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맥이 좋으시네요 (5) >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여태껏 해놓은 말이 있는데, 그렇게 말을 하면 나는 어떻게 반응을 하라는 거지?
아니나 다를까 주위에서 다들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
뭔가 꿍꿍이가 있어서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냐는 뭐 그런 눈초리로 쳐다보는데, 특히나 오달민, 김강현은 나를 아주 나라를 팔아먹은 대역죄인 보듯 하고 있다.
“아, 그게 아니라요······.”
서은채도 자신이 잘못 말한 것을 깨달았는지, 황급히 말을 바꾼다.
“친하게 지내고 싶은 연예인이라고요. 제가 플레어 팬이거든요.”
“아··· 난 또.”
MC김경규가 끼어들었다.
“그러면 여기 아주 잘 오신 거예요. 녹화 같이 하실 거죠?”
“어··· 해야죠.”
잠시 고민한 듯한 서은채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었다.
“잠깐만요. 그런데 실장님한테 전화 한통화만 해도 될까요?”
“네, 그러세요.”
장선화가 최강민의 옆에 앉은 사이, 양해를 구한 서은채가 한쪽 구석으로 가 최형식 실장에게 발을 동동 구르며 전화를 걸었다.
“오빠, 왜 이렇게 안와요!?”
-어, 은채야. 나 지금 편의점 가는 길인데. 왜?
“큰일 났어요. 지금 편의점이 문제가 아니에요. 빨리 와요. 빨리!”
-왜? 무슨 일인데? 보낼 땐 언제고, 왜 빨리 오라는 건데?
“저 예능 찍을지도 몰라요. 지금요. 아우, 어뜩하지. 나 갑자기 긴장해서 토할 것 같아요.”
-어어?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차근차근 이야기 해봐. 예능 나가고 싶다는 거야? 갑자기 이 밤중에 웬 예능?
“오밤친. 여기 커피숍에서 오밤친 촬영 중인데요······ 아무튼, 차에 우황청심환 갖고 빨리 와요. 나 벌써부터 미식거리고, 토할 거 같아요. 꼭 임산부 된 기분이야. 웩.”
그 말을 들은 차형식 실장이 펄쩍 뛰고 난리 났다.
-야, 야! 행여나 누가 듣는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아무튼 가서 이야기해.
*
양옆에 내놓으라하는 대표미녀 두 명이 나를 보며 생긋거리고 있다.
좌은채 우선화라니.
무슨 삼국지 무쌍 찍는 것도 아니고. 이건 필시 꿈일 거야.
서은채와 장선화가 간헐적으로 눈을 마주칠 때마다 입가가 미소를 짓는데, 마치 꼭 누가 숨어서 웃음 스위치를 누르는 것 같다. 아니면 서로 짜기라도 했나? 서로 눈 마주치면 웃는 걸로?
그런데 분명 웃는 얼굴들인데, 나는 그게 왜 이렇게 무섭게 느껴지는 건지 모르겠다.
아직 본격적인 녹화를 시작도 안했는데, 벌써부터 기 빨리는 기분.
누구든지 좋으니까 제발 나 좀 살려줘······.
“누가 들어오십니다.”
스텝의 말에 시선이 CCTV화면으로 향했다. 말 그대로 누군가 계단을 밟으며 내려오고 있었다.
가죽 재킷에 청바지를 입은 훤칠한 키의 소유자.
오달민, 김강현의 친구는 이미 들어와서 앉아있으니 남은 사람은 김준호 밖에 없다.
아니나 다를까 문이 열리고, 나를 구해줄 김준호가 환한 미소와 함께 등장했다.
진짜 뻥이 아니라 드라마 촬영장에서 보는 것보다 백배는 반갑다.
저 얼굴이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김준호가 MC와 게스트들과 짤막하게 인사를 하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내가 얼른 뛰어가 김준호를 맞이했다. 그가 귓가에 대고 소곤거린다.
