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화의 소용돌이 (1) >
뒤 후리기가 정확하게 녀석의 가슴팍에 들어갔다.
퍽 소리가 났다. 이우빈의 몸이 움찔거리더니, 들판 위에 꽂아놓은 허수아비마냥 그대로 천천히 바닥위로 넘어갔다. 그걸 본 여자스텝 한 명이 짧게 소리쳤다.
“어머. 이우빈씨!”
볼썽사납게 바닥을 구른 녀석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사실은 돌려차기로 얼굴을 가격하려다가··· 혹시 문제가 생길까봐 봐준 거다. 마음 같아서는 진짜 확 패주고 싶었지만.
내가 다가가 이우빈에게 손을 내밀었다.
“미안합니다. 이우빈씨. 제가 다음 씬과 착각해서 그만······.”
“뭐요?”
녀석이 어이없어 하는 게 보인다. 그게 그만 내 성질을 돋았다. 일으켜주는 척하면서 가까이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힘자랑하는 고딩도 아니고, 그쯤 하세요.”
“······뭐?”
녀석의 눈이 커졌다.
“그쯤하시라고. 카메라도 돌아가고, 보는 눈도 많은데 공개적으로 망신당하고 싶지 않으면. 싸움이 하고 싶으면 끝난 후 조용히 찾아오시고, 망신당하고 싶으면 지금처럼만 하세요. 아주 개망신시켜 드릴 테니까.”
비틀린 입술을 깨무는가 싶더니, 녀석의 면상이 일그러진다. 사람 인상 쓰는 걸 보고, 이렇게 통쾌할 수도 있다니.
헌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몰려든 사람들을 보고 이우빈이 엉덩이를 툭툭 털며 태연한척 일어났다.
“뭐, 촬영하다가 보면 그럴 수도 있죠. 어휴, 발차기가 제대로네. 강민씨 태권도 좀 했나 봐요?”
그러면서 친근한 척 내 어깨에 손을 올린다. 다분히 주변을 의식한 행동이다.
누가 연기자 아니랄까봐 아주 연기를 하고 있네.
“괜찮아요. 오빠?”
“우빈아 괜찮아?”
“됐어, 됐어. 그냥 넘어진 것뿐이야. 왜들 호들갑이야?”
괜찮냐고 다친데 없냐고 달라붙는 자신의 매니저와 코디를 향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잠깐 동안 촬영이 중지됐다. 슬쩍 보니 차조영 실장이 이우빈 매니저와 둘이서 뭔가 이야기 중이었다. 뭔 이야기를 하나 싶어서 기다리고 있는데, 나를 힐끔 쳐다본 차조영 실장이 이야기를 다 끝냈는지 상대에게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게 다가와 물었다.
“괜찮아?”
“저야 뭐, 괜찮죠. 그런데 뭐에요. 방금 그 일 때문에 혹시 문제라도 생기는 거예요?”
차조영 실장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니야. 혹시 뒷말 나올까봐 내가 확실히 못 박아뒀어. 배우가 저러면 회사에서 단속해야 하는데, 저쪽도 양아치 기질이 다분한 회사라······. 내가 알아듣기 좋게 잘 이야기 해 놨으니까 걱정 마. 그나저나 왜 말 안했어? 통화할 일이 있어서 잠깐 차에 가 있었는데, 코디 말 들으니 가관도 아니었다고 하던데.”
“별거 아니에요.”
내 말에 혀를 내찬 차조영 실장이 소매를 걷어 붙였다.
“아니, 그런데 상황이 그러면 감독이 알아서 자르고, 들어가야지. 이 양반이 진짜 보자보자 하니까 남의 귀한 배우를 막······.”
“됐어요. 저도 딱히 잘한 건 없는 것 같으니.”
그 사이 김준호, 장선화가 다가왔다. 장선화의 얼굴이 마치 한참동안 변비로 고생하다가 쾌변을 하고 나온 표정이다.
“어휴, 잘했네. 내가 다 속이 시원하네.”
“네가 왜?”
유난히 통쾌해하는 장선화의 말에 김준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요즘 쟤한테 밤마다 전화오거든. 대본 한 번 맞춰보자는 둥, 술 한 잔 하자는 둥, 아주 귀찮아 죽겠다니까?”
“진짜? 어휴, 저 새끼 쓰레기네. 어떻게 한번 비벼보려고 수작부리는 거잖아. 너 쟤가 불러도 절대 나가지 마라. 가뜩이나 이우빈 이 바닥에서는 여자문제로 말 많은 놈이니까.”
“내가 빙시냐? 부른다고 쪼르르 나가게?”
김준호가 계속해서 혀를 내찼다.
