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듀스 나노머신-68화 (68/124)

< 인맥이 좋으시네요 (1) >

‘오늘밤 뭐해. 친구야’를 줄여서 오밤친의 녹화 당일 날.

오밤친은 사전 섭외 전화 없이 갑자기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서 미션을 수행시키고, 촬영 목적지까지 불러내는 게 프로그램의 핵심 포인트다.

그래서 녹화는 방송국이나 세트장에서 진행하지 않고, 커피숍, 호프집 같은 곳을 섭외해 촬영장소로 사용하는 게 보통이다.

그래야 촬영 중이라는 걸 모르는 채로 친구가 찾아올 수 있을 테니까.

오늘 촬영 장소는 압구정동에 위치한 J커피숍이라는 곳이다.

현장에 도착하니, 이미 많은 사람들로 바글바글 했다. 후문으로 이어진 뒷마당에 방 2개가 있었는데, 그곳을 출연자들이 임시 대기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먼저 와있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나오려는 데 단발머리의 똘망똘망하게 생긴 여자 작가가 나를 불러 세웠다.

“최강민씨. 오늘 친구 분 누구 부르실 거예요?”

그 같은 질문에 나는 생각해놓은 대로 멤버들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내 말을 들은 여자 작가가 고개를 내젓는다.

“에이, 멤버들은 재미가 없죠. 너무 뻔하잖아요. 맨날 멤버들과 나오는 그림 보는 시청자들도 질려할걸요? 좀 색다른 그림 만들어보고 싶어서 최강민씨만 따로 섭외 드린 건데, 혹시 친분 있는 다른 연예인은 없어요?”

“어··· 제가 그동안 활동하느라 바빠서 따로 친분을 쌓을 기회가 없어서요.”

하긴, 따지고 보면 그동안 정말 바쁘기도 바빴지.

친구 한명 사귈 시간도 없을 만큼.

잠잘 시간도 없는데, 친구는 무슨.

“아, 그래요? 음······.”

서브 작가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다시 물어온다.

“그래도 R&N은 꽤 큰 회사인데, 혹시 회사 생활하다가 친해진 사람은 없어요? 같이 밥을 먹은 적이 있다든지, 아니면 뭔가 특별한 친분을 쌓았다든지. 아! 최근에 연락처 주고받은 연예인은요?”

“어··· 그걸 친구라고 보긴 좀 그렇지 않아요?”

내 질문에 작가가 웃으며 대답했다.

“친구가 뭐 별건가요? 앞으로 친하게 지내고 싶은 사람도 친구지.”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대중적으로 알려진 사람과 엮어보려는 작가의 노력이 보인다. 하긴, 이해는 간다. 작가는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거다. 시청률을 어떻게든 높이고, 재미있게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게 방송작가의 일이니까.

헌데, 말했다 시피 그동안은 진짜 잠잘 시간도 부족했다. 그리고 엮일만한 연예인을 본적도 없고.

“음, 딱히요.”

내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서브작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면 드라마 찍고 있는 출연자 중에서는요? 혹시 촬영을 하면서 좀 친해졌거나 하는 사람은 없어요? 예를 들어 김준호씨라든가 장선화씨라든가. 둘 중 한분만 나와도 진짜 대박일 거 같은데. 같이 촬영하다보면 잡담도 하고, 안부도 주고받고 그럴 거 아

니에요?”

대박은 대박이겠지. 둘 다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보기 힘든 얼굴들이니까.

헌데, 그거야 나왔을 때 이야기고.

“음. 글쎄요. 서로 농담을 하긴 하는데······.”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작가가 물어본다.

“연락처는요!? 연락처는 알아요?”

두 눈까지 동그래져가지고는 묻는다. 뭐랄까, 피라미 잡으려고 낚시 대를 담궜다가 월척 낚은 여조사 얼굴이다. 그러면 나는 바늘에 달린 미끼 신세쯤 되는 건가?

“어···. 있기는 한데, 개인적으로 연락을 해본 일은 한 번도 없어요.”

“있긴 있다는 거네요. 와, 잘됐다! 그분들한테 전화해보면 되겠네!”

그러더니 ‘김준호, 장선화에게 전화하기.’라고 웅얼거리고는, 종이에 이름을 적어놓고 밑줄을 쫙쫙 긋는다.

