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듀스 나노머신-59화 (59/124)

< 풍요로운 4월의 어느 날 (2) >

스케줄을 마치고, 숙소로 같이 들어온 차조영 실장이 뭔가를 내게 내밀었다. 노란색 서류봉투 안에 들은 1cm가량 두께의 종이뭉치였다.

“꽃미남 학교? 이게 뭐에요?”

“뭐긴, 시놉시스지. 네 앞으로 들어온 거야.”

“네?”

그것을 애들이 치덕치덕 달라붙어 신기한 장난감 보듯 내려다본다. 다들 눈이 동그랗다. 마치 다섯 살짜리 남자애가 생전 처음으로 3단 합체로봇을 본듯한 표정이다.

“그렇지 않아도 회사에서 슬슬 연기레슨이라도 시켜봐야 하는 거 아닌가 말나오던 찰나에 잘됐지. 캐스팅 디렉터가 그러더라. 원래는 리스트 업에 네 이름은 없었는데 작가님이 널 추천했다면서. 이거 쓴 분이 송희연 작가님이시라는데, 혹시 이분 뵌 적 있어?”

그런 고귀한 인맥이 내게 있을 리가.

“아뇨.”

“그래? 그거 참 이상하네.”

내 대답에 차조영 실장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을 잇는다.

“실은 나도 이런 경우는 흔치 않은 경우라 어떤 건가 싶어서 내가 먼저 시놉시스를 한 번 봤거든? 그런데 재밌더라고. 내가 알아보니까 이 작품에 들어갈 수만 있으면 좋을 거 같아. KBN에서 4월 편성 받은 작품이고, 22부작에 남주 여주 캐스팅은 이미 다 끝난 거 같고, 지금 조연 캐스팅 진행 중이래. 감독은 하윤성 피딘데 성격 좋고, 연출력 좋다고 소문이 자자하고. 송희연 작가님 전작이 로코물이었는데, 옥탑방 내고양이라고 들어는 봤지?”

“아, 그거 저도 몇 번 봤어요.”

“그밖에도 조선의 임금, 해와 달 그림자등 전작도 꽤 많아. 이 바닥에서는 알아주는 작가님이라 같이 일하겠다는 배우들이 줄을 섰어.”

듣다보니 한 가지 의문점이 든다.

그런 유명한 작가가 왜 굳이 나를 지목한 거지? 그것도 연기라고는 한 번도 보여준 적도 없는 올해 막 데뷔한 아이돌 멤버를.

사실 지금 와서 고백하는 거지만, 나는 어려서부터 가수보다는 배우 쪽이 더 끌렸다. 그래서 초창기에 연기학원도 다녀보고 그랬는데, 도무지 실력이 늘질 않았다. 연기하는 것을 녹화해서 스스로 모니터링을 해봐도 이건 답이 없다 싶어서 몇 개월 하다가 그만뒀는데······.

그 후로 방향을 틀은 게 춤과 노래 쪽이다.

물론 이것도 그리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진 않았지만, 그래도 연기보다는 성공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더 있어보여서 선택 한 거다.

언젠가는 다시 연기를 해보고는 싶다고 생각해봤지만, 이건 너무 뜬금없게 찾아온 기회 같아서 조금은 떨떠름해졌다.

“그러면 형 이제 드라마도 찍고 영화도 찍고, 청룡영화제 막 이런데 가서 상도 받고 그러는 거예요?”

노아의 말에 차조영 실장이 피식하고 웃는다.

“오버하지 마. 겨우 오디션 볼 기회가 온 것뿐이니까. 떨어질 수도 있어.”

대답을 한 차조영 실장의 시선이 내게 닿는다.

“어때? 강민아. 연기해볼 생각은 있어?”

연기를 해볼 생각이 있는 거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생각이 있다. 그것도 아주 많이.

하지만 그래도 뭔지는 보고 해야지.

“시놉시스 먼저 보고 대답 드려도 돼요?”

내가 묻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차조영 실장이 웃는다.

“물론이지. 오디션이 다음 주라 조금은 시간 있으니. 시놉시스 보고 마음에 들면 내가 대본 받아다 줄게. 아참, 배역은 거기 내가 동그라미 쳐놨는데, 송 작가님이 박선우역으로 오디션 봤으면 하시더라고. 조연이지만 거의 주조연급이고, 작품에서도 역할

비중도 높아. 게다가 악당역도 아니고.”

