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듀스 나노머신-61화 (61/124)

< 풍요로운 4월의 어느 날 (4) >

두구두구두구두구.

긴장감을 더해주는 요란한 음악소리와 함께 화면에 집계된 수치들이 하나, 둘 표시되면서 이내 커다란 글자가 화면에 가득 떠오른다.

1위 플레어.

“축하드립니다. 이번 주 투데이 뮤직 1위는 플레어입니다!”

MC의 환호성과 함께 하늘에서 금박지가 팟 터지며, 눈처럼 내려온다.

둥실둥실 떠다니는 금박지가 하나, 둘. 머리와 어깨, 그리고 발등위에 내려앉는다. 잠시 동안이었지만 세상이 온통 반짝임으로 가득 하다.

그 찰나 엄청나게 많은 것들이 눈앞을 스치듯 지나갔다. 부모님의 얼굴, 그리고 영삼이가 내게 처음 온 순간, 멤버들과의 만남, 언제 데뷔할지도 모르는 불안감속에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티며, 지내온 나날들.

내가 이날을 위해 여태껏 그 많은 나날들을 살아왔다고 생각하니까 가슴속에서 뭔가가 울컥 치 솟는다.

- 맥박 속도가 빨라집니다. 심심 안정화 모드를······.

영삼이의 목소리에 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냅둬, 인마.

지금은 그냥 느끼고 싶으니까.

MC가 트로피를 내게 건네주고, 신소라와 몇몇 가수들이 축하해준다는 눈길과 말을 건네주고 무대 아래로 내려갔다.

MC가 다가와 물었다.

“첫 음악방송 1위를 하셨는데, 지금 심정이 어떠신가요? 어··· 지금 우시는 건가요?”

아, 어떻게 하지? 너무 좋아서 표정관리가 안 된다.

음원 1위할 때도 이정도로 기쁘진 않았는데. 눈시울에 뭔가가 맺히며 툭툭 아래로 흐른다.

관객석에서 ‘울지 마,’ ‘울지 마.’ 소리치는 팬들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온다.

나뿐 만이 아니다. 멤버들 중 안 울고 있는 녀석이 한 명도 없다.

내가 감정을 추스르며 간신히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모두 팬 여러분들 덕분입니다. 묵묵히 늘 뒤에서 응원을 해주는 가족, 회사식구들, 그리고 멤버들과 팬클럽 코로나 여러분. 앞으로도 영원히 같이 했으면 좋겠습니다.”

간신히 소감을 마치자 MC가 앵콜 무대를 울부짖으며 내려간다.

그리고.

눈물범벅이 된 우리가 노래를 시작하자, 팬덤 구별 없이 켜진 형형색색 응원 봉에서 빛이 새어나온다. 알록달록한 빛이 좌우로 흔들거리며 예쁘게 수놓는다.

아름다운 밤이다.

*

오디션 룸.

단아한 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배우가 가슴에 손을 얹고, 한손을 떠나가는 남자를 붙잡는 아련한 모습을 취한다. 곧 눈물이라도 떨어트릴 것 같은 표정이 얼굴 위로 자리 잡는다. 오열하듯 벌어진 입에서 고조 없는 투박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어떻게, 어떻게 나를 두고 그렇게 떠날 수가 이써어어- 어?”

목소리가 갈라지며 삑사리가 났다.

“아, 죄송합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제가 목 컨디션이 안 좋아서.”

옆에 놓인 물을 마신 뒤 여자가 심사위원석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인다.

“아아.”

목청을 가다듬고,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감정을 가다듬는다.

세 사람은 여자배우가 첫 대사를 치는 순간부터 얼어붙어 미동조차도 없다.

어떻게 배우라는 작자가 저런 연기를 아무런 창피함도 거리낌도 없이 펼칠 수가 있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철면피가 아닌 이상 저럴 수는 없다.

어떻게 저게 3년차 여배우의 연기라고 할 수가 있는 거냐고!

