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듀스 나노머신-63화 (63/124)

< 여기 그런 배우 있어요 (2) >

세월이 유수처럼 흐른다는 말이 뭔 말인지 알겠다.

시간이 이렇게 빨리 가나 싶을 정도로 정신없게 흐른다.

음원 1위를 한 다음부터 밀려드는 스케줄에 그때도 꽤 바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더 심하다. 제대로 된 식당에서 엉덩이를 붙이고 밥을 먹어본지가 언젠지도 모르겠다.

오늘이 월요일인지, 화요일인지··· 남들은 불금이다 주말이다 여가 즐길 준비를 하는데, 나는 그런 게 없다.

어찌된 게 빨간 날이 더 바빠.

누가 그랬다. 연예인은 다크서클 내려오는 길이만큼 인지도도 올라간다고.

처음에는 웃어 넘겼는데, 요즘에는 그 말이 뭔 말인지 알겠다.

잠이 부족해······.

그래도 열심히 활동한 덕분인지 인지도는 하루가 모르게 늘어가고 있다.

박호영 팀장 말이 지금은 국내 스케줄뿐이라 잠잘 시간이 부족해도, 해외 진출하고 나면, 비행기 안에서 실컷자면 된다고 하는데, 이걸 위로라고 하는 건지도 헷갈린다. 애들은 그냥 나 잡아 잡수세요,라는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거린다.

전부 다 좀비화가 되어가고 있다.

간혹, 인터뷰를 하다보면 연애하는 멤버들은 없냐는 질문이 들어오곤 하는데, 연애는 개뿔. 잠잘 시간도 없다.

어디 아늑한 곳에 앉기만 하면 몰려드는 잠 때문에 졸기 바쁘니, 이러다가는 소개팅 나가서도 졸지경이다. 그리고 상대 여자는 기막힌 표정으로 물 잔으로 물 싸대기를 날리겠지.

찰싹.

“으헉!”

“응? 꿈이라도 꿨어? 뭘 그렇게 놀래?”

눈을 떠보니 어두컴컴한 것이 실내 주차장이다.

아, 맞다. 나 차타고 이동 중이었지. 깜빡 잠이 들었나?

차는 이미 주차를 끝마쳤는지 정지 중이었고, 차조영 실장은 운전석에 앉아 자신의 핸드폰을 한쪽 귀에 이어폰을 끼고 뭔가를 들여다보고 있다.

“아··· 다 왔어요?”

한쪽 귀에서 이어폰을 빼낸 차조영 실장이 시계를 들여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피곤하지? 차가 안 막혀서 예상보다 빨리 도착했는데, 일부러 안 깨웠어. 졸리면 조금 더 자도 돼.”

“아니, 괜찮아요. 잠 다 깼어요. 그나저나 뭘 보고 있으세요?”

“중국어 인강.”

“중국어 배우시게요?”

“이제 곧 플레어 중국 진출할 거라고, 팀장님이 미리미리 배워놓으라고 하더라. 현지 가서 언어소통 안 되면 너희들 고생한다고.”

헐.

이제 봤더니 매니저가 진짜 힘든 직업이구나. 듣기로는 서울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로드부터 시작했다고 하던데. 매일 같이 운전하랴, 스케줄 챙기랴, 이제는 중국어 공부까지······.

연예인도 연예인이지만, 그걸 서포트해주는 매니저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님은 분명했다.

“실장님, 애인 없으시죠?”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애인?”

내 질문에 차조영 실장이 한참동안이나 웃는다.

마치, 아주 웃긴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실장 직함 달고, 애인이 있으면 그건 일 안한 거지. 팀장님이 그러시더라. 팀장달기 전에는 여자는 꿈도 꾸지 말라고.”

“진짜요?”

“팀장님은 물론이고, 회사 내에서 실장, 팀장직함 단 사람들은 죄다 솔로일걸? 아, 매니지먼트 3팀 팀장님은 결혼하긴 하셨다. 맞선보고, 데이트 한 번 하고 그냥 바로 결혼 하셨다더라. 어차피 결혼해도 집에 잘 못 들어갈 거라면서, 그래도 죽기 전에는 애

는 한번 낳아보고 죽어야하지 않겠냐면서. 그랬는데 지금은 어떻게 사시는 줄 알아?”

“어떻게 사시는데요?”

“결혼하자마자 신혼여행도 못 가보시고, 중국으로 끌려가셨지. 담당 연예인이 배우 김수겸씨인데, 한중합작영화에 캐스팅 됐거든.”

헐. 극한 직업 맞네.

“잠 깼으면, 슬슬 올라가볼까?”

차조영 실장 검지를 위로 찌르며 말했다.

“대본 리딩 시간이 몇 시라고 하셨죠?”

“10시.”

시계를 들여다보니 9시가 조금 넘었다.

“아직 시간 많이 남은 것 같은데요.”

“첫 리딩 연습 날이니까 1시간정도 빨리 가는 게 좋아. 가요계도 텃세가 있다고는 하지만 드라마 바닥에 비하자면 그야말로 새발의 피거든. 가요계가 훈련소라고 치면, 드라마 판은 그야말로 전쟁터야. 현장에 도착했으면서도 다른 배우들 도착할 때까지 일

부러 차에서 안 내리고 있는 배우들도 많아.”