“하여간 남자새끼가 할 짓이 없어서······. 자고로 남자라면 나처럼 묵직하고, 무게감도 좀 있고 그래야지. 안 그래?”
동의를 구한다는 김준호의 표정에 장선화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변한다.
“이건 또 무슨 참신한 헛소리래? 네가 묵직하고, 무게감? 하. 올해 들었던 소리중 제일 개소리다.”
아주 몹쓸 소리를 들었다는 표정으로 장선화가 손을 내저으며 사라졌다.
아무튼 촬영이 다시 시작되고, 이우빈의 태도가 조금 바뀌었다. 고삐 없는 야생마에서 고삐채운 야생마가 됐달까?
여전히 거친 느낌은 있지만 연기도 대본대로 나와 있는 대로만 했다. 촬영 분위기가 조금 불편해지긴 했지만 그건 나뿐만이 아니라 상대도 마찬가지로 느끼고 있을 테니까 별 상관은 없는 것 같고.
이대로만 순탄하게 흘러가자. 제발 좀.
*
소년소녀가장 돕기 합동 콘서트가 있는 날.
문천 주 경기장 주차장으로 진입하고 있는 도중 차안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게 전부다. 전부 우리 공연을 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이에요?”
차창너머로 새까맣게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며, 장요한이 호들갑을 떨었다. 얼핏 봐도 수천 명은 그냥 훌쩍 뛰어넘는 규모다.
행사장이나 음악 방송. 쇼케이스 무대를 할 때도 제법 많은 관객들을 봤지만, 지금과는 비교가 안됐다. 스케일 자체가 틀렸다.
그 말에 박진우가 창문 쪽으로 얼굴을 기울이더니, 밖의 동태를 살피며 말했다.
“멍청아. 설마 그렇겠냐!? 오늘 출연팀들 못 봤어? 뉴 보이스 컴백했잖아.”
“아, 난 또.”
장요한이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다.
뉴 보이스는 데뷔 6년차인 보이그룹으로 일본, 중국, 대만 쪽에서도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는 한류 열풍의 중심에 서 있는 팀이다. 이번에 중국투어를 끝마치고, 새 앨범을 가지고 컴백을 했는데, 컴백무대는 음방에서 이미 했고, 두 번째 무대를 바로 이곳에서 하는 모양이다.
팬들이 손수 만든 것으로 보이는 플랜 카드에는 뉴 보이스 컴백 환영이라 쓰여 있는 게 가장 많았다. 아니, 거의 대부분이다.
“오늘 티켓은 얼마나 팔렸대요?”
“8천장 판매했는데, 하루 만에 매진됐네. 팬들이 티켓 더 팔라고 다들 난리라더라.”
김태현의 질문에 운전석에 앉아 있던 차조영 실장이 백미러를 쳐다보며 말했다.
“8천명······.”
다들 꿈꾸듯 눈이 몽롱해진다.
“뭘 그 정도가지고 놀라? 뉴 보이스 이번에 중국투어돌 때 하루 콘서트 보러 온 사람들이 2,3만 명씩은 된다던데.”
이젠 놀라다 못해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다.
공짜도 아니고, 그 많은 사람들이 티켓을 구매해서 온다니 쉬이 믿을 수 없는 모양이다.
“너희도 곧 그렇게 될 거야. 대표님이 이번에 너희 2집 반응 괜찮으면, 바로 중국쪽 에이전시 알아보신다고 하시더라. 중국 진출? 그거 금방이야.”
그런데, 그렇게 많은 티켓이 판매됐는데, 우리 팬들은 어디로 숨었는지 머리털도 안 보인다. 처음에는 장요한 한 명이었지만, 차창으로 붙은 인원이 한명 더 늘었다. 어느새 노아도 창문에 달라붙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다.
우리 팬들이 얼마나 와 있나 확인해보려는 것 같은데······. 어찌된 영문인지 어디에도 플레어라고 쓰여 있는 문구는 찾아보기도 힘들다.
애들이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창문에서 떨어졌다. 다들 말이 없다.
그래도 이젠 인지도도 많이 늘었고, 드라마도 찍고 해서 팬들이 꽤 늘어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아니면 서울에서 하는 콘서트가 아니라 팬들이 오지 않은 건가?
애들이 심정을 파악했는지, 차조영 실장이 다시 말을 걸어왔다.
“애들아. 일단 오늘 공연에 집중하자고. 뉴 보이스? 너희보다 조금 앞서 나가고 있을 뿐이야. 이번에 강민이 드라마 성공적으로 끝나고, 2집 준비 잘되면 아마 저 팬들 중 절반은 너희 팬이 되어있을 걸? 그리고 사실 너희들 인지도도 그렇게 낮진 않아. 저기 봐봐.”
