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화가 필요하다면 (1) >
R&N대표실 안.
두 명의 중년 사내가 서로 마주보며 앉아 있다.
정도운 대표와 김관수 본부장이 그들이다.
하얀색 도자기찻잔에 담긴 누리끼리한 색의 찻물을 호로록 마신 김관수 본부장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손을 휘휘 저었다.
“대표님. 뭔 차 길래 이렇게 떫고, 밍밍해요?”
“이번에 중국에서 왕홍 사장이 챙겨준 거. 먹다보면 또 이게 은근히 괜찮아.”
“아······. 그 대홍마차인가 포차인가 하는 그거요? 선물로 주면서 엄청 비싼 거라고 주면서 유세를 떨던?”
정도운 대표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거야. 입맛에 맞으면 좀 챙겨줄까?”
김관수 본부장이 고개를 살살 흔들었다.
“아니요. 됐습니다. 저는 그냥 카페인이 듬뿍 들어간 커피 이런 게 좋습니다.”
“그래도 몸에 좋은 거라니까 먹어둬. 아니면 한약이라도 한 채 지어줘?”
“아니요. 됐습니다. 한약은요 무슨.
찻잔을 손에 든 김관수 본부장이 단숨에 찻물을 삼키고는 말했다.
“그나저나 일이 생각보다 더 잘 풀리겠는데요. 중국 측에서 플레어에게 이렇게 관심을 두고 있을지는 몰랐습니다.”
“아마도 최강민 때문이겠지. 중국에서 꽃미남 학교가 제법 반응이 괜찮다니까.”
“괜찮은 정도가 아니죠. 숫제 펄펄 끓고 있다는데요? 최고 잘 나간다는 중국 자국 드라마 지난해 평균 시청률이 1. 2정도고, 탑텐에 드는 드라마도 거의 0.6-0.8수준이에요. 최근 방영분 보니까 꽃미남 학교가 쟁쟁한 중국드라마들 제치고 0.6시청률 기록했다
는 보고 받았습니다. 이 정도면 종영할 때쯤에는 1프로 넘는 것도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내 생각도 그래. 이번에 파트너 쉽 체결한대가 어디 어디지?”
“일단 포커스 차이나, 타오바오 에이전시 쪽과는 파트너 쉽 체결 했고, 영화픽션이랑 차이나 드림 제작사는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랍니다. 그리고 추가로 사운드뮤엑스, fenxiang랑도 CP계약 체결했고요.”
“음······.”
정도운 대표가 손으로 턱을 매만지더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웃음을 짓는다.
남성다움이 물씬 풍기는 그런 미소다.
“좋네.”
“아마 2집 앨범 나오고 중국 쪽 프로모션만 한 바퀴 돈다 해도 꽤 빡빡한 일정이 될 겁니다. 뭐, 일단은 그전에 앨범이 나와야겠지 만요.”
“앨범이라······. 진행은 잘 되어가고 있나?”
“1집 때 트랙이 좀 많았다는 의견들이 많아, 이번에는 대폭 줄여서 5-6곡정도로 집중해보려고요. 우선은 괜찮은 곡들은 A&R팀에서 쓸어 담고 있습니다. 예전과는 달리 급이 좀 높아져서인지 꽤 유명한 작곡자들도 곡 주겠다고 찔러보고 있고요. 아무래도 이번
앨범에 거는 기대들이 많아 좀 시간을 넉넉하게 잡고 진행할까 합니다.”
한쪽 발을 꼬고, 쿠선에 등을 기댄 정도운 대표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최강민 자작곡 말이야.”
“네?”
“내 말은 최강민이 작곡을 잘하고 있냐고 물은 거야. 2집 타이틀곡도 최강민이 자작곡으로 갈 거 아니야?”
정도운 대표의 물음에 김관수 본부장이 턱을 긁적였다.
“어, 글쎄요. 아직 뭐, 작곡된 곡이 있다는 말을 따로 들어본 적은 없긴 한데······.”
“한번 확인해 봐. 나도 걔한테 거는 기대가 꽤 크니까. 이번에는 어떤 노래를 만들지 궁금하기도 하고.”
