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춘을 즐겨라 (5) >
“푸흐흐흐흡.”
기괴한 소리가 들린다. 뭔가 싶어서 봤더니 스텝들이 죄다 입을 틀어막고 웃고 있다.
“차 사주시는 거 맞죠?”
다시 한 번 물었다. 피곤에 절어 있는 나 피디의 눈동자가 쉴 새 없이 흔들린다. 여지껏 저렇게 당황스러워하는 나 피디의 모습은 처음 본다. 당황스럽기도 하겠지.
재미있자고 걸어놓은 상품을 떡하니 가져가 버렸으니.
아마 모르긴 몰라도 머릿속은 지진 난 상태일거다.
“잠시 저, 화장실 좀…….”
“화장실요? 도망가시는 건 아니죠?”
“갑자기 급해서 그래요.”
나 피디가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표정을 보니 정말로 내가 맞힐 거라는 생각은 티끌만치도 안 했나보다. 사실 나한테야 뭐, 영삼이 능력을 사용하면 식은 죽 먹기지.
다시 한다고 해도 열 번 던져, 열 번 다 맞힐 수도 있다.
잠시 소강상태가 이어지고, 화장실에 갔던 나 피디가 돌아왔다.
진짜로 화장실을 다녀왔는지 아니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전 보다는 홀가분해진 표정이다. 이내 얼굴에 꿍꿍이서린 웃음이 자리 잡는다.
“약속은 약속이니까 한국 돌아가는 데로 차량 알아봐드릴게요.”
저 얼굴로 저렇게 말하니 신뢰가 안 간다.
찰나의 재미를 위해서 다트 판에 자동차 스티커를 붙여놓는 사람인데, 저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라고? 아마도 화장실을 간다고 해놓고, 머릿속으로는 이 상황을 이용하면 어떻게 재미있는 장면을 연출해낼까 그걸 연구했겠지.
나 피디는 원래 그런 쪽으로 명성 높은 피디니까.
도대체 뭘까. 무슨 꿍꿍이지?
이런저런 형체 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닌다. 나 피디를 불현 듯 봤는데, 웃고 있다.
뭔가 좋은 패를 들고 있는 도박사처럼.
그의 입술이 달싹인다.
“그나저나 스카이다이빙은 당첨되신 거예요. 아시죠?”
응? 뭔 다이빙?
“자동차 스티커가 스카이다이빙 칸 안에 있었잖아요. 자동차 맞췄으니 당첨된 거죠. 안 그래요?”
“아…….”
애들 얼굴은 순식간에 썩어가는 과일처럼 변하고, 그와는 반대로 여유를 되찾은 나 피디의 얼굴에 웃음기가 서린다. 멤버들의 하얗게 뜬 얼굴을 본 탓이겠지.
특히나 장요한의 얼굴은 하얗다 못해 새 노랗다. 꼭 제철만난 귤 같다.
여지껏 잠자코 있던 노아도 한 마디 거든다. 가만 보니 급한 건 장요한 뿐만이 아니었다. 노아 상태도 심상치가 않다.
얘도 고소공포증이 있나보네.
“피디님. 피디님. 이거 한번 던졌는데 2개 당첨됐으니 중복 당첨으로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원래 추첨 같은 거 할 때 중복당첨은 다들 안 된다고 하던데…….”
“맞네. 중복이네. 이거 중복 맞아요.”
노아의 말에 장요한이 열심히 추임새를 넣는다.
“안 된다는 말도 애초에 안했잖아요. 안 그래요?”
“어, 그건 그렇지만…….”
나 피디의 대꾸에 노아가 한방에 찌그러진다.
이게 좀 애매한 부분이, 애초부터 자동차를 맞춘다는 걸 예상하지 못한 채로 만든 룰이라, 누구의 말이 맞다고 하기가 조금 곤란했다. 그냥 목소리 큰사람이 이기는 형국인거지.
그런데 노아 상태가 좀 이상하긴 하네. 원래 이런 거에 목소리를 이렇게 높이는 애가 아닌데.
“너도 높은 곳 무서워해?”
옆구리를 찌르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 노아가 주억거린다.
“작년에 번지점프를 하러 갔는데요.”
“……갔는데?”
“무서워서 오줌 쌀 뻔 했어요.”
“…….”
그러면 안 되지.
오줌 싸는 아이돌이라니.
“다섯 분 다 스카이다이빙에 성공해야지만 차를 드리는 겁니다. 한분이라도 스카이다이빙에 실패하시면 차도 없는 거예요.”
나 피디의 음성이 들려온다.
이런. 치사한…….
“우우우우. 억지다 억지.”
항의 섞인 야유성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나 피디가 짐짓 헛기침을 한번 토해내고는 사태 진압을 위해 진정하라는 듯이 손을 들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번 게 좀 애매하긴 하잖아요. 설마 자동차를 맞출 줄 저도 몰랐거든요. 헌데, 제 말도 꼭 억지는 아니지 않나요? 안 그래요?”