“생각보다 차가 더 막혀서 늦었어요. 와, 그런데 진짜 서은채씨도 와 있네요?”
그러고는 엄청나게 반가운 목소리로 서은채와 악수했다.
누가 보면 내 절친이 아니라 서은채 절친으로 온 줄 알겠다. 서은채와 나누는 한마디 한마디에 아주 웃음꽃이 핀다. 장선화 같은 연기 웃음이 아니라 진짜 웃음.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장선화가 눈 꼬리를 치켜뜨며 작게 소곤거렸다.
“나는 안보이냐? 나한테는 왜 인사 안 하는 건데?”
“······어, 왔냐?”
고저 없는 목소리. 시선도 주지 않고, 대충 대답한 김준호가 홱 지나간다.
“이게, 진짜!”
카메라만 없었다면 틀림없이 장선화가 한바탕 쏘아붙였을 거다. 자리에 앉은 김준호가 약 올리듯 턱을 내밀며, ‘뭐, 뭐.’그러고 있다. 싸우는걸 보니 탑 스타가 아니라, 탑 초딩이다. 아니지, 요즘에는 초딩들도 저렇게는 안 싸운다.
이제는 하도 촬영장에서 둘이 저러고 있는 모습을 봤더니 그냥 일상 같다. 저러고도 진짜 크게 싸운 적이 없는 게 신기할 뿐이지.
배우들의 일상 이야기, 그리고 찍고 있는 작품이야기도 살짝 언급해주고, 초청되어온 다른 게스트의 개인기도 보고.
녹화는 순조롭게 이어졌다.
김강현이 부른 연극배우 윤현이 예능은 처음이라며, 입도 떼지 못하고 있는 것과, 개그맨 오달수가 부른 김정수가 누가 절친 아니랄까봐 한파를 몰고 오는 계속된 이상한 개그를 치는 것만 빼면.
그럴 때면 여지없이 MC김경규가 우리 쪽을 보며, 말을 걸어온다. 편집점을 우리를 쳐다보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걸로 잡은 모양이다.
잠깐 동안의 휴식이 이어지고, 녹화가 또 다시 진행 됐다.
“자, 이제 주변잡기 끝났으니 본격적인 코너로 넘어가도록 할까요? 이름 하여 절친 테스트!”
절친 테스트? 그런 코너도 있었나?
모니터링 하면서는 그런 코너 본적 없는 거 같은데?
MC임현경이 게스트들을 돌아보며 코너에 대해 설명을 해준다.
“오늘부터 새로 마련된 코너에요. 절친이라면 상대의 취향, 좋아하는 음식등 기본적인 건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조금 있다가 나랑 궁합이 얼마나 잘 맞나 보는 그런 테스트도 할 거니까 기대하셔도 좋아요.”
MC김경규가 말을 받는다.
“그냥 하면 재미없으니까 상품도 걸어야겠죠? 상품은 한우세트! 무려 투 플러스짜리예요. 좀 전에 제작진에서 사오는 거 봤거든요. 이거 아무래도 서은채씨 겨냥하고 사온 냄새가 팍팍 나는 거 같은데, 서은채씨 이길 자신 있습니까?”
“음, 열심히 해볼게요!”
MC김경규의 질문에 서은채가 앙증맞은 주먹을 움켜쥐며, 의지를 불태운다.
불태우고 있는 건 다른 쪽도 마찬가지다.
옆에 앉은 오달수민과 김정수는 벌써부터 이런저런 것들을 물어가며, 예상 질문을 뽑고 있다.
다른 거라면 몰라도 한 가지는 확실한 건 알겠다. 우린 망했다.
눈앞이 벌써부터 캄캄하네.