“주조연이요?”

“응. 대사가 많아서 좀 걱정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런 배역이 신인들한테 오는 게 쉽지 않은 일이니까 도전하는 셈 치고 해보면 좋을 것 같아. 이것도 다 경험이니까. 혹시 또 알아? 네가 또 연기에도 소질이 있을지?”

파이팅을 불어넣으며 내 어깨를 두들겨준 차조영 실장이 나간 후 내 눈은 줄곧 시놉시스 첫 장에서 한참동안이나 떨어지질 않았다.

왠지 모를 두근거림과 작은 열망이 가슴속에서 일렁인다.

마치 누군가 내 안으로 들어와 가슴속에 깊이 파묻어놓은 도화선에 불씨를 당겨놓은 기분.

나는 내방으로 들어와 방문을 닫고 시놉시스 첫 장을 펼쳤다.

‘꽃미남 학교’는 태산 사립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남주와 3대 천왕이라 불리는 2명의 부잣집 친구들. 그리고 새롭게 전학을 오게 된 여자 주인공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로맨스 드라마다.

박선우는 3대 천왕 중에서도 얼굴을 담당하고 있는 부잣집 도련님으로 가난하지만 열정 많고, 쾌활한 여주인공에게 호감을 느끼게 된다.

부잣집 도련님이기는 하나, 계모 밑에서 자라 상처도 많이 받고, 속 터놓고 지낼 친구가 없던 그에게 친구가 되어주겠다는 여주인공을 어느새 친구 이상의 감정으로 느껴버리게 되지만, 남자주인공을 짝사랑하는 여주인공을 보고 속만 끓이다 결국 두 사

람의 사랑을 조용히 응원해주며 물러난다.

책상에 앉은 그자세로 나는 2시간에 걸쳐 등장인물 소개, 줄거리, 소설처럼 첨부되어 있는 스토리까지 다 읽고서야 시놉시스를 내려놓았다.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바로 이거다.

재밌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캐릭터간의 특징이 도드라지게 잘 표현되어 있고, 내용전개, 흐름, 그리고 중간 중간에 툭하고 던져지는 대사들도 하나같이 감칠맛이 있고, 극중 캐릭터간의 케미와 보여 지는 달달함이 보는 내내 사람 가슴을 말랑말랑하게 만든다. 캐릭터 하나하나가 버

릴 게 없다. 심지어는 동네 슈퍼가게 아저씨마저도 존재의 이유가 있다.

시놉시스를 봤는데도 이 정도인데, 드라마로 찍어놓으면 얼마나 더 재밌겠는가?

로맨스를 딱히 좋아하지 않는 나도 이건 드라마로 나온다면 볼 것 같다.

하나같이 다 정감이 가는 캐릭터지만 그들 중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를 꼽으라면 그건 당연히 박선우다.

여주인공과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나눠먹는 장면이나 남주의 심술로부터 여주를 지켜주는 장면. 여자라면 백이면 백. 껌뻑 죽을 수밖에 없는 장면들.

특히 오토바이를 즐겨 타는 박선우가 여주인공에게 헬멧을 씌워주며 하는 대사.

“오토바이와 헬멧만 있다면 세상 어디든지 갈 수 있어.”

그걸 육성으로 따라했다가 순간 소름에 닭이 되는 줄 알았다.

아, 오글거려.

그런데 그마저도 좋다.

보다보니 왜 차조영 실장이 도전하는 마음으로 해보자고 한지 이해가 간다.

주연을 빼면 등장인물들 중에 대사도 가장 많고, 표현해야하는 내면 연기 비중도 크다.

솔직히 말해서 이제 막 데뷔한 남자아이돌이 하기에는 결코 녹록치가 않아 보이는 배역이다. 아마도 괜히 헛된 기대감을 품고 도전했다가 오디션에 떨어지면 실망할까봐 그런 말을 한 것 같은데······.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놓고 있기에는 아까운 배역임이 틀림없다.

나는 핸드폰을 쥐고는 단축키를 눌렀다.

-어, 강민이니?

“저, 실장님 시놉시스 다 봤는데요.”

-벌써? 어땠어?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음··· 재미있어요. 그래서 말인데 대본도 받아볼 수 있을까요? 박선우역 오디션 꼭 보고 싶어요.”