어. 안 그래.
“그래서 일방적으로 우기기도 뭐하고, 그러니 타협점을 찾아서 다시 새로운 게임을 하나 했으면 하는데…….”
하지만 새로운 게임이라는 말에는 조금 솔깃했다.
“새로운 게임이요?”
“몰빵 게임 어때요? 제작진 측과 팀 대결을 해서 이기시면 차도 3000cc 짜리로 업그레이드 시켜주고. 스카이다이빙도 빼드릴게요. 대신 원하는 투어로 한 가지 대체해드리고요. 어때요?”
이말을 하려고, 그렇게 밑밥을 깐거였구나.
이른 바 차빵 내기를 하자는 건가?
애들 표정을 보니 차고 나발이고 간에 스카이다이빙만 안할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어차피 차는 기대도 안하니, 현실적인 부분에서 타협을 보고 싶다는 거겠지.
내가 봤을 땐 이건, 결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다. 특히나 예능적인 재미를 찾아내야하는 리얼 버라이어티 예능 속에서는 더더욱.
예능퀴즈 같은 걸 보다보면 10점씩 걸다 막판에 200점씩도 걸고 그러는데, 그게 다 뻔히 손해 보는 걸 알면서도 막판에 극적인 기대감을 주기 위해서 하는 거다. 어쩔 수가 없는 선택인 거지. 뻔히 승부가 예측되는 게임은 재미가 없으니까.
승부의 결과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중요한 게 바로 재미다. 그렇기에 대부분 출연자들은 그런 제작진의 의도에 끌려갈 수밖에 없는 거고.
이런 능구렁이 같은 피디 같으니.
“좋아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능은 원래 몰빵하는 재미니까.
안지면 그만이잖아?
*
“제작진 대 플레어로 나눠서 팀 대결을 하는 겁니다. 공동체 운명인거죠. 게임은 총 3라운드로 진행되며, 두 번 이기는 쪽이 승리하게 되는 겁니다. 만약에 1대 1이 될 경우는 마지막 라운드로 승부를 내면 됩니다. 무슨 말인지 다들 이해하셨죠?”
나 피디의 설명에 제작진의 대표로 나온 다섯 명의 어벤저스가 결연의 의지를 다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 선수들을 하나하나 훑어봤다.
당장 역도선수를 해도 좋을 정도의 덩치를 가진 VJ부터 다크서클이 눈 밑에까지 내려와 있는 음향기계담당 스텝, 막내 여자작가까지. 도대체 저게, 무슨 조합이지?
“게임 방식은 서로 자신의 팀이 잘할 수 있는 종목을 제안해서 하는 겁니다. 신거 빨리 먹기라던가, 아니면 제기차기, 뭐 퀴즈대결 같은 것도 좋고요. 뭐든 자신 있는 걸 하면 됩니다. 우선 대표자 분들 나와서 가위 바위 보를 하세요. 이긴 팀이 먼저 종목을 제안
하는 겁니다. 그 다음종목은 진 팀이 정하는 걸로 할게요. 괜찮죠?”
나 피디의 말에 우리 팀 막내 노아와 상대팀 막내 작가가 가위 바위 보를 했다. 우리가 가위를 내서 졌다.
제작진 측에서 환호성을 내지르며 종목을 선택했다.
제작쪽 팀이 망설임 없이 정한 종목은 레몬 까서 빨리 먹기.
그쪽으로 특화된 그런 캐릭터라도 있나? 싶었는데, 역도 선수가 눈에 밟힌다.
게임형식은 간단했다.
개개인 릴레이 형식으로 1분 동안 레몬 먹은 개수를 합산해서 많은 쪽이 이기는 거다. 레몬이 셋팅 되고, 경기가 시작됐다.
우리 팀 첫 번째 주제는 김태현이었다. 레몬을 까는 데만 20초를 다 잡아먹었다. 한 조각을 입속에 넣고 오물거리는데, 비타민이 그냥… 입가로 줄줄 새어나오고 있다. 막판에는 대충 있는 대로 입속으로 밀어 넣고, 꾸역꾸역 씹는데, 보기만 해도 침이 고인다.
굳이 안 먹어보고, 표정만 봐도 어떤 맛인지 알겠다.
그 다음으로 바턴을 이어받은 박진우도, 장요한도. 모두 비슷하게 한 개씩을 해치우고, 마지막 노아는 1개도 다 먹지 못했다. 뭐, 이쪽이야 그럴 거라 예상은 했다. 노아가 워낙 신 것을 못먹으니까.