“네. 알겠습니다. 아참, 그리고 대표님. 그··· 희망 보육원 인수 건은 이번 주 안에 서류작업 다 끝내고, 다음 주쯤에나 진행할까 합니다.”
“그 일은 자네한테 일임했으니 알아서 진행하도록 해. 괜히 언론에 노출시켜서 잡음 생기지 않게, 조용히 잘 처리하도록 하고.”
“네, 그건 걱정 마십시오. 법무팀과 같이 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김관수 본부장의 주머니에 넣어놓은 핸드폰이 진동 했다.
핸드폰을 꺼내 확인해봤더니, 차조영 실장이었다. 김관수 본부장이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정도운 대표를 향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차 실장인데요? 무슨 일로 전화를 다 했지?”
“플레어 담당하고 있는 차조영 실장?”
“네, 오늘 애들 두바이에서 예능촬영하고 돌아오는 날이라 픽업 갔거든요.”
“받아봐.”
“네, 그러면.”
어서 받아보라는 정도운 대표의 손짓에 김관수 본부장이 핸드폰을 꺼내 귀에 붙였다.
“어, 차 실장.”
잠시 후 상대측에서 뭐라고 했는지 김관수 본부장이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뭐? 대표님을?”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정도운 대표가 김관수 본부장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김관수 본부장이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며, 정도운 대표를 향해 말했다.
“저어, 대표님.”
“어, 왜?”
“최강민이 대표님한테 따로 드리고 싶은 말이 있다는데요?”
“나한테?”
놀람의 이채가 스치는 것도 잠시 흥미로운 표정이 정도운 대표 얼굴에 자리 잡았다.
“오라고 해.”
“올라오라고 해요?”
정도운 대표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어, 대표님이 올라오시라고 하네. 20분쯤? 알았어. 회사에 도착하는 대로 바로 올라와.”
전화를 끊은 김관수 본부장이 희한한 표정을 지었다.
“걔가 뭔 거창한 말을 하려고 대표님을 보자고 하는 거죠? 혹시 회사에 뭐 불만 사항 같은 거라도 말하려고 하나?”
“그야, 나도 모르지.”
정도운 대표가 무릎 위로 깍지 쥔 손을 포개어 놓았다.
“한 번 들어나 보자고. 뭔 소리를 하나.”
*
“나는 네가 네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어있는지 모르겠다.”
대표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
차조영 실장이 고개를 흔들었다.
저건 내가 애들을 보면서 자주 생각했던 건데. 내가 들을 줄은 몰랐네.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게 어때? 그냥 내가 팀장님 통해서 대표님께 사정을 한번 잘 말씀 드려볼 테니까. 지금이라도 되돌아······.”
“아니요. 그냥 제가 말씀드려볼게요.”
단호하게 말하자 차조영 실장의 시선이 내게 닿는다. 늘 나를 바라볼 때는 잘 큰 대견한 막내 동생 보듯 쳐다보곤 했는데, 오늘은 아니었다. 골칫덩어리를 보고 있다는 그런 표정이다.
“야, 너는······ 어휴, 내가 말을 말자. 이, 미친놈. 아마 대표님한테 그런 헛소리를 하는 사람은 우리 회사에서 너 밖에 없을 거다.
“아니죠. 이건 투자죠.”
“말이 좋아 투자지 그냥 돈 달라는 거잖아. 넌 대표님 면전에서 그런 소리가 잘도 나와? 나는 대표님 앞에만 서면 왠지 쭈그러드는 기분인데. 아무튼 말씀 드렸으니까 들어간 후에는 네가 알아서 잘 말해봐.”
“알았어요.”
이윽고, 엘리베이터가 대표실 앞에 도달하고 문이 열렸다.
차조영 실장이 문 앞에서 노크를 했다.
“접니다.”
문 건너편에서 ‘들어와.’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그냥 여기 있는 편이 낫겠다. 너 혼자 들어갔다가 나와. 무슨 일 있으면 안에 본부장님 계시니까 잘 한 번 말씀드려 보고.”
“네.”