어이, 작가아가씨. 여지껏 내 말을 뭐 들은 거야? 누가 보면 일촌쯤 되는 줄 알겠네.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방송 중에 막 그분들한테 연락하고 그러면 실례지 않을까요? 이제 몇 번 촬영하면서 안면 튼 사이라.”

작가가 웃으면서 괜찮다는 듯이 손 사레를 쳤다.

“방송하다가 만났으면 그게 다 친구고 형님, 누님이지. 별거 있나요? 그리고 다 연예인 생활 오래하신 분들이라 괜찮아요. 섭외가 안 되더라도 전화통화 후에 나중에 방송이었다는 걸 말씀드리면, 다 이해해주실 거예요. 그리고 드라마 홍보하러 나오신 거

아니에요? 자연스럽게 토크하면서 드라마 이야기를 하면 이보다 더 좋은 홍보가 어디 있겠어요?”

“그래도 그분들이 나와 줄 거라는 생각은 딱히 안 드는데요?”

“어차피 연기자분들은 이미지 관리 때문에 이런데 잘 안 나오세요. 전화 통화만 연결돼도 그 순간 분당 시청률 확 올라요. 홍보기사 한 줄이라도 더 뿌릴 수 있고. 그러다가 진짜 나오시면 시청률 대박 나는 거고요. 너무 걱정 마세요. 재미있을 테니까.”

재미야 있겠지. 나만 빼고 전부다.

뭐, 작가의 말을 들으니 전화 통화정도는 나중에 만나서 잘 설명하면 이해해줄 것 같기도 하다. 설마 나 만나자고 이곳까지 나와 줄 리는 만무하니.

그런데 만약 전화를 걸었는데 상대가 안 받으면 어떻게 하지?

그게 더 쪽팔린거 아닌가? 아니야, 어쩌면 안 받는 게 더 나을런지도 몰라.

만약 나중에 왜 전화했냐고 물으면 안부 전화했다고 하지 뭐. 그것도 이상하면 그냥 잘못 눌렀다고 하든가.

아, 그러면 되겠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

오프닝 시작 전. 오늘의 게스트 중 한명인 김강현이 말을 걸어왔다.

“최강민씨는 예능 많이 해봤어요?”

“몇 번 해보긴 했는데, 대부분 떼토크같은 것만 나가서요. 이렇게 멤버들 없이 혼자 나오는 건 처음이에요.”

“아, 그래요?”

김강현의 입가에 안도의 웃음이 슬쩍 걸린다.

“혹시 개인기나 준비한 재미있는 에피소드 같은 거 있어요?”

쳐다보는 눈빛에 약간의 경계의 빛이 서려있다.

왜 아니겠는가. 방송은 결국 분량 나눠먹기 싸움인데.

특히 예능은 더 그렇다. 괜히 예능이 정글이라는 말이 나오는 게 아니지.

출연 게스트들끼리는 방송직전까지도 신경전이 대단하다. 어느 누가 더 웃기는지, 그리고 재미있는 에피소드등을 많이 준비했는지에 따라서 자신의 분량이 늘기도 하고, 줄기도 하니까.

“아니요. 제가 원체 그런 쪽으로는 재주가 없어서. 별로 할 이야기도 없어서 그냥 작가님들이 시키는 대로만 하려고요. 김강현씨는 예능 많이 해보셨죠?”

“하하, 많이는 아니고 조금요. 제가 예능 욕심이 조금 있어서······. 실은 제가 연기하기 전에는 개그맨 지망생이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몇 번 예능을 해보니까 전 편하고 재미있더라고요.”

“아, 좋으시겠어요. 오늘 잘 부탁드려요.”

“하하, 제게 뭘 잘 부탁드리고 말게 있나요? 그냥 하던 대로 하는 거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던, 그는 잠시 자리를 비운 오달민의 자리를 스윽 보고는 상체를 내쪽으로 기울였다. 그리고는 엄청난 팁이라도 이야기해주는 것처럼 목소리를 소곤거렸다.

“예능은 뭐 별거 없어요. 다른 게스트 말에 호응만 잘해주면 돼요. 재미없는 것도 과장대게 웃어주면서 가끔 손뼉도 쳐주고. 리액션만 잘해줘도 절반이상은 먹고 들어가거든요.”

“아, 리액션.”

내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중얼거리자 김강현이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더 좋은 건 토크 잘 받아주고 에피소드를 살려주는 건데, 그건 아직 최강민씨한테 좀 무린 거 같고······. 아무튼 제가 이야기하면 옆에서 리액션 좀 잘 부탁드려요. 저도 리액션 잘해 드릴 테니. 같이 연기하는 사람들끼리 상부상조하자고요.”

