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듀스 나노머신-64화 (64/124)

< 여기 그런 배우 있어요 (3) >

몬스터를 잡는 게임을 하다보면 졸개, 중간보스를 거쳐서 맨 마지막에 최종보스가 나오게 되는데, 그땐 나오는 BGM도 주변 환경도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진다.

상황이 딱 그랬다.

단지 두 명이 등장했을 뿐인데, 리딩실 안 공기가 틀려진다. 배우들은 어떻게 하면 작가, 감독에게 조금이라도 잘 보일까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느라 여념이 없다.

여기 오기 전 차조영 실장이 해줬던 말이 떠오른다.

“드라마 판에서는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 줄 알아?”

“글쎄요.”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 전에는 배우가 갑이고, 작가 감독이 을이지. 물밑에서 이루어지는 배우 모셔오기 전쟁이 장난이 아니거든. 특히나 네임파워가 있는 배우들은 흥행 보증수표나 다름없어서 아주 모셔오려고 안달들이 나 있지. 그래서 특정 배우를 지

정해놓고, 그 배우에 맞춰서 역할을 쓰는 작가들도 많아. 하지만 그런 배우들도 도장을 찍고 나면···? 이게 완전히 정반대가 돼 버려. 갑은 작가감독이 되고, 배우가 을이 되지.”

“왜요?”

“예전에 제법 유명한 사건이 있었는데. 로코물의 여왕이라 불리는 탑 스타 이예인이 작가감독한테 대들면서 보이콧 선언했다가 1달 만에 돌아온 일이 있었거든? 제 딴에는 짜증도 나고 그랬겠지. 나름 대한민국에서 알아주는 탑스타인데, 매일같이 계속되

는 쪽 대본 러쉬에 한번 촬영 들어가면 쉬지 않고, 카메라 돌리는 통에 하루, 이틀은 밤샘은 기본이고, 씬 밀리면 기약없이 대기타야하고. 그래서 생방처럼 돌아가는 열약한 현장 촬영 개선 좀 해보겠다고 보이콧을 선언한 거였는데, 컴백 후, 제일 먼저 찍은

씬이 뭐였는지 알아? 남주 어머니 앞에서 무릎 꿇고, 냉채 국으로 싸다구 맞는 거였어. 그 후로도 물 싸다구 엄청 맞았어. 감독도 작정이라도 한 듯 몇 번씩이나 그 씬을 찍고, 또 찍었지. 분풀이라도 하듯 말이야. 배우 한 명이 보이콧선언해서 촬영이 딜레이

되면, 매일같이 깨지는 돈이 어마어마하거든. 결국 무사히 종방하기는 했지만 시청률 급락하고, 이예린 기세 한풀 꺾여서 지금은 케이블 드라마 찍고 있잖아. 원래는 케이블이라면 거들떠도 안 봤던 배운데. 그걸 보면 알 수 있지. 어느 쪽 파워가 우세한 건

지.”

그 말이 정답이었다.

촬영에 들어가기만 하면 감독과 작가의 권한은 절대적으로 바뀐다.

모든 진행과정을 총괄하는 감독의 눈 밖에 나게 되면, 붙여서 찍어도 될 씬을 일부러 떨어트려놔 5분짜리 씬 2개 찍자고, 하루 종일 대기타고 있어야하는 경우도 생기고, 앞서 말한 대로 한 번에 오케이 해도 될 만한 장면을 일부러 여러 차례 찍기도 한다.

작가의 눈 밖에 나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씬을 줄이기도, 늘리기도 하는 것은 전적으로 작가의 몫이기에 마음에 들지 않은 배우는 제 아무리 주연이라 하더라도 점차 씬을 줄이다가 교통사고로 식물 인간화 시켜버리던가 아니면 암 말기 진단받게 해서 죽여 버리기도 한다.

실제로도 그렇게 하기도 하고.

그러니 다들 작가감독 눈에 들려고 혈안이 될 수밖에.

“네네. 반가워요. 반가워.”

작가와 감독들이 일일이 배우들과 눈을 맞추고, 악수를 하며 들어온다. 배우들은 자신들이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친절한 미소로 악수를 해주기를 기다리고 있고. 그 모습이 꼭 지방행사에 참관하러온 대통령 같다.

하긴, 틀린 말은 아니지.

이 바닥에서 작가감독이면 대통령 그 이상 가는 권력자다.

“송 작가님. 이렇게 좋은 작품에 캐스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김준호가 혓바닥에 버터를 발랐는지 느글느글한 목소리로 고개를 숙인다.

“배역하고 잘 맞은 것 같아서 하감독이 추천한 거예요. 그런데 듣자하니 새로 나온 대본에 씬 없어지고, 분량이 줄어서 불만이 있다고 하던데, 할 말 있으면 시작 전에 말해 봐요.”

40대의 중견작가의 포스가 어김없이 발휘된다.