수화기너머로 작은 웃음소리와 함께 대답이 들려온다.

-그럴 줄 알고, 내가 이미 대본 부탁해놨어. 내일 아침에 숙소로 가져다줄게.

“고맙습니다. 실장님.”

-그게 내가 하는 일인데 고맙기는. 그러면 피곤할 텐데 얼른 자. 내일 스케줄 가려면 조금이라도 더 자야지.

“네, 내일 봬요.”

차조영 실장은 나보고 일찍 자라고 했지만, 나는 거의 뜬눈으로 아침을 맞이했다.

박선우 대사가 자꾸 눈에 밟혀 도통 잠들 수가 있어야지. 크리스마스이브 날 트리에 양말 걸어놓고, 선물을 기다리다 잠든 애가 어떤 심정인지 이제야 알겠다.

이건 고문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자, 여기.”

시놉시스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두툼한 종이뭉치가 내게 전해졌다.

그토록 기다리던 꽃미남 학교의 대본이다.

“일단 1, 2화분만 챙겨왔어. 이정도만 되도 캐릭터 분석하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을 거야.”

나는 그 시간 이후, 차로 이동하는 시간, 개인시간, 휴식시간, 자는 시간까지 아껴서 읽은 대본을 보고, 또 보고 계속 봤다.

사실 외우는 것은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영삼이는 한번 본 것을 그대로 나에게 전달을 해줄 수가 있으니까. 절대 대사를 잃어버릴 걱정은 없지.

허나, 머릿속에 있는 것을 떠올리는 것과 종이로 된 활자를 읽는 것은 그 맛이 전혀 다르다. 또한 의미 전달부분에서도 차이가 크다.

활자를 한자 한자 읽어 내리는 매 순간들이 마치 미지의 동굴 속을 한발자국씩 내딛는 탐험가가 된 기분이랄까. 몰입도 더 잘되는 것 같고. 그 어떤 떠오르는 장면들을 되새김질하기에도 좋다.

뭐, 아무튼 이렇게 대본을 들고 읽고 있자니 왠지 내가 박선우가 된 듯한 기분마저도 든다.

이윽고 달리던 차가 서서히 속도를 줄이기 시작하더니, 하얀색 큼지막한 건물앞 주차장으로 서서히 진입을 시작한다.

“얘들아. 다 왔어. 이제 내릴 준비하자.”

보조석에 앉은 차조영 실장이 백미러를 보며 말한다.

눈앞에 보이는 WBS방송국.

오늘은 투데이 뮤직. 생방송이 있는 날이다.

플레어가 음방 1위 후보에 올라간 역사적인 날.

주차장에서 내리자 외부인을 통제하기 위해 길게 쳐놓은 펜스 뒤에는 음악방송 출연자들을 보기 위해 기다리는 팬들이 가득했다. 찍덕들이 휴대용 캠코더나 성능 좋은 카메라, 핸드폰등을 들고, 연예인들이 지나갈 때마다 촬영, 혹은 셔터를 눌러댄다.

“여기요. 여기 잠깐 봐주세요!”

지나가는 가수들이 저마다 짧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준다.

개중에는 일반인들이 지니고 있기에는 고가의 장비들도 보인다. 꼭 전문적인 사진작가나 촬영감독들 같다.

앵글에 얼굴을 가져다대는 표정들부터가 진지해.

“오늘은 홈마들도 많이 보이네.”

“홈마요?”

차조영 실장의 말에 우리 옆을 따라 걷던 매니저가 고개를 갸웃한다. 차윤성이라고, 이제 막 군대에서 제대하고, 일을 배워보려고 들어온 로드라고 하는데 차조영 실장의 사촌동생이란다. 원래 근골이 장대한 게 집안 내력인지 새로 온 매니저도 등빨이 만만치가 않다.

“팬 홈페이지 마스터라고. 다른 팬들과 공유, 혹은 홍보 목적으로 개인 홈페이지에 정기적으로 사진 올리는 애들인데, 쟤네들 홈페이지에 올라가는 사진 몇 장이 어지간한 홍보 사진들보다 나아. 퀄리티나 내용면에서도 좋고. 쟤네들이 붙었다면 인기가 있다는 증거지. 쟤들은 아무나 찍는 애들이 아니거든. 웃어, 웃어.”

차준영 매니저가 그 말을 듣고, 험상궂은 얼굴을 피며 열심히 웃는다.

