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듀스 나노머신-80화 (80/124)

< 변화의 소용돌이 (5) >

오늘은 케이카운트다운 음방 녹화가 있는 날이다. 이른바 1집 앨범 활동을 마무리 짓기 위한 마무리 무대랄까. 1집 앨범을 내고, 홍보를 위해 온 이후로는 처음으로 다시 온 거다.

우리를 태운 승합차는 한참을 더 달려, 방송국 앞에 멈춰 섰다.

“다 왔다. 내려.”

차조영 실장의 말에 차문을 열고, 바닥에 발을 디디는데, 뭔가 감회가 새롭다.

처음 이곳에 올 때는 사릿눈이 내리는 겨울이었을 거다. 얇은 무대 의상 옷을 입고 돌아다니며, 추위에 덜덜 떨며 어떻게든 앨범 홍보해보겠다고 의욕만 불타고 그랬었는데.

팬들이 건네주는 따뜻한 핫팩 하나가 어찌나 그렇게 따스하던지······.

주차장을 빠져나오는 길 출연가수들을 보기 위해 포진해있는 팬들에게 인사를 하며, 우리는 스튜디오를 지나 대기실로 들어가기 위한 복도로 들어섰다.

그리고 연례행사처럼 대기실마다 돌아다니며, 출연자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인지도가 올라갔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데뷔1년차 신인아이돌이니까.

대기실에 들어갈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 축하인사가 쏟아진다.

“드라마 잘보고 있어요. 이야, 배우를 가수 대기실에서 보니 좀 기분이 희한한데?”

“처음 볼 때부터 뜰 줄 알았는데, 아주 뜨는 정도가 아니라 하늘위로 솟구쳤네. 최배우 기분이 어때요?”

최근 실검에도 몇 번씩 오르내린 탓일까 대부분 인사가 나에게 집중되어 있다.

10명중 9명이 드라마에 이야기부터 꺼낸다. 그럴 때 마다 멤버들은 꿔다놓은 보릿자루마냥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다가 다시 고개를 숙이며 나오기를 반복하고 있고.

그래도 예전에는 인사를 하러 돌아다니면 관심이 어느 정도 분산됐었는데, 지금은 아예 다른 멤버들은 유령취급이다.

그와 비슷한 일이 계속 반복되다보니, 신경이 안 쓰일 래야 안 쓰일 수가 없다. 괜히 뭔가 내가 멤버들에게 크게 잘못하고 있는 듯한 기분도 마저도 들고.

정상급 걸 그룹이나 남자 아이돌 멤버들 중에서도 연기자로서 성공을 거둔 사람이 꽤 되는데, 그들도 처음 연기를 시작했을 때 이랬을까?

누군가에게 속 시원하게 물어보고 싶다고 생각할 그때, 문득 서은채가 떠올랐다.

따지고 보면 지금의 나랑 처지가 비슷했다.

그녀도 정상급 걸그룹 출신으로 연기자로 커리어를 쌓고 있으니까.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그녀를 접한 중년이상 층들은 아마 그녀가 가수인지도 모를 거다. 그냥 배우라고만 알고 있지.

한번 물어나 볼까싶어,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다가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에이, 관두자. 우리가 진지하게 이런 거 물어보고 할 사이는 아니잖아.

가끔 톡이나 문자를 주고받고는 하지만, 말 그대로 ‘오늘 방송 잘 봤어요.’ 혹은 ‘오늘 회사 가는 날인데, 시간 맞으면 점심이나 같이 먹을래요?’ 정도다.

물론 서로 스케줄이 맞은 적이 없기에 진짜로 밥을 같이 먹은 적도 없고.

거울 앞 의자에 앉아 메이크업을 수정받고 있는데 노크소리가 들리며, 문이 스르륵 열린다.

“이번에 저희 회사에서 데뷔하는 애들이 인사드리고 싶다고 해서 찾아왔습니다. 괜찮을까요?”

누군가 벌어진 문틈사이로 이야기를 한다. 차조영 실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네. 들어오시죠. 얘들아, 후배님들이 인사하러 오셨대.”

“네.”