성격이 원래 저런 건지 아니면 이 바닥의 룰이 그런 건지 돌려 말하는 법이 없다. 그냥 돌직구다.

무방비 상태로 돌직구를 맞은 김준호가 당황한 표정으로 얼버무린다.

“아, 아니에요. 불만은요 무슨. 그런 거 없습니다.”

“오해할까봐 미리 이야기해놓는 건데, 김준호씨한테 감정 있거나 해서 뺀 거 아니라는 거 알죠? 그냥 스토리상 불필요해보이는 씬이라고 생각해서 없앤 거예요. 원래 드라마 하다보면 없애기도 하고, 추가해서 넣기도 하잖아요? 그런 걸 일일이 설명해줘야

하는 아마추어는 아닌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봐요?”

졸지에 김준호를 아마추어로 만들어버리고는 장선화를 쳐다보며 말을 잇는다.

“장선화씨를 봐봐요. 그 씬 없어진 건 장선화씨도 마찬가지일 텐데, 가만히 있잖아요. 아니면 혹시 장선화씨도 나한테 불만 있어요?”

불통이 옮겨 붙으려나 싶었는데, 역시 주연 몇 번해 본 베테랑 여배우는 틀려도 뭔가 틀렸다.

“아니에요. 작가님. 어련히 알아서 잘해주시려고요. 전 이 작품 작가님 이름만 듣고, 시놉시스는 보지도 않고 바로 승낙 했어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 그녀의 얼굴은 보기만 해도 애간장이 살살 녹는 눈웃음이 가득했다.

것 보라는 표정으로 웃음을 지은 송희연 작가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비어있는 상석으로 가 앉았다.

김준호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쳐다보자 장선화가 턱을 내민 채 입술만 벙긋거리며 ‘뭐, 뭐.’ 그러고 있다.

예전에 둘이 작품 하나를 같이 했다고 하더니, 친분이 있나?

“자자, 이제 모두 다 온 거 같으니 얼른 시작하도록 하죠.”

자리에 앉은 하윤성 감독의 말에 차례대로 일어나 간략하게 본인들이 맡은 역과 소개를 하고 앉았다. 그때마다 박수소리가 터져 나온다.

그리고 곧 이어서 본격적인 대본 리딩이 시작됐다.

리딩이 시작되자 장내의 분위기가 또 한 번 뒤바뀐다. 모두들 배우 눈빛을 장착한 채 집중해서 대본을 쳐다본다.

대본 리딩은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자신들이 맡은 배역들을 잘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서로 같이 읽으면서 그 흐름을 익히기 위한 자리다.

연기는 배우들 간의 호흡이 무척이나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때 감독은 배우의 대사를 주의 깊게 들으며 연출을 어떤 식으로 이끌어내야 할지 고민하며, 작가는 다시 한 번 대본을 점검하며, 불필요한 장면들이 있는지, 에피소드의 흐름이 개연성이 있는지, 수정할 대사는 있는 지등을 다시 한 번 점검한다.

김준호가 얼굴에 인상을 찌푸린 채 신경질적으로 대사를 뱉어냈다.

-야, 신입생. 너 거기 안서?

-네? 저요?

-지금 내 발 밟고 지나갔거든? 이게 얼마짜리 구두인줄 알고. 죽을 라고,

-어, 어머! 죄, 죄송해요.

김준호와 장선화가 대사를 주고받았다. 역시나 예상대로 별다른 이변은 없었다. 김준호의 연기는 딱 들은 만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허나 장선화는 달랐다.

자신의 대사가 될 때면 차분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다가 대사를 치는데, 텍스트의 문구가 장선화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자 마치 영상을 보고 있는 것처럼 그림이 그려지면서 살아서 팔딱거린다.

그걸 본 주변 사람들이 소곤거린다.“와, 장선화 연기가 더 늘었네. 원래 저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신인상 받은 이후로 아직까지 상은 한 번도 못 받았지? 작품만 잘 터지면 올해는 상 하나 정도 기대해 봐도 되겠는데?”

대체적으로 반응들이 좋다.

슬쩍 장선화의 앞에 놓인 대본을 쳐다봤다. 얼마나 대본을 끼고 살았는지 끄트머리가 다 닳아서 시커멓게 보일정도다. 사람들은 걸 그룹에서 연기자로 이미지 성공했다고들 떠들지만 저걸 보니 알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왔는지를.

1부, 32페이지. 43씬. 점심시간, 옥상 위. 한이슬이 울고 있는 장면. 낮잠을 자고 있던 박선우가 그 울음소리에 잠이 깨면서부터 시작된다.

드디어 내 차례가 다가왔다. 모두의 눈빛이 내게로 향한다.

걱정 반 우려 반 섞인 눈빛들.

과연 내가 박선우 역을 잘 소화해낼 수 있을까? 연기는 얼마나 잘하려나? 괜히 로봇연기로 작품 망가트리면 안 되는데, 기타 등등···.

그 우려와 걱정 섞인 시선들 중 편안함을 유지하고 있는 건 오직 작가와 감독 뿐인듯 했다.