“주인공은 늦게 나타나는 거니까요?”

내 말에 차조영 실장이 웃으면서 대답한다.

“그래, 맞아. 자기보다 급 낮은 배우들을 기다리고 있기 싫은 거지. 너도 이제 막 연기 시작하는 신인이니까 그런 걸 늘 염두해 두라고. 괜히 선배랍시고, 곤조 잡는다고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일부러 와서 시비 걸고, 자존심 뭉개는 건 이 바닥에서는 비일

비재하니까. 너 같은 경우에는 가수 활동을 하면서 연기를 막 시작하는 거니까 특히 더 그럴 지도 몰라.”

그것 외에 조심해야할 것 이것저것을 세심하게 알려준다.

듣다보니 완전히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 같다.

TV속에서 늘 온화한 웃음을 지으며, 시청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윤복자 선생님과 이병진 선생님이 쌍심지를 키며, 후배를 쥐 잡듯이 잡는 걸 생각하니 도저히 상상이 가질 않는다.

설마, 나한테는 안 그러겠지?

*

KBN의 위치한 4층 대본 리딩실 안.

서른 명은 족히 앉을 수 있는 널찍한 공간.

이미 테이블 끝 좌석에는 몇몇 연기자들이 인사를 끝내고 자리에 앉아 자기들끼리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리고 있다.

“오늘 배우 분들 다 오시겠죠?”

“듣자하니 감독님이랑 작가님도 다 참석하신다고 하는데, 첫날부터 대차게 찍힐 일 있어요? 아마도 다 오시겠죠.”

“헌데······.”

눈치를 보던 남자배우의 목소리가 은근해진다.

“오늘 분위기 괜찮을까요? 대본 나온 거보니까 김준호씨 역할이 원래 대본 것보다 좀 줄어든 것 같던데. 최강민 비중이 더 늘고.”

“작가님이 사전에 다 조율 했겠죠. 설마 그냥 그렇게 고치셨을라고.”

“제가 듣기로는 아니라고 하던데요? 제가 아는 분이 김준호씨가 배우는 레슨 선생이랑 같이 연기지도 받는데, 레슨 선생말로는 갑자기 씬이랑 대사 줄어서 김준호씨 많이 열 받아 있다고 하던데요?”

“하긴, 나라고 빡치겠다. 왜 아니겠어요? 배우로서 내 분량 줄어드는 게 얼마나 스트레스 받는 일인데. 더군다나 연기경력도 일절 없는 쌩초짜 때문에 분량테러를 당했으니······.”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이 바로 불구경, 싸움 구경이라고 했던가.

목소리의 어조는 은근했지만, 그 속에 묻어있는 흥분은 구경꾼들의 모습 그 자체였다.

“어, 들어오네요. 저기.”

문이 열리고 내가 들어서자 배우들의 시선이 와 닿더니, 마치 짜기라도 한듯 조용히 입이 다문다.

어색한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고, 내가 깍듯이 먼저와 있는 배우들, 그리고 매니저들에게도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앉아 있던 배우들이 앉지도 서지도 않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따라서 고개를 숙인다.

의자는 많은데, 어디 앉아야 할지를 모르겠다.

왜, 밥상머리는 나이순부터라는 말이 있듯이 미리 와 있는 배우들이 앉아 있는 자리를 보니, 영락없는 그 순서다. 누가 봐도 안쪽이 상석자리다.

나이도 어린놈이 그쪽에 기웃거리다가는 말이 나올 것 같아서 그냥 미리 와서 앉아 있는 배우들 앉아 있는 끄트머리에 앉았다.

잠시 후, 순차적으로 문이 열리며, 한 명 한 명 배우들이 들어온다. TV속에서나 보던 진짜 배우들의 모습.

“안녕하십니까.”

3대천왕의 전진후 역을 맡은 이우빈이 민소매에 청재킷을 걸친 채 안으로 들어온다. 가까이서보니, 키도 크고 진짜 잘생기긴 했다. 짙은 눈썹에 날카로운 턱선에 손을 데며 베일 것처럼 예리하다.

그 뒤로 쉴 새 없이 문이 열린다.

담임 선생님역과 카페 주인등 조연급이상만 참여하는 대본 리딩 답게, 제법 비중 있는 이들이 속속 들어오고 있다.

그리고.

평소 친분이 있던 원로배우 윤복자, 이병진이 나란히 웃는 얼굴을 하며 들어오자 앉아 있던 배우들이 일제히 의자에서 일어선다.

“선생님 오셨습니까.”

무슨 군대인줄 알겠다. 기합이 바짝 들어가 있다.

“앉아요. 앉아. 여기가 무슨 군대도 아니고. 편하게들 있어요.”

두 원로배우가 저마다 웃으면서 반가운 얼굴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저번 작품에서 보고 1년만이네, 2년만이네. 이런저런 안부를 묻는 인사들이 오고 간다.