고개를 끄덕인 나는 심호흡을 하고, 문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
대표실 안 무거운 공기가 맴돌고 있다. 여지껏 정도운 대표를 본적은 딱 두 번이다.
예전에 데뷔를 하기 직전 박호영 팀장과 같이 한 번. 그리고 나머지 한번은 회사입구에서 스치듯 한 번.
그러고 이번이 세 번째다.
“나한테 할 말이 있다고?”
정도운 대표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나를 쳐다봤다. 반듯하게 잘 다듬어져 있는 눈썹과 베일 듯 날카로워 보이는 턱선. 살짝 걷은 소매위로 돋아나 있는 굵은 힘줄까지.
처음 봤던 그대로다.
단지 물음을 던졌을 뿐인데도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다.
처음 봤을 때도 느낀 거지만, 사람이 뭔가 좀 어렵다. 단지 회사 대표와 소속 연예인 사이라서는 아니고, 딱히 위협적이지도, 그렇다고 고압적 행동을 취한 것도 아닌데. 왠지 모르게 가까이 다가가기가 꺼려진다고 할까.
나이차 때문인가 생각해봤지만, 옆에서 눈곱을 떼고 있는 김관수 본부장을 보고 있자니 꼭 그런 것 만도 아닌 것 같고. 두 사람이 몇 살 차이나지도 않는데, 김관수 본부장은 호감 가는 옆집 삼촌 느낌이다.
“말해봐 봐. 그게 뭔지.”
아랫입술을 꾹 물고 말했다.
“대표님. 혹시 4억만 투자해보실 생각 없으세요?”
“4억? 갑자기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혹시 돈 필요한 곳이라도 있어?”
정도운 대표는 흥미로운 장난감이라도 본듯 쳐다보고 있고, 오히려 김관수 본부장이 감짝 놀란 목소리로 묻는다.
“너 혹시 사채 같은 거에 손댄 거라면······.”
“아니에요. 그런 거.”
“그러면 그 큰돈이 왜 필요한데?”
“듣자하니 희망 보육원 사정이 어려워졌다고 들어서요. 거기에 도움을 주셨으면 해서요. 듣자하니 R&N에서 해마다 기부행사 같은 것도 하고, 해마다 각종 재단이나 불우이웃돕기 성금 같은 것도 낸다고 들었어요.”
“그거야, 그렇지만··· 잠깐, 희망 보육원? 혹시 김태현이 자랐던 곳?”
“네. 태현이 말로는 보육원 사정이 좋질 않아서 문을 닫는다고······.”
“야, 거기라면 지금······.”
“가만.”
정도운 대표가 손을 들어 김관수 본부장의 말을 잘랐다.
“조금만 더 들어보도록 하지. 그러니까 네 말은 그 보육원에 기부를 해달라는 거야?”
“아뇨. 정확히 말하자면 인수를 하자는 거죠. 거기 정혜원 수녀님이 진짜 좋으신 분이거든요. 그 분에게 운영을 맡기고, R&N에서 지속적으로 후원하는 형식으로. 회사 이미지도 살리고, 직원 복지도 되고. 일석이조 같은데.”
김관수 본부장이 벙찐 표정을 지었다.
왜 저런 표정을 짓지?
정도운 대표의 반응을 살폈더니, 숨죽이며 작은 웃음을 흘리고 있다. 마치 재롱떠는 손주를 보는 할아버지 마냥.
한참동안 웃던 정도운 대표가 나를 지그시 쳐다보며 물었다.
“내게 하고 싶다는 말이 그거였어?”
“네.”
“알았어.”
“네?”
“알았다고. 그렇게 하도록 하지.”
헐.
이런 답변이 들려올 줄은 생각도 못했다. 당연히 왜 내가 그래야 하냐, 네가 뭘 해줄 수 있냐. 가타불가 말이 많아서 장황하게 늘어놓을 이런저런 답변들을 생각해 왔는데. 그냥 알았다고 대답하고 끝인가?
그게 아니라면 돈이 너무 많아서 4억 정도는 자신에게 아무것도 아닌 돈이라 이건가?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고 있던 정도운 대표가 툭하고 내뱉었다.
“혹시 김태현이 네게 이렇게 말해달라고 시킨 건 아니지?”