매일 인사만 하고 다녔지, 사실 인사를 받은 적은 몇 번 없다. 멤버들 눈들이 다들 초롱초롱 해진다. 갓 들어온 후임을 바라보는 일등병의 표정이 저러할까? 눈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뭔가 멋진 선배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가보다.

“뭐해? 괜찮아. 어서 들어와. 들어와.”

서글서글한 눈매와는 다소 고집스럽게 보이는 얼굴. 곱게 다린 흰색 와이셔츠를 입고 있는 사내가 밖을 향해 손짓을 하자, 이제 스물도 안돼 보이는 어린애들이 우르르 대기실안으로 들어온다. 좁디좁은 대기실이 금세 꽉 찼다.

가만, 저 사람 어디선가 본듯한 얼굴인데?

“안녕하세요. 이번에 데뷔하게 된 신인 블루스카이 입니다! 선배님들 잘 부탁드립니다!”

들어온 애들이 박력 있게 고개를 바닥으로 쳐 박으며 대기실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른다.

멤버들은 선배님이라는 소리에 벌써 껌뻑 넘어간 눈치다. 대기실에 있는 사탕, 초코렛을 힘내라며 건네준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서 두 매니저가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블루스카이? 오, 그룹명 좋네요. 아, 혹시 이번에 D&M에서 데뷔시키기로 한 애들이 얘넨가요?”

“네, 맞습니다. 앞으로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어휴, D&M소속인데, 회사에서 어련히 알아서 잘 해주려고요. 저희는 이제 막 데뷔한 그룹이라 앞가림하기도 바빠요.”

D&M.

그 단어를 듣고 내가 경직된 얼굴로 홱 돌렸다. 때마침 나를 보고 있는 매니저와 눈이 딱 마주쳤다. 매니저의 입 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머리스타일이 바뀌어 금방 못 알아봤지만 이제야 알겠다.

맞네. 그 사람. D&M의 그 오실장.

나 회사에서 쫓아낸 그 사람.

*

나는 그제야 찬찬히 들어온 다섯 명의 얼굴을 뜯어봤다. 들어온 다섯 명중 셋은 아는 얼굴이다. 물론 그들은 나를 여기서 처음 봤겠지만.

D&M엔터테인먼트에서는 연습생들을 상대로 하는 시즌 평가제가 있는데, 성적이 나오면 연습실 문 앞에 벽보 붙이듯 붙여놓곤 했다. 당연히 실력 좋은 연습생들은 못하는 이들 사이에서 소문이 날 수밖에.

셋 다 순위를 다투던 애들이라 기억한다.

애들 중 한명이 쭈뼛거리더니 내 앞으로 다가왔다.

“선배님 말씀 많이 들었어요. 원래는 저희 회사 소속 선배님이셨다고.”

나를 쳐다보는 녀석의 눈빛이 초롱초롱하다. 그때 내가 D&M 연습생이었던 시절, A반 애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저랬을 거다. 존경, 선망, 흠모. 뭐, 그런 복합적인 감정들이 엿보인다.

헌데, 이게 기분이 조금 묘하다.

만약 내가 플레어란 이름, 혹은 최강민이란 이름으로 이만큼 성공을 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저런 눈으로 나를 쳐다볼까? 뭐, 엄밀히 따지면 성공하지 못했다면 이렇게 인사를 받을 일도 없겠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D&M에 대한 내 감정이 곱지만은 않은가보다. 거기서 데뷔했다는 그룹에게조차 선입견이 생긴걸 보면.

“그래? 무슨 소리를 들었는데?”

최대한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걸 친절함으로 받아들였는지 애가 화색이 돼서 대답했다.

“어쩌면 저희랑 같은 그룹이 될뻔 했을지도 모른다고 하셨어요!”

“누가? 저기 계신 실장님이?”

나도 모르게 말투에 독기가 조금 삐져나왔나보다. 내 말을 들은 애 옆으로 다가와 옆구리를 푹 찌른다.

“야, 뭐 하러 그런 이야기를 해?”

“뭐, 어때? 연습생들은 다 아는 이야긴데.”

오실장 저 인간.

대체 나에 대해서 뭐라고 떠들고 다니는 거야?

뒤늦게 우리의 반응을 확인한 녀석이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늦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멤버 얼굴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특히나 노아는 충격을 바가지로 퍼먹은 얼굴이다.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연신 삐그덕거린다.