“네. 그럴게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여유있는 웃음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편히 해요. 편히. 예능 진짜 별거 없다니까요?”

“녹화 시작합니다!”

FD의 목소리와 함께 마침내 큐 사인이 떨어졌다.

정면을 바라보자 멀지 않은 곳 MC석과 게스트석을 비추고 있는 카메라 12대가 일제히 돌아간다. 방송과 관련된 관계자들만 족히 40명이 넘었다.

스튜디오 안이 아닌 야외라서 그런가? 왠지 그 모습이 더 낯설게만 느껴진다.

“오늘도 어김없이 시청자분들을 찾아왔습니다. 오늘밤 뭐해, 친구야의 MC김경규.”

“MC임현경입니다!”

김경규와 임현경의 활기찬 목소리가 조용한 촬영장을 깨운다.

김경규가 게스트 석을 두루 훑어보고는 카메라를 보며 오프닝 멘트를 날렸다.

“오늘은 요즘 한창 기세 좋게 떠오르고 있는 기세 좋은 연예인 특집입니다! 어느 분들이 나오셨는지 소개 좀 해주시겠습니까? 임현경씨?”

고개를 끄덕인 임현경이 상큼한 미소를 장전하며, 말을 받는다.

“오늘 모신 게스트 분들은 얼마 전 800만 영화로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배우 김강현씨와 요즘 대세답게 여기저기에서 종횡무진으로 활약 중이신 개그맨 오달민씨, 그리고 요즘 가장 핫하다는 아이돌 그룹의 리더이자, 작곡가로도 활약 중인 걸로도 모자라,

연기의 영역까지 넘보고 계신 최강민씨를 모셨습니다!”

박수소리와 함께 게스트의 최근 근황을 묻는 가벼운 토크가 시작됐다. 시작은 오달민부터였다.

나는 김강현의 말대로 MC들과 게스트들이 말을 할 때마다 놀란 표정, 웃는 표정, 고개도 끄덕이며 열심히 리액션을 쳐줬다.

그런데 어째 토크가 진행이 되면 될수록 MC는 물론 카메라 옆에 우글우글 모여 있는 스탭, 작가들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그리고 급기야는 김강현의 토크로 넘어가 그가 야심차게 준비한 마른 오징어 개인기를 한다고, 일어나 몸을 배배 꼬기 시작하자 차

마 못 보겠다는 듯이 고개를 돌린다.

작가 한명이 빠르게, 스케치북에 뭔가를 적어 넣는다.

최강민씨 토크 시작.

그것을 캐치한 MC가 빠르게 화제를 돌리며 나를 쳐다본다.

“아, 김강현씨 개인기는 아주 잘 봤습니다. 그러면 다음 게스트로 넘어가도록 하죠. 요즘 핫하다는 연예인들중에 이분을 빼놓으면 섭섭하죠. 바로 최강민씨입니다.”

김강현이 머쓱한 표정으로 나를 한번 쳐다보더니, 도로 자리에 앉는다.

왜 나를 보는 건데. 내가 끊은 것도 아닌데.

MC김경규는 그런 그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고, 시선을 내게 주며 물었다.

“최강민씨는 혹시 뭐 준비해오신거 없나요?”

“아, 저는 딱히 다른 개인기는 없고, 춤과 노래를 해보겠습니다.”

“춤, 노래 좋죠. 하긴, 그 얼굴이면 다른 개인기는 필요 없겠네. 노래는 뭘 하시겠어요?”

“정지운 선배님의 레이니즘을 하겠습니다.”

“오, 그 노래 좋죠!”

MC김경규가 껄렁껄렁한 포즈로 손바닥위로 주먹을 철썩철썩 치며, 고개를 까닥거린다. 그걸 본 MC임현경이 웃으면서 면박을 준다.

“아, 그게 뭐예요! 춤 다 망치시네!”

“왜 이래요, 진짜. 저 소싯적에 나쁜 남자란 소리 많이 들었어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뻔뻔스럽게 늘어놓는 김경규를 보며, 다들 박장대소를 짓는다. 실제로 웃긴 건지, 아니면 그냥 웃는 척 리액션을 해주는 건지.

예능을 하다보면 다 좋은데 그게 헷갈린다.

뭐, 선곡 반응은 나쁘지 않으니 그걸로 일단은 된 건가?