그러더니 제일 안쪽 상석에서 두 번째 자리에 떡하니 나란히 앉는다.

맞네. 서열 순.

하지만 여전히 첫 번째 자리는 비어 있는 채였다. 그러면 가장 첫 번째 앉는 건 누구지? 주연인가? 아니면 작가, 감독?

자리에 앉은 중년배우 윤복자가 한번 배우들을 쓰윽 쳐다본다. 모두가 사교성 웃음을 얼굴에 장착하고 있던 그때 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최강민씨?”

“네, 선생님.”

나도 있는 힘껏 웃었다. 중년배우 윤복자가 내게 손짓한다.

“불편하지 않다면 앞쪽으로 자리 옮기도록 해요. 아무래도 대사 주고받는 역이 많은 사람들끼리 모여 있어야 대사 전달도 빠르고, 표정도 볼 수 있고 그러니까.”

아. 그렇구나.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윤복자 배우의 옆···은 조금 부담이 되고, 그 옆옆 옮겨가자, 마치 배우들이 임금한테 간택 받은 시녀 바라보듯 나를 쳐다본다. 시셈, 부러움이 가득한 눈빛이다.

내가 의자에 앉자 중년배우 윤복자가 나에게 상체를 옆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내 손녀가 최강민씨 엄청 좋아해요. 오늘도 같이 대본 리딩 한다고 하니까 아주 막··· 난리인거 있죠? 같이 따라오겠다는 걸 간신히 말렸다니까.”

그러더니 목소리가 한층 더 은근해진다.

“조금 있다가 사인 한 장만 해줘요. 사진을 찍어주면 더 좋고. 우리 손녀 보여주게.”

“네, 선생님. 그런 거라면 백장도 찍어드릴게요.”

“아휴, 우리 손녀가 엄청 좋아하겠네.”

손녀 바보라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그리고 또 다시 문이 열리고, 곧 주연인 김준호와 장선화가 거의 동시에 들어왔다.

세기의 비주얼커플이 될 거라더니, 그 말은 사실이었다. 둘이 나란히 서 있는 것만 봐도 절로 흐뭇한 미소가 나온다. 보기만 해도 힐링되는 그런 기분이랄까.

기가 막힌 투 샷이다.

김준호는 소매를 반쯤 접은 니트와 슬랙스를 장선화는 반바지차림에 트렌치코트를 입고 왔는데, 언뜻언뜻 보이는 길쭉한 다리가 아래로 쭉쭉 뻗어있다. 내 눈길은 김준호보다는 장선화에게 먼저 갔다.

왜냐면, 너무 반가워서.

그녀가 인사를 하는 도중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나도 모르게 손을 흔들 뻔한 걸 꾹 참았다.

하도 영삼이를 통해서 저 모습을 봤더니, 이제 정신까지 미쳐가는 모양이다.

하긴, 그러고 보면 내가 결코 정상은 아니지.

아마도 정신과에 가서 진찰을 받는다면 나는 영구 입원감일 거다. 평생 정신병동에 갇혀 썩을지도 몰라. 과대망상증, 혹은 정신분열증. 그런 병명이 붙겠지.

김준호가 나를 스쳐 지나가더니, 내 옆자리에 앉았다.

연기는 다른 배우들에 비해 밀린다고는 하지만 가까이서 보니 왜 주연으로 발탁됐는지를 알겠다.

“왜 그렇게 계속 쳐다봐요? 사람 처음 봐요?”

나도 모르게 너무 빤히 쳐다보고 있었나 보다.

김준호가 다리를 꼬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눈썹을 꿈틀거린다.

혹시, 기분이라도 나쁘게 한 건가 싶어 내가 바로 사과를 했다.

“아, 미안합니다. 잘생긴 배우를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라.”

순간 김준호의 몸이 움찔했다. 자세히 보니 입가도 씰룩거리고 있다.

“방금··· 뭐라고 했어요? 저보고 잘생긴 배우라고 했어요?”

“네.”

“진짜 그렇게 생각해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건드리기만 해도 물 것 같은 독사 같은 반응이더니, 지금은 꼭 솜사탕을 눈앞에 둔 아이처럼 눈이 몽글몽글해져있다. 내게 바싹 상체 기울이며, 넌지시 묻는다.

“조금 더 자세히 좀 말해 봐요. 어디가 어떻게 잘 생겼는데요?”

“키도 크시고, 피부도 좋고, 무엇보다 그냥 딱 봐도··· 배우라는 아우라 같은 게 느껴져요.”

“조금만 더···.”

애기처럼 계속 보채자 옆에 앉아있던 원로배우 윤복자가 웃으며 말한다.

“어휴, 그만 해. 김준호씨 잘생긴 거 모르는 사람이 대한민국에 있을까? 두 미남이 나란히 앉아 있으니, 보는 내 눈이 다 호강하네.”

“오, 다들 와 계셨네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윽고 하윤성 감독과 송희연 작가가 등장하자, 모든 배우, 매니저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 여기 그런 배우 있어요 (2) > 끝

ⓒ 윤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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