승합차가 코너를 돌자 뭔가를 발견했는지 차조영 실장이 피식 하고 웃었다.
뭔가 싶어 봤더니, 한쪽 벽면 아래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반짝이는 작은 붉은 빛이 중간 중간에 점등됐다가 꺼지기를 반복한다. 거기에는 플레어라고 큼지막하게 쓰여 있는 대형 플랜카드가 있고, 그 아래는 플레어를 사랑하는 코로나. 라는 깨알 같은 문구가 박혀 있었다.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거의 동시에 멤버들이 짙게 썬팅 되어 있는 유리창에 다닥다닥 달라붙었다.
“우와아!!! 저게 다 몇 명이야?”
한눈에 헤아리기도 힘든 많은 인원. 족히, 수백 명은 되어 보인다.
코로나 팬 회원들이었다.
우리 차량을 발견한 팬들이 웃으면서 들고 있는 붉은색 불빛을 밝혀준다. 마치 힘내라고 용기를 돋궈주는 것처럼. 수백 개의 붉은 빛에 노출된 멤버들의 눈이 금세 그렁그렁해졌다. 특히나 감정기복이 심한 장요한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다.
감동은 잠깐이었지만 여운은 길었다.
몽롱한 표정으로 잠시 앉아 있던 멤버들의 눈이 잘 닦아놓은 구슬 마냥 반짝거린다.
“저 오늘 진짜 열심히 할 거예요!”
“나도 나도. 절대 안 질 거야.”
하루하루 가득 찬 스케줄 소화해내느라 피곤할 법도 한데, 역시나 팬들이 주는 버프효과는 늘 그렇듯 기대이상이다.
모처럼 멤버들의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의욕도 활활 불태우고 있고.
그 열기로 인해 승합차 안의 공기가 뜨겁다 못해 후끈후끈하다.
“안 지기는 무슨. 어디 전쟁터라도 나가?”
나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 열기에 동화됐는지 나도 모르게 운동화 끈을 새로 묶고, 의상을 체크하고 있다.
어디 누구든 덤벼보라고. 다 부셔버릴 테니까!
드르륵. 이내 정차한 차문이 열리고, 우리는 오늘의 격전지로 한발을 성큼 내딛었다.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요즘에 이분들 모르면 우리나라사람이 아니죠. 플레어를 모시겠습니다!!!”
잠시 후, MC의 소개와 함께 관객들의 함성에 귀가 먹먹해졌다.
*
드디어,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은 꽃미남 학교의 첫방 날이 다가왔다.
숙소 거실에는 맥주와 캔 음료수. 안주거리가 될 만한 과자 등을 늘어놓고, 모처럼만에 멤버들이 함께 모였다.
방송 10분 전.
“어휴, 왜 내가 다 떨리냐.”
김태현이 캔맥주를 홀짝거리며, 티비 속에서 흘러나오는 광고들을 보고 있다.
인터넷 중독자 장요한은 노트북을 탁자위에 펼쳐놓고, 인터넷 반응을 체크중이고.
노아는 옆에서 학교에서 숙제를 내줬다며, 숙제와 티비 보기를 병행하고 있다. 정말로 놀랄만한 집중력이다.
처음에는 전학을 가서 혹시 적응을 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는데, 간간히 선물 보따리를 들고 오거나, 형들 사인을 해달라고 조르는 걸 보면, 다행히 학교생활은 잘 적응해나가고 있나보다.
하긴, 그러고 보면 노아 저 녀석이 누구 미움 살 스타일은 아니지.
옆을 힐끔 보자 장요한이 노트북에 창을 참 많이도 띄워 놨다.
꽃미남 학교 게시판, 각종 커뮤니티 연예란, 팬 카페등.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모든 글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각오다.
아직 방송은 시작도 안했지만, 게시판은 글들이 순식간에 휙휙 올라가고 있다.
-드디어 하네요. 오늘 첫 방 보려고 야근도 째고 왔음.
-전 아직도 퇴근 못해서 사무실에서 핸드폰을 보고 있음. 으아, 어서 시작해라!
-저도 드라마 같은 거 원래 잘 안 보는데, 오밤친 봤는데 세 명 케미가 워낙 좋아서요. 완전 기대 중. 아, 그런데 최강민 연기 진짜 잘할까요? 아직도 논란 좀 있던 거 같은데.
-사실 오늘 포커스는 최강민 연기 아니에요? 연기를 잘할지 못할지?
-보면 알겠죠. 아, 이제 시작하네요.
< 변화의 소용돌이 (1) > 끝
ⓒ 윤민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