그건 제작진 쪽도 여자작가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무승부로 끝나나 싶었는데, 제작진 측에서 마지막 주자로 역도 선수급 덩치의 남자스텝이 나왔다. 시작과 동시에 레몬껍질을 대충 이빨로 뜯는 둥 마는 둥 떼어버리더니, 그대로 2개를 입안으로 쑤셔 넣었다. 그걸 본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자신만만하게 이 종목을 선택한 이유가 있었구나.
분쇄기가 따로 없다. 씹는지 삼키는지 구별이 안가지만……. 어쨌든 빠른 속도로 레몬이 사라진다.
그리고 기록을 쟀는데.
세상에 맙소사.
1분 동안 3개를 먹어치웠다.
남들의 3배를 먹어치웠다고!
반면 나는 노아가 남겨놓은 레몬 두 조각과 내 할당량 1개를 먹었고.
그렇게 첫 번째 라운드는 우리 팀이 졌다.
이걸 첫 번째 종목으로 선택한 게 다 이유가 있었구나.
*
“오오오, 선에 딱 붙었어요. 우리가 이긴 거 맞죠? 맞죠?”
“아싸. 형! 형이 1등이에요!”
내가 던진 동전이 우아한 포물선을 그리며, 분필로 그려놓은 선위로 정확히 안착했다.
그와 동시에 또 다시 분위기가 둘로 나뉜다. 물론 방방 뛰며 좋아하는 쪽은 우리 쪽이다. 제작진 측에서는 탄식이 흘러나오고 있고.
곧장 이어진 두 번째는 그려놓은 선에 가장 동전을 근접해서 붙이는 게임이었다. 그리고 지금 막 우리가 승리를 가지고 갔다.
“잠깐, 저희 작전 타임 좀 할게요.”
게임 종목을 선택하려는 지 나 피디가 제작진 측과 쑥덕거리더니, 잠시 후 한발자국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마지막 게임은 세계 시간 맞추는 게임으로 하죠.”
“네?”
“그러니까 문제를 내주는 사람이 도시 이름을 대면, 지금 현재 시각을 맞추면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지금 뉴욕 시간은? 하고 출제자가 질문하면…….”
나 피디의 눈이 어느 한 지점으로 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크써클이 짙은 스텝하나가 손을 번쩍 들고 외쳤다.
“오전 7시 48분입니다.”
마치 짠 듯한 번개 같은 속도였다.
나 피디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웃었다.
“바로 이렇게 맞추시면 됩니다. 아, 참고로 저분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이번에 저희 스텝으로 새로 오신 이승훈 조연출인데, 초등학생 때 멘사 회원증을 발급받으셨고요. 17세에 고등학교과정을 모두 이수하고, 하버드 대학에 진학을 하여 경영학 전공과정을
밟고 오신 분입니다. 다들 하버드가 어떤 곳인지는 아시죠? 공부 잘하는 수재들만 간다는.”
애들이 눈이 요동을 치고 있다. 설마 이런 걸 게임으로 제안 할 줄은 몰랐다는 눈치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보통 예능프로그램에서 하는 게임 종목들은 퀴즈나, 노래 맞추기, 복불복, 뭐. 대충 이런 거였으니까. 장기자랑도 아니고, 나라 수도 시간 맞추기?
외우고 다닐게 없어서 뭐 저런 쓸데없는 걸 외우고 다니지? 주기율표 같은 걸 외우는 거라면 이해라도 하겠는데. 두 번째 라운드를 끝낼 때까지만 해도 우리 쪽이 다 이긴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 순식간에 역전됐다.
특히나 이승훈 조연출은 거의 뭐 올림픽에 출전해서 금메달을 따고, 시상대에 오르기 직전 선수 같다. 벌써부터 얼굴에는 뿌듯한 빛이 아른거린다.
장요한이 박진우를 툭 치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
“야, 너는 알았냐?”
“뭘?”
“뉴욕 시간. 근데 뉴욕이 미국 수도였어?”
“멍청아. 미국 수도는 워싱턴 DC고. 그리고 우리나라 시간도 모르는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나마 우리들 중 제일 브레인이라 불리는 노아를 슬쩍 살펴보니 얘도 가망이 없다. 낯빛이 어둡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팀내 중에서도 그나마 제일 잘할 것 같은 노아마저도 이러니 벌써 분위기는 거의 진거나 다름없다.
“좋아요. 대신 문제는…….”
결국 내가 나 피디의 앞으로 반발자국 내딛었다. 내 검지가 가장 귀퉁이에 밀려나 있는 우리 코디를 가리켰다.
“문제는 저분이 내는 걸로 하죠. 제작진 측에서 사전에 미리 말 맞추고 외웠을 수도 있으니까요.”
내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며 애들이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나 피디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강민씨는 자신 있나 봐요? 뭐, 좋아요. 그렇게 해요.”
< 청춘을 즐겨라 (5) > 끝
ⓒ 윤민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