저 작은 머릿속에 들어있을 생각이 빤했다. 내가 만약 없었다면 김승우와 함께 데뷔를 했을 텐데, 그러면 지금 어떻게 됐을까 상상을 하고 있겠지.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김승우한테 매일 구박을 받던 게 노아였으니까.

처음에 나는 둘을 보고, 무슨 콩쥐팥쥐를 보는 줄 알았다. 하도 일방적으로 지랄을 해대길래.

김승우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아직은 멤버들 머릿속에 그 잔재가 남아 있는 모양이다.

“그러면 또 뵙겠습니다.”

우리 대기실에 폭탄을 던져놓은 블루스카이 멤버들이 밝고, 우렁차게 소리치며 퇴장했다.

애들은 나간 지 한참이 흘렀지만, 여전히 공기의 흐름은 멈춘 듯 고요하고, 적막했다. 멤버들은 이따금씩 고개를 들어 나를 한 번씩 쳐다봤다. 마치 놀이터에서 흙 퍼먹고 놀던 애들이 엄마가 주변에 잘 있나 한 번씩 확인하는 것처럼. 그 시선들이 선명하

게 느껴진다.

근데 이게 기분이 좀 묘했다.

내가 그만큼 멤버들에게 소중한 존재가 됐나 싶기도 하고, 또 그걸 생각하자니 마음이 간질간질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저 오실장한테 고마운 마음도 있다. 만약 그때 카페에서 내가 기회를 한 번 더 달라고 했을 때, 나에게 한 번 더 기회가 주어졌자면, 내 인생은 지금쯤 어떻게 변했을까?

영삼이를 이용해서 좋은 성적을 내고, A반으로 들어갔다면 어쩌면··· 나도 저 블루스카이 팀원이 되어 오실장과 함께 대기실을 돌아다니고 있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조금은 끔찍했다.

대기실에 앉아 있는 멤버들을 차례로 훑었다. 이렇게 좋고, 착한 애들을 내버려두고, 방금 걔네들이랑 팀을?

그건 내 쪽에서도 사양이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안되겠다. 정신이 피폐해지고 있어.

기분 전환이라도 좀 해야겠다.

*

“최강민. 아니, 이제는 최강민씨라고 불러야하나?”

화장실에 들렀다가 나오는데, 등 뒤로 거슬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조금 전 대기실에 찾아왔던 오실장이 서 있다.

뭐야, 이 양반이 또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려고 찾아온 거지?

“어어, 너무 그렇게 째려보지 말라고. 나라고 뭐, 좋아서 그랬겠어? 너 내보내고 나도 사장님한테 욕 무지하게 먹었다고.”

그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다가왔다.

“근데, 그때는 어쩔 수밖에 없었다고. 너도 이 생활 오래했으니 잘 알거 아니야. 원래 이곳이 좀 그렇잖아. 그리고 너로서도 잘된 거 아니야? D&M에서 나가고 그렇게 잘됐으니까. 그냥 거기가 너랑 터가 안 맞아서 그랬나보다 생각하면 서로 편하고 좋잖

아.”

더럽지. 더러운 곳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그런 식의 일처리는 아니지.

무려 4년하고도 8개월 동안 그곳 연습생으로 있었는데, 소속 배우 한마디에 그런 식으로 방출을 해?

아직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이가 갈린다. 자연히 나오는 말도 곱지 않았다.

“왜요. 저한테 하실 말이라도 있어요?”

“이야기는 무슨. 그냥 반가워서 따로 인사나 할까 그런 거지. 한준혁이 크게 사고치는 바람에 나도 담당이 바뀌었거든. 아까 걔네들로. 앞으로 종종 보게 될지도 몰라.”

그건 나도 뉴스로 봤다.

한준혁이 음주운전으로 기소돼 연예계에서 거의 매장당하다시피 된 거.

듣기로는 광고 회사에서 제품이미지 손해배상명목으로 손해 배상금을 꽤나 청구한 걸로 알고 있는데, 돈도 돈이지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째 음주운전이라면 배우로서 이미지는 아예 끝장난 셈이다.