내가 자리에 일어서자 출연자들과 스텝들 모두 기대감에 잔뜩 부푼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나는 준비해온 선글라스를 끼고, 카메라가 잘 보이는 곳으로 나가자, 잠시 후 MR이 흘러나온다.

무선 마이크를 차고, 포즈를 취하자 바로 앞에서 그걸 지켜보고 있던 여자 작가들이 우왁, 소리를 지르며 재빨리 입을 틀어막는다. 저와 같은 모습들을 어디선가 많이 봤나 싶었더니, 공연 직후 사인해달라며 종이를 내민 팬들 얼굴이다. 좋아 죽으려는 표

정이다.

-bad boy I'm gotta be a bad boy.

카리스마 넘치는 남성미와 섹시미. 그리고 거부할 수 없는 나쁜 남자의 매력을 한껏 보여준다.

역대 가요계에서 가장 섹시한 남자의 퍼포먼스라고도 불리는 레이니즘을 시작하자, 그걸 보고 있던 출연자는 물론 모든 스텝들까지 입을 벌린 채 넋을 놓고 봤다. 특히나 여자 작가들은 눈에서 그냥 하트가 막 쏟아진다.

어어, 그런데 안 끊고 계속 이대로 가도 되나?

벌써 2절 들어갈 차례가 다 됐는데?

“······음, 여기까지 보여드리겠습니다.”

결국 나는 스스로 노래와 춤을 끊었다.

번개 맞듯 고개를 파르르 떤 MC김경규가 박수를 치자, 그제야 출연자들이 뒤따라 손뼉을 친다.

“와, 최강민씨는 뭐, 그냥······ 말이 다 안 나오네. 어디가서도 그냥 개인기 안하고, 이것만 해도 되겠어요. 이, 이렇게 하는 거 맞죠?”

그러더니, 어깨를 얼쑤얼쑤한다. 혹시 방금 춤 동작을 따라한 건가 싶었는데, 그 예상은 여지없이 맞아떨어졌다.

“어때요? 이래봬도 나도 왕년에 춤 좀 췄다는 소리 들었는데.”

아, 맞구나. 따라한 거.

“아하하하··· 네, 잘 추시네요. 맞아요. 그거.”

마지못해 리액션을 보여주자 MC김경규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겸손하게 인사를 하며, 자리로 돌아가자 MC김경규가 기다렸다는 듯이 다음 순서로 진행을 넘겼다.

“자자, 그러면 대충 준비해온 것도 다 본거 같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친구들을 한번 불러봅시다. 더 이상 지체하다가는 밤새도록 촬영하게 생겼네. 먼저, 으음······.”

김경규의 두 눈이 바쁘게 돌아다니며, 출연자들을 슥 쳐다본다. 그러더니 이내 나에게 고정되듯 못 박힌다.

“최강민씨. 먼저 해봅시다. 이 기세를 살려서.”

드디어 올게 왔구나.

“담당 작가 분한테 들으니 듣자하니 멤버들 중 한명을 부르실 예정이셨다고요?”

“네. 제가 따로 친구사귈 시간이 없어서요.”

“하긴, 그것도 그렇겠네. 최강민씨 요즘 바쁘다는 거 온 국민이 다 알고 있으니. 그러면 가장 최근에 핸드폰에 저장시켜놓은 사람은 누구에요? 매니저 핸드폰 말고, 본인 핸드폰에. 좀 젊고, 영(young)한 분들 없어요?”

“어··· 아마도 같이 드라마 촬영하고 있는 분들?”

“그래요? 그러면 뭐 고민할 것도 없네. 전화번호를 줬다는 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준건데, 이럴 때 써먹어야지.”

말이 또 그렇게 되나?

MC김경규가 눈을 반짝거리며 물었다.

“최강민씨가 출연하는 드라마 여자 주인공이 장선화씨라면서요? 혹시 그 분 연락처도 있어요?”

이야기가 또 왜 이런 쪽으로 흘러가는 거지?

“혹시라도 거짓말할 생각은 하지 말아요. 핸드폰 전화목록 보면 다 나오니까.”

“어··· 있기는 있는데.”

대뜸 내 말을 잘라먹은 MC김경규가 앞에 테이블을 탁치며 말했다.

“좋아요. 그러면 장선화씨로 갑시다. 이럴 때 아니면 언제 한번 여배우 얼굴을 보겠어요?”

< 인맥이 좋으시네요 (1) > 끝

ⓒ 윤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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