“아니에요. 그런 거.”
김태현이 알면 펄쩍 뛰고 난리 나게?
남들이 보면 오지라퍼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상관없다. 김태현뿐만이 아니라 다른 멤버들도 그만큼 나에게는 소중한 사람이 되어 있으니까.
다른 방법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당장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이 방법밖에 생각나질 않았다. 내가 돈이 많아서 그냥 턱하고 줄 수 있을 재력가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 큰 돈을 구할 방법도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생각해낸 게 이 방법이다.
물론 김태현은 내가 정도운 대표를 만나고 있는 것조차도 모른다.
“보기 좋네. 팀원을 챙기는 그런 모습이. 예전에 나한테 제 2의 잭 윈스턴 같은 사람이 된다고 했지. 한 번 그렇게 돼봐. 그러면 네 말이라면 내가 뭐든지 들어줄 테니까.”
나를 보고 있던 정도운 대표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스치듯 지나간다.
당황스러워 충격을 바가지로 퍼먹은 표정을 하고 있는데, 김관수 본부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뭔가 싶어서 궁금해서 엉덩이 뭉개고 있었는데. 용건 끝난 거 같으니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그래.”
김관수 본부장이 내 어깨를 툭 쳤다.
“뭐해? 더 할 말 없으면 같이 나가지 않고?”
“네?”
그러면서 김관수 본부장이 아직도 굳어 있는 나를 질질 끌고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고, 대표실 밖에서 심호흡을 한 뒤 내가 물었다.
“뭐에요, 진짜? 대표님이 들어주시기로 한 거예요? 아무것도 묻지 않으시고요?”
“인마.”
김관수 본부장이 웃으면서 내 어깨를 툭 쳤다.
“방금 그거 이미 나랑 대표님이랑 논의 중인 이야기였어.”
“네?”
“소속 연예인 주변환경 챙기는 것도 매니지먼트에서 할 일이거든. 김태현 사정은 이미 보고 받아서 알고 있어. 그래서 대표님한테 이야기했더니, 선뜻 도와주시겠다고 하시더라. 그나저나 너는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그런 소리를 했냐? 아니, 그것보다 차 실장
얘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너를 대표실로 떠밀었지? 이게, 아주 군기가 빠져가지고······.”
“잠깐만요. 이미 논의 중인 이야기였다고요? 그러면 대표님이 왜 저에게 그런 말씀을······.”
“대표님 속을 누가 아냐. 나도 꽤 오랫동안 대표님이랑 같이 일 해봤다고 생각하는데, 아직도 그 속을 짐작도 못하고 있는 걸. 남들은 다들 마누라가 제일 무섭다고 하는데, 나는 마누라보다 대표님이 더 무서워. 아, 내가 지금 쓸데없이 무슨 소리를······.”
김관수 본부장이 내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어쨌든 김태현한테 가서 소식이나 전해줘. 내가 이야기하는 것보단 네가 하는 게 좋겠지? 아참, 그리고 혹시 곡 만들어 놓은 거 있어?”
“네, 완성된 곡 한곡이랑 거의 작업 끝내놓은 곡 한곡이요. 그건 왜요?”
“대표님이 조금 전에 물어보시더라고. 슬슬 2집 준비도 해야 하니까. 혹시 개인 스케줄이 너무 바빠서 곡만들 시간 없으면, 이야기해. 시간 조율해가면서 스케줄 좀 줄여보도록 할 테니까.”
“음, 그건 그런데 벌써부터 2집은 조금 빠르지 않아요?”
“미리미리 준비해야지. 드라마 끝난다고 활동이 끝나는 건 아니니까. 아마 지금보다 더 바빠질걸? 광고에 인터뷰에 아참, 듣자하니 시청률 잘 나와서 포상휴가도 간다고 하던데. 아마 그러면 한, 두 달쯤은 그냥 눈 깜짝할 사이에 후딱 지나가지 않을까?”
“에이, 설마요.”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김관수 본부장의 그 말은 사실이었다.
정말로, 정말로 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그것도 순식간에.
< 변화가 필요하다면 (1) > 끝
ⓒ 윤민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