“아참, 혹시 강예슬이랑은 연락하고 지내? 걔 이번에 케이블 드라마 들어갔잖아. 비중은 별로 없는 역이지만 뭐, 일단은 얼굴을 알리는 게 중요하니까. 걔 점점 더 예뻐지더라. 운동도 열심이고.”

왜 그런 소리를 나한테 하는 건데? 꼴 보기 싫은 얼굴이 눈앞에 있고, 그 짧은 시간에 듣기 싫은 이름이 두 개나 튀어나왔다.

혹시 오늘이 무슨 액땜 데이. 뭐 그런 날인가?

그냥 이 사람하고는 엮이지 않은 게 상책이란 생각에 내가 말을 싹둑 잘랐다.

“궁금하지도 않고, 듣고 싶지도 않네요.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인데요?”

“아니, 내 말은. 그냥 과거의 앙금은 털어버리고 서로 잘해보자고. 이 바닥 좁은 거 잘 알잖아. 간혹 만나는 기자들 중에 네 이야기 궁금해 하는 기자들도 있던데, 내가 괜히 술이라도 먹고 네 전 여친 이야기라도 흘리지도 모르잖아? 안 그래?”

이 양반이 진짜 보자보자 하니까.

“하세요. 그러면 저도 그런 식으로 방출된 거 말하고 다닐 테니까. 저야 데뷔전에 있었던 일이라서 뭐 별일 없겠지만 실장님은 제가 피해자 코스프레 하기 시작하면, 그거 다 감당할 수 있으시겠어요?”

“이야. 얘가 이젠 아주 연예인이 다됐네. 나는 그냥······.”

“왜!? 강민아 무슨 일 있어?”

누군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차조영 실장이 눈을 부라린 채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시죠?”

“아닙니다. 그저 옛 얼굴 보니 반가워서······.”

차조영 실장의 말에 오실장이 어깨를 으쓱거린다.

“아, 난 또. 말소리가 커지기에 무슨 일인가 싶어서요. 더 하실 말없으시면 강민이랑 가도 되겠죠? 얘들이 오늘 안무 동선 맞춰볼 게 있다고 해서요.”

“아, 네. 그러시죠.”

내게로 얼굴을 돌린 차조영 실장이 내 어깨를 잡아당겼다.

“가자. 강민아.”

오 실장이 시야에서 멀어지자 차조영 실장이 뒤를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맞지? 네가 전에 말한 그 사람.”

“네.”

“어쩐지. 왠지 느낌이 좀 안 좋더라니.”

인상을 찌푸리며, 턱을 문지른 차조영 실장이 나를 보며 말했다.

“앞으로는 저 사람이랑 안 마주치게 내가 알아서 걷어낼게. 저런 새끼는 상종할 값어치가 없으니까.”

그래.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이런 좋은 사람들이랑 일을 할 수 있게 된 게.

“네.”

내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

[출국 2시간 전]

knet방송국 주차장.

“네, 실장님. 지금 녹화 끝나고 나오신다고요? 네네, 시동걸어놓고 있겠습니다.”

핸드폰 통화를 종료한 차태수 매니저가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급히 손짓 했다.

“지금 음방 끝났대요. 빨리 철수하셔야겠어요.”

그 말에 승합차 안에 카메라를 덕지덕지 매단 촬영 팀이 급히 차에서 내려 옆 차로 옮겨 탔다.

그들 중 한 명이 차태수 매니저에게 말했다.

“카메라는 돌려놨으니, 무사히 공항까지만 떨궈 주세요. 그 뒤부터는 저희가 알아서 할게요.”

“네네. 알겠습니다. 나 피디님. 아무튼 저희 애들 잘 좀 부탁드립니다.”

“부탁은요 무슨. 저희가 해야 할 말이죠. 아무튼 너무 걱정 마세요. 안전하고, 재밌게 찍자는 게 저희 모토니까. 아참, 여권요. 멤버들 여권은 다 가지고 오셨죠?”

“네, 여기요.”

차태수 매니저가 기다렸다는 듯이 여권 다섯 개를 나 피디에게 건네줬다.

여권을 건네받은 나 피디가 씨익 웃었다.

“걱정 마세요. 아주 재미있을 테니까요.”

< 변화의 소용돌이 (5) > 끝

ⓒ 윤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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