사석에서 밥 한번 먹어본 적 없는 인맥인데, 서로에 대해서 알기는 뭘 알아······.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옆을 힐끔 쳐다봤는데, 서은채는 눈동자를 열심히 굴리며, 뭔가를 열심히 웅얼거리고 있고, 장선화는 별다른 긴장감 없이 카메라 진짜 많다면서 놀라고 있다. 하긴 드라마를 찍을 때야 기껏해야 카메라 3, 4대 붙는 게 전분데 신기하기도 하겠지.
김준호는 지금 상황과 상관없이 느긋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여유로워 보인다.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다른 팀들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아, 우리 팀도 불태우고 있는 사람이 있긴 하지. 한 명.
MC가 그걸 지적하면서 묻자 김준호가 아주 당당하고, 자신 있게 말했다.
“남자가 남자에 대해서 너무 잘 아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요? 안 그래요?”
그 말에 모든 남자 출연자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그것도 그러네.
이윽고 시작 구호와 함께 문제가 시작됐다.
MC가 문제를 내고 가장 많이 맞추는 팀이 한우를 가지고 가는 그런 형식이다. MC김경규가 외친다.
“내 절친의 생일을 알고 있는 사람?”
“저요! 저! 8월 10일!”
다른 게스트들도 손을 들었지만 서은채가 가장 빨랐다.
MC가 답안지를 보고, 정답을 확인한다.
“맞았어요. 최강민씨의 생일은 8월 10일입니다. 그러면 내 절친의 혈액형은?”
누군가 또 손을 번쩍 든다.
역시나 서은채다.
“A형!”
여기저기에서 인간형, 호감형등 손발을 오그라들게 만드는 정답들이 나온다. 김경규가 모조리 다 편집시킬 거라면서 으름장을 놓았다.
“내 절친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갈비탕.”
“가장 최근에 다녀온 나라는?”
“일본!”
“가족 관계는?”
“부모님, 형, 형수님, 조카한명!”
서은채의 독주다.
아예 카메라들이 서은채만 찍고 있고, MC도 질문과 동시에 서은채가 손을 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김경규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최강민씨 사석에서 만난 건 오늘이 처음 아니에요? 그런데 너무 잘 알고 있는데? 혹시 뒷조사하고 다녔어요?”
“아······.”
그제야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해 있는 걸 깨달았는지, 뺨이 붉게 달아오른다.
그녀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 전부, 팬 페이지에 나와 있는 것들이에요. 제가 플레어 팬이라······.”
“아, 맞다. 서은채씨 플레어 팬이라고 하셨지. 그런데 이건 팬 수준이 아닌데요? 혹시 같은 회사라고 막 스토커하고 그러시면 안돼요. 그건 범죄예요. 혹시 이미 하고 있는 건 아니죠?”
김경규의 짓궂은 농담에 서은채가 자라처럼 목을 움츠린다.
“······아니에요.”
“농담이에요. 농담. 자, 그러면 또 문제 나갑니다.”
그 뒤로도 문제가 몇 개 더 이어졌지만, 문제가 나오면 자연스럽게 전부 서은채에게로 시선이 간다. 게스트들도 이제는 문제를 맞히려기 보단 서은채가 이것을 알까 모를까하는 게 더 궁금해 했다.
그런데 나는 이 의외의 사태에 대해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팬이라는 소리는 저번에 얼핏 듣기는 했는데, 이 정도로 나에게 관심이 있었나?
“서은채씨 그냥 손들고 있어요. 우리는 안 맞힐 테니까.”
“지금 6연속 정답인거 알아요?”
다른 게스트들도 이 코너를 살리려면 서은채한테 몰빵해줘야 한다는 걸 느꼈는지, 문제를 맞히기보다는 서은채와 엮은 멘트만을 날렸다.
“자, 문제 또 나갑니다! 이건 내 생각을 말해주면 됩니다. 내 절친의 신체부위 중 가장 멋있다고 생각하는 부위는 어디입니까?”
웬일인지 서은채가 우물쭈물하고 있다.
그 틈을 이용해 장선화가 손을 번쩍 들었다.