몇몇 배우들과 매니저들이 소곤거린다.

“최강민 연기가 어떨까? 잘하려나?”

“오디션 보고 들어왔다니까 그래도 평타는 치지 않겠어? 듣자하니 만장일치였다고 하던데.”

“뭐, 입 다물고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일단 그림은 되니까. 연기는 더도 말고, 김준호만큼만 하면 중박 이상은 할 것 같은데. 그치?”

“쉿, 시작한다.”

목소리 톤이 안정적이고, 듣기 좋아 대사 톤도 좋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보다도 훨씬 더 좋다.

호흡도 안정적이고, 발음도 정확해서 대사가 귀에 쏙쏙 박힌다.

간혹 이상하게 호흡법을 익힌 배우들은 말하는 말투와 톤이 연기할 때와 확연히 달라져서 괴리감이 느껴지곤 했는데, 그런 것이 없다.

주위를 크게 의식하는 것 같지 않으니 대사나 시선처리도 자연스럽고, 연기가 아니라 실제 벌어지고 있는 일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느낌이다.

-전학생. 왜 이런 곳에서 울고 있어?

-누구세요?

-나? 너희 반 반장. 아침 조례시간에 나 못 봤어?

-아······.

보고, 듣고 있던 배우, 매니저들이 모두들 ‘오, 제법’이라는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최강민의 연기가 계속 이어질수록 두 눈도 점점 커진다. 저건 제법 정도가 아니다. 장선화와 대화를 주고받는데도, 전혀 아무런 위화감이 들지 않는다.

김준호와 장선화가 대사를 주고받을 때는 확실히, 장선화가 리드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는데, 둘의 대사에는 그런 것이 없다.

사람들이 이제는 놀람을 넘어서서 경악어린 표정을 짓는다.

말도 안 돼. 저게 첫 작품을 찍는 사람의 연기라고?

도대체 얼마나 연기레슨을 했길래 저런 연기를 펼칠 수가 있는 거지?

“야, 쟤는 그냥 타고 났나보다. 저게··· 말이 되니?”

“웬일이니. 작곡 천재, 노래 천재, 얼굴 천재, 이젠 하다하다 연기 천재소리까지 듣겠네. 어후야, 이젠 쟤 좀 무서워지려고 그래.”

배우들은 자신 차례가 다가오면 대사를 치고, 어김없이 최강민을 힐끔거린다. 그리고 그런 최강민을 보는 작가와 감독의 표정이 흐뭇함으로 물들어간다.

첫 화를 마무리할 엔딩 씬을 눈앞에 남겨두고 있다.

시청자들에게 두고두고 회자될 명장면으로 남느냐, 아니면 시청자들의 손발이 오그라들게 할 몹쓸 장면이 되느냐는 어디까지나 최강민 한사람에게 달려있다.

최강민이 눈을 감은 채 팔을 양 옆으로 벌린다. 어딘가에서 날아온 봄 바람에 머릿결에 흩날리다 가라앉는다. 그 여운을 느끼며 최강민이 나지막하게 읊조리듯 말한다.

-이렇게 헤드셋을 쓰고, 눈을 감고 있으면··· 마치 세상과 단절된 듯한 기분이 들어. 너도 한번 들어봐.

자신의 목에 걸고 있는 헤드셋을 벗어 박선화의 귀에 대어주는 장면.

장선화가 흘리던 눈물을 멈추며 커진 눈으로 최강민을 올려다보고, 그런 장선화를 보고,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머리위에 손을 올려놓는다.

그걸 보고 있던 리딩실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입을 쩍 벌렸다.

“헉······.”

응? 헉?

신음소리가 들린다 싶어 정신을 차려봤더니······ 세상에 맙소사.

진짜로 내 손이 장선화의 머리위에 올라가 있다.

장선화는 졸지에 이게 무슨 시츄레이션인가 싶어 눈만 껌뻑거리며 나를 올려다보고 있고, 모든 사람들이 그런 나를 보며, 황당하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다.

아······ 순간 영삼이랑 할 때 버릇이 나와 버린 모양이다.

미치겠네, 진짜.

“아,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몰입했나 봐요.”

내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걸 본 장선화가 피식 하고 웃는다. 다행히 기분 나빠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최강민씨는 연기를 하면 배역에 씌는 타입이신가 봐요?”

장선화의 얼굴에 호기심이 잔뜩 서려있다.

표정이 딱 이랬다. 뭐, 이런 신기한 물건이 다 있지?

그걸 보고 있던 두 원로배우는 아주 배를 잡고 웃고 있다. 작가와 감독도 마찬가지고.

다행히 그냥 넘어가는 눈치였다.

휴, 십 년 감수했다.

잠깐 동안의 휴식시간.

김준호가 나를 보고는 낄낄거리며 다가왔다.

< 여기 그런 배우 있어요 (3) > 끝

ⓒ 윤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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