저건 삑사리를 내고 안내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냥 하나부터 열까지 다 엉망이다. 호흡부터 발음, 시선처리, 표정까지.

고문당하던 표정으로 전방을 주시하던 하윤성 피디가 손을 내젓는다.

“됐어요! 충분해요. 그만 봐도 될 것 같아요.”

“아니, 저는 아직 조금 더 보여드릴 수가 있는데. 골목에서 헤어지는 씬 3을 다시 한 번 해볼까요? 그거라면 지금 것보단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표정으로 여배우가 적극적으로 자신의 연기를 어필하려고 든다.

“김수연씨, 연기 잘 봤어요. 이제 돌아가셔도 될 것 같아요. 배역에 맞는지는 조금 더 상의해보고 회사 측으로 연락드릴게요. 수고하셨습니다.”

“꼭 그 배역이 아니어도 좋으니 아무 거나 시켜만 주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꼭 연락 주세요. 꼭이요!”

미련이 덕지덕지 남은 눈길로 몇 번씩 뒤를 돌아보던 김수연이 나가자, 하윤성 피디가 송희연 작가에게 작게 속삭인다.

“저 친구 연기 좀 늘었다고 하지 않았어요? 내가 보긴 그대론데요? 송 작가님이 보시긴 어때요?”

송희연 작가가 한숨을 쉰다.

“하 피디 마음이 내 마음이겠죠. 뭐.”

아까부터 얼음처럼 굳어 있던 문대표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이내 벌떡 일어선다.

“내 그렇게 리스트에 올릴 때 두 번, 세 번 체크하라고 했는데, 내 이놈의 자식들을 그냥···! 매니저들한테 돈 받아쳐먹은 거 아니면 눈알이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아까부터 캐스팅 디렉터를 잡아서 죠져 놓겠다는 듯 죽이네 살리네, 이 말을 한 백번쯤은 한 거 같다.

한참동안 광분하더니.

“하아··· 우리나라에 이렇게 배우가 없었나?”

머리를 쥐어뜯으며, 다시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다. 다음 대기자가 들어오기 전까지의 짧은 시간. 그가 옆에 앉은 두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그나저나 김준호씨 괜찮겠어요? 듣자하니 말 좀 나올 것 같던데······.”

“뭐가요?”

“김준호씨 요즘 몸값 많이 올랐잖아요. 현장 핸들링 되겠냐는 말이죠.”

“왜요? 김준호씨 성격 까칠하대요?”

“원래 그렇게 갑자기 뜬 배우들이 좀 다루기 힘들잖아요. 보나마나 드라마 몇 편 찍다보면 생방송처럼 될 텐데, 드라마 많이 안 찍어본 주연급 배우들은 그런 거 못 견뎌 하는 친구들 많아요. 그래서 솔직히 좀 걱정되긴 하네요.”

“뭐, 살살 달래가면서 해봐야죠. 이미 캐스팅까지 끝난 마당에.”

“하긴.”

고개를 끄덕거린 문대표가 화제를 다른 쪽으로 바꾼다.

“이번에 SBN에서 편성 받은 작품 중에 이정숙 작가 것도 포함되어 있다면서요? 장르도 로코물이고. 들리기론 대본도 잘빠졌다고 하던데.”

“그거 왠지 느낌이 망할 것 같던데요? 주연 캐스팅이 엉망이더라고요. 약 먹고 캐스팅한 게 아니라면 도저히 이해 못할 캐스팅이에요.”

“주인공 확정 났대요? 누구래요?”

“송민정이요.”

“가만. 설마 그 송민정이요···?”

얼마나 당황했는지 말도 제대로 못 잇는다. 로봇, 발연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하는 모델출신 송민정이라면 말 다한 셈이긴 하다.

“맞아요. 그 송민정. 듣자하니 제작사 쪽에서 송민정아니라면 투자 안하겠다고 하던데, 그 대표가 송민정 스폰서라는 이야기도 있더라고요. 하여튼 느낌이 별로예요. 느낌이.”