“오, 장선화씨! 정답은!?”
“복근?”
“복근이요? 최강민씨한테 복근이 있어요?”
“저번에 탈의할 때 보니까 운동을 열심히 했는지, 복근이 있더라고요.”
“오, 복근까지 본 사이! 설마 사석에서 둘이 몰래 만나서 본건 아니죠?”
MC의 짓궂은 농담에 장선화가 고개까지 젖히면서 웃는다. 서은채와는 달리 여유가 흘러넘치는 모습이다. 어깨까지 늘어트린 체인귀걸이가 짤랑거리다가 멈춘다. 장선화가 반대편으로 머리카락으로 쓸어내리며, 대답했다.
“에이, 설마요. 드라마 촬영 중에 수영장씬이 있어서 봤어요.”
“거기에 장선화씨도 설마 수영복 차림으로 나오는 겁니까?”
장선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수영장인데, 저도 비키니를 입었죠. 궁금하신 분들은 꼭 드라마 챙겨 보세요. 저 운동 열심히 했거든요."
장선와의 말에 남자 출연자들이 열띤 호응과 함께 꼭 본방 사수하겠다는 공수표를 마구 날렸다.
앉아 있던 김준호가 입술도 달싹거리지 않은 채 복화술 하는 것처럼 말했다.
“누가 네 몸매 관심이나 갖는 대? 볼 것 하나 없더만.”
“좀 닥쳐줄래? 그래도 너보다는 낫거든?”
“네가 내 몸매를 보기나 했냐?”
“그걸 꼭 봐야지만 아냐?”
그러더니 서은채가 김준호의 몸매를 눈으로 슥 훑더니, 하체를 보고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린다.
김준호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상체를 기울여 묻는다.
“저 지금 성희롱 당한 거예요?”
“어, 글쎄요.”
“설마 최강민씨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저 남자로서 꽤 괜찮은 편이거든요?”
그러더니 둘이 한참동안이나 또 티격태격한다.
*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PD가 메인작가에게 물었다.
“그림 꽤 괜찮게 나올 것 같지?”
“괜찮은 정도가 아니죠. 특히 질문 코너는 빵 터졌어요. 서은채씨가 그동안 약간 새침때기 이미지가 있었는데, 이 코너로 이미지 좀 변할 거 같은데요? 장선화씨도 서은채씨랑 같이 라이벌구도처럼 잡아서 편집시켜놓으면, 관심 좀 끌 것 같고. 김준호씨야 앉아만 있는 걸로도 충분하니 뭐. 오히려 김준호씨는 말 안하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게 더 나을지도 몰라요. 그런 걸 다 떠나서 일단 그림이 예술이잖아요. 그냥 넷다 말 안하고 가만히만 있어도 시청률 팍팍 오를걸요?”
“그렇지?”
“그리고 떡밥도 장난이 아니잖아요. 홍보용으로 쓸 기사도 많고. 아마 시청자들이 그거 보면 궁금해서는 안보고 못 견딜걸요?”
메인 작가가 연신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역대 시청률 찍을지도 몰라요. 국장님이 이거 알면 엄청 좋아하시겠네.”
턱을 매만지던 PD가 물었다.
“꽃미남 학교. 드라마 첫방 언제 한다고 그랬지?”
“어, 다음달 9일일 걸요?”
“음, 그러면 이거 방송 나간 다음이네?”
“그렇죠. 벌써부터 꽃 미남 학교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대요. 거기 연출부에 아는 사람이 있는데, 최소한 중박 이상은 칠 것 같던 분위기라던데요?”
“그 정도래?”
“네, 만약 꽃 미남 학교 대박나면, 저희 프로도 두고두고 회자될지도 몰라요. 주연들이 이렇게 한 예능에 다 나오는 경우가 우리 프로밖에 더 있어요?”
< 인맥이 좋으시네요 (5) > 끝
ⓒ 윤민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