“너 말고. 애들.”

“아.”

“그래도 너도 웃어. 괜히 플레어 매니저 조폭같이 생겼다고 말나오면 팬들이 매니저 바꿔달라고 항의하고, 그러니까.”

그 말을 들은 차준영 매니저가 또 다시 입 꼬리를 벌리며, 열심히 웃는다. 어찌나 열심히 웃던지 뺨 근육이 파르르 떨릴 정도다.

우리는 다 같이 그걸 보고 한참동안이나 웃었다.

펜스 끝 무렵에 다다를 무렵 차조영 실장이 한 무리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춰 섰다.

코로나라는 현수막을 들고 있는 무리 떼였다. 우리를 발견하자 꺅꺅 거리며 난리도 아니다. 개중에는 익숙한 얼굴도 보인다.

우리가 다가가 아는 체를 해가며 ‘오늘도 와줘서 고마워.’ ‘밥은 먹었어? 배는 안 고파?’ 이런저런 인사를 건네주자 애들이 좋아 죽는다. 저러다가 실신할까봐 염려될 정도다.

“오빠들 오늘 무조건 1위해요!”

“힘내요. 오늘도 안전하고 무사하게. 아셨죠? 다치면 저희 속상해요!”

잠깐 멈춰 서서 사인을 해주고, 인증 샷도 찍어주는데, 차조영 실장이 차준영 매니저에게 넌지시 말한다.

“애들하고 잠깐 말 좀 하고 갈 테니까. 먼저 대기실 찾아서 들어가 있어. 그 정도는 혼자 할 수 있지?”

“네.”

우리가 손을 흔들며 사라지자 차조영 실장이 한빛나에게 슬쩍 물었다.

“못 보던 얼굴들이 많아 보이는데?”

“네. 신입들이 많아서 제가 당분간 데리고 다니면서 실습 시켜 주기로 했어요.”

“고생 많네. 뭐 어려운거나 도와줄건 없고?”

“다른 팬덤들 견제 들어오는 것 외에는 딱히 없어요. 요즘 플레어 오빠들 인기 급상승해서 덕질 할 맛이 난다니까요? 예전에는 플레어 팬덤이라면 팬덤 층 사이에서는 은근히 무시하는 분위기였는데, 요즘에는 인지도도 많이 올라 어디가서도 안 꿀려요.

영업하면 반응도 바로바로 올라오고. 요즘 같기만 하면 진짜 좋겠어요.”

“다 너희들 덕분이지. 조만간 팬 미팅 한 번 추진하자. 근사한 곳 빌려서.”

그 말을 들은 한빛나의 눈이 보기 좋은 반달모양으로 접힌다.

“진짜요? 오늘 꼭 1위해서. 1위 기념파티도 같이 하면 좋겠어요!”

“그래야지. 오늘 분위기는 좀 어때?”

“첫 1위 후보니까 무조건 하자는 분위기죠. 저도 마지막까지 힘내자고 회원님들 독려하고 있어요.”

“어, 그래. 마지막까지 힘내보자고.”

주먹을 움켜쥔 차조영 실장이 사라지자 한빛나가 눈에 이름 그대로 빛을 내며 회원들에게 말한다.

“공카에도 공지해 놨듯이 다들 음원 스밍, 뮤비 스밍 계속 돌리시고요. 모르시는 분들 위해서 다시 한 번 설명해드릴게요! 1위 후보 발표되기를 기다렸다가 투표 시작됩니다. 멘트 나오면 문자 투표 종료 안내나올 때까지 주변 지인 최대한 이용하세요. 그리

고 어플 다운받아서 로그인 메뉴바 터치한 다음 곡 투표 꼭 눌러주시고요. 아참, 참고로 투데이 뮤직은 바나나 어플에서 스밍 돌리시는 게 제일 반영 잘 돼요. 설마 스밍 한 달권 만원도 안하는데 그거 아끼시려는 분은 없으시겠죠?”

“네!”

대답을 하는 회원들 표정이 마치 훈련소에 막 입소한 훈련병들 같다. 한빛나와 마찬가지로 회원들도 결사의 의지로 눈빛이 반짝반짝하다.

“마지막까지 끝까지 최선을 다합시다! 음방 1위 무조건 합시다!”

“네!!!”

< 풍요로운 4월의 어느 날 (2) > 끝

ⓒ 윤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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