문대표의 시선이 한 칸 건너에 앉아 있는 송희연 작가에게로 향한다.

“그나저나 송 작가님은 의외네요. 오늘 안 오실 줄 알았는데.”

“안 올 계획이었죠, 원래는. 조연 캐스팅 오디션 장에까지 작가가 쫓아다니면 너무 극성맞아 보이잖아요.”

“그런데요?”

“확인해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요.”

“오늘 오디션 보러 온대요? 송 작가가 기대하는 배우가 누굴까? 이름이 뭔데요?”

“배우 아니에요.”

송희연 작가가 딱 잘라 말한다.

“네? 배우가 아니라고요?”

“네, 아니에요. 아이돌이에요. 남자 아이돌.”

문대표의 표정이 기괴해진다. 도대체 누군데 하는 표정이 떠올라있다.

“최강민씨, 들어갑니다.”

그때 문이 열리며 직원이 누군가의 이름을 호명한다.

잠시 후, 말끔하고 훤칠한 남자 한 명이 열려진 오디션장 문을 밀며 들어온다. 송 작가가 정면을 응시하며 나지막하게 웃는다.

“아, 마침 들어오네요.”

*

“플레어? 5인조 남자 아이돌 그룹 멤버네요? 게다가 연기경력은 일절 없고, 오디션도 이번이 처음이고. 원하는 배역은 박선우··· 역?”

프로필을 넘겨 읽어 내리던 하윤성 피디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송희연 작가에게 속삭인다.

“송 작가님. 박선우 역할 결코 작지 않잖아요. 그런데 박선우 배역을 추천했어요?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 거예요?”

“그러니까요. 나도 내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서 확인하러 나왔어요.”

“아, 그냥 확 꽂히셨나보구나?”

“일단 오디션부터 봐보죠. 나도 내 안목이 아직도 쓸 만한지 궁금하니까.”

“그래요, 그럼. 그래도 일단 비주얼면만 놓고 보자면 다른 지원자들보다 훨씬 좋네요. 박선우 이미지와도 잘 어울리는 것 같고.”

세 사람의 시선이 전방으로 향한다.

185cm는 족히 되어 보이는 큰 키, 아이처럼 말랑말랑해 보이는 뽀얀 피부, 스물 초반답지 않게 눈빛은 살아있고, 깊이가 있다. 여자들이 환장할 만한 얼굴이다.

옷차림도 슬랙스와 흰색 셔츠차림인데, 배역과도 딱 맞아 떨어진다. 실제로도 박선우역은 고등학생 역할이라 교복을 입어야하는 씬이 대부분이다.

“안녕하세요. 최강민입니다.”

목소리도 꽤나 근사하다.

일단 외적인 부분은 합격이다. 박선우 역 오디션을 봤던 그 어떤 배우들보다도 가장 박선우와 이미지가 흡사하다.

하지만 과연 연기는 어떨까?

고개를 끄덕인 마이크를 켠 하윤성 피디가 정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반가워요, 최강민씨. 잠깐 발아래 좀 보시겠어요?”

발아래로 지름 70cm정도 되는 네모모양의 테이프 선이 그러져있다.

“앵글라인이에요. 정면에 비디오카메라에 불 들어와 있는 거 보이시죠? 앵글 안에 잡히게끔 만들어놓은 거예요. 카메라 테스트도 같이 진행할거니까 그 네모선 안에서 연기를 해주시면 됩니다. 이해하셨죠?”

“네.”

“그러면 시작해주세요.”

보통 배우들은 배역에 빠져들기 위해 잠깐의 시간이 필요하다. 목청도 가다듬고, 안면근육도 움직이면서 얼어있는 입을 푼다. 감정을 다잡기 위해 최소한의 시간인거다. 스스로에게 최면을 거는 거지.

