 표정으로.
쾅 닫힌 방안에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대표님.”
김관수 본부장이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입을 열었다. 가뜩이나 까칠한 얼굴에 피곤함이 떠올라 있었다.
“이대로 두고만 보실 겁니까?”
정도운 대표가 소파쿠션에 몸을 기대며, 손끝으로 손잡이를 톡톡 건드렸다.
“가만 있어봐. 나도 어떻게 할지 생각 중이니까.”
*
"다들 그 소식 들었어요?"
실장 한명이 다급한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매니지먼트 사업부 3팀의 김수열 실장이다.
R&N옥상에 마련된 야외 흡연실. 벤치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실장과 이제 실장급에 가까워진 매니저들이 빙 둘러 앉아 있었다.
살생부에 올라가 있는 자신의 이름을 확인한 것처럼 모두 얼굴이 푸르죽죽하다. 둥그스름한 재떨이 위에는 이미 셀 수도 없는 담배꽁초가 빼곡히 솟아 있다.
"어, 김 실장. 어서와."
개중에 가장 고참 실장이 손짓했다.
김수열 실장이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최 실장님. 정 마녀 떴다는데, 그 소식 진짭니까?”
순간 앉아 있던 이들은 못들은 이름을 들은 것처럼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한숨을 쉰 최 실장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들었으니까 이러고 있지. 여기 보이는 꽁초들 보이지?”
“네.”
“이게, 불과 20분 만에 세워진 묘비야. 너도 어서 하나 꽂아놔. 묘비에 이름 명 적어놓고.”
“으헉.”
김수열 실장이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목 졸리는 소리를 냈다. 서둘러 담배 갑을 열고, 담배를 한 개비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는 담배연기로 정화라도 시킬 기세로 담배를 뻑뻑 펴댔다.
그 모습들을 아까 전 부터 잠자코 지켜보던 매니저 한 명이 물었다.
“저기, 도대체 누군데 이렇게 다들 무서워합니까? 도대체 정 마녀가 누구기에.”
“아, 자네는 아직 못 겪어봤겠구나. 이제 여기서 일한지 반년정도 됐나?”
“네.”
그는 열무 엔터테인먼트에서 반년 전에 R&N으로 이직해온 매니저였다.
고참 실장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수연 전무이사님이라고, 대표님이랑 배다른 여자 동생이 한 분 계시거든? 근데 작년 이맘때쯤 미국 브로드웨이 밟아보겠다고, 거기에 가셨었거든.”
“덕분에 평화가 찾아왔지. 불과 1년밖에 지속되지 않은 평화였지만.”
누군가 추임새를 넣었다. 북극펭귄마냥 그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인다. 고참 실장의 목소리가 한층 더 은근해졌다.
“그런데 사실 그게 대표님이랑 힘 싸움에서 밀려서 쫓겨나다시피 간 거라는 소문이 있어.”
“대표님이랑요?”
신참 실장이 잠시 대표의 이미지를 떠올려봤다.
타협 없는 강인함과 굳건한 이미지. 바늘 들어갈 틈도 없어 보일 정도로 완벽한 사업가이자 남자.
그의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몸이 위축이 되는 그런 기분을 느끼는데, 그런 대표와 맞섰다는 정수연 전무이사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쉬이 감이 오질 않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신참 실장은 내버려두고, 개중 연차 좀 되는 실장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나눴다.
“앞으로 회사 어떻게 될 거 같아요?”
“어떻게 되긴. 아마도 전무이사님이 일 시작한다고 하시면, 팀 몇 개는 전무이사님 관할로 넘어가지 않겠어?”
“설마, 그게 매니지먼트 사업부가 되진 않겠죠?”
“가장 가능성이 크지. 그분도 나름 이쪽 바닥에서는 커리어가 쌓인 분이라. 그래도 일은 똑 부러지게 잘하시잖아? 성격이 좀 그래서 그렇지.”
“좀······이요?
고참 실장의 말에 모두들 침묵을 지킨 채 일제히 담배를 꺼내 물었다.
< 변화가 필요하다면 (3) > 끝
ⓒ 윤민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