나는 연기자다 나는 연기자다 하면서.

그런데, 대체 이놈은 뭘까?

슬금슬금 눈치를 보던 녀석의 눈빛이 한순간 180도 바뀌더니, 말을 하는 건지 대사를 치는 건지 모를 중얼거림을 내뱉는다.

“언제까지···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저를 돌아봐주실 건데요?”

“어? 지금 연기 시작하신 거예요?”

너무 느닷없이 시작한 거라 하윤성 피디가 물었다.

“쉿.”

송작가가 가만히 입가에 검지를 가져다댄다.

“조용히.”

최강민의 연기가 계속해서 이어진다.

“한번이라도 좋으니까, 단 한번 만이라도··· 진심으로 나를 안아줄 수는 없는 거예요? 저 많이 노력했잖아요. 공부도, 미술도, 체육도. 모두 아버지한테 관심 받고 싶어서 열심히 한 거라고. 그런데 당신은 왜 한 번도 나를 돌아봐주지 않는 건데!?”

한 맺힌 날카로운 목소리가 가슴 속에 비수처럼 파고든다.

안정적인 연기 톤, 나무랄 데 없는 시선처리. 표정, 손짓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생명처럼 정적이 휩싸여 있는 공간속에서 피어난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수많은 세월동안 노력한 혼외자식의 한 맺힌 울부짖음.

그걸 본 심사위원들 사이에서 작은 동요가 인다.

그러던 어느 순간 최강민의 표정이 또 다시 확 돌변한다.

MT를 가서 주인공에게 모진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달아나는 여자주인공 한이슬을 쫓는 장면.

“바보같이 왜 말을 못하는 건데? 네가 가난해서? 아니면 저 자식 부모님이 이사장님이라서?”

대답을 하지 못하는 한이슬을 한참동안 바라보더니, 이내 허공을 향해 손을 뻗어 뭔가를 움켜잡는다.

“자, 이걸 봐.”

손바닥을 펼치자 그 안에서 새끼 손톱만한 불을 내는 뭔가가 하늘위로 천천히 날아오른다.

반딧불이다.

그걸 보고 놀라워하는 여주를 상상한 최강민의 표정이 잘 익은 감자처럼 말랑말랑해진다.

“녀석을 사랑해도 좋아. 하지만 나에게 관심 갖지 말란 말은 하지 마. 내 가슴이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걸 어떡하라고. 어차피 혼자 하는 사랑은 나에겐 늘 익숙한 거였으니까. 가끔··· 아주 가끔씩 이정도만 내게 허락해줘. 친구로서···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거잖아?”

하윤성 피디는 남몰래 팔뚝에 올라온 소름을 가만히 쓸어내리며, 벌떡 일어섰다.

저건 박선우다!

하마터면 함성을 지를 뻔 했다. 자신에게 치켜떠진 두 쌍의 눈동자를 보고, 머쓱하니 도로 자리에 앉았다.

최강민이 준비해온 대사를 모두 끝내고 나가자, 하윤성 피디가 흥분한 표정으로 문대표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즉각 문대표가 반응한다.

“아휴, 하 피디 그만 좀 찔러요. 지금 엄청 흥분한 거 알아요?”

“방금 그 친구 연기 봤어요!? 대사 칠 때 시선 처리하는 거. 어휴, 나는 바로 옆에 한이슬이 있는 줄 알았네. 연기 처음이라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연기 한 20년은 한 베테랑 같지 않았어요?”

“봤어요. 봤어. 나도 눈이 있는데 설마 그걸 못 봤을까봐.”

문대표가 손 사레를 치며, 송희연 작가를 쳐다봤다.

“송 작가님은 어땠어요?”

“뭐······.”

대답은 딱히 안했지만 그녀의 눈이 이미 웃고 있다.

문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만장일치네요. 박선우 역은 이친구로 가죠.”

< 풍요로운 4월의 어느 날 (4) > 끝

ⓒ 윤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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