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풍요로운 4월의 어느 날 (1) >
시커먼 암막 커튼을 도배하듯 창문을 틀어막은 거실. 모니터가 놓인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중년 여성이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머리를 헝클어트린다.
모니터 옆에는 ‘꽃 미남 학교’라고 큼직하게 쓰여 있는 시놉시스가 놓여있다.
“오늘 것도 다 갈아엎어야겠네. 신경질 나 죽겠네. 진짜!”
“송 작가님. 뭐가 잘 안되세요?”
맞은편에서 노트북으로 열심히 타이핑을 치던 스물 중반의 여성이 고개를 들며 묻는다. 송 작가의 일을 도와주는 보조 작가다.
“박선우 캐릭터 때문에 고민이야.”
한숨을 내쉰 송 작가가 푹신한 의자위에 축 늘어진다. 보조 작가가 고개를 갸웃한다.
“박선우라면··· 남주 친구역이잖아요? 걔가 왜요?”
“쓰다 보니 자꾸 비중이 늘어나는 거 같아서.”
“그게 왜 고민이세요? 박선우라면 조연 중에서도 비중 있는 역이니까 비중 좀 늘어도 상관없지 않아요?”
“그야 그렇지. 헌데 이 역할을 제대로 살려줄 배우가 있을까 싶네. 그것 때문에 요즘 걱정이야. 비중을 낮추고 싶은데도 자꾸 박선우 캐릭터에 욕심이 나서 쓰다 보니 역할이 너무 어려워졌어.”
고민을 털어놓은 송 작가가 속내를 털어놓듯 내뱉는다.
“아, 진짜 이번 드라마는 진짜 잘 돼야 하는데.”
“에이, 너무 걱정 마세요. 주연 캐스팅도 끝났고, 지상파 KBN에 제작사 빵빵하지, 대본도 잘 나오고 있고. 김 피디가 편성도 황금 시간대 잡아준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대체 뭐가 걱정이세요? 이건 망하고 싶어도 망할 수가 없는 작품이라니까요?”
“그러면 뭐해. 주연이 김준호인데!”
“왜요? 김준호가 어때서요? 요즘 제일 핫한 남자 배운데. 송 작가님도 캐스팅 회의 때 딱히 반대 안하셨잖아요?”
보조 작가가 눈이 동그래져서 묻는다.
한숨을 내쉰 송 작가의 말이 그 뒤를 따른다.
“그거야. 남주 후보들 중에서는 제일 나았으니까 그랬지. 내가 예전에 걔 연기하는 거 직접 본적이 있는데, 살다 살다 그렇게 연기가 안 느는 애는 처음 봤어. 걔는 어쩜 신인 때랑 지금이랑 나아진 게 하나도 없니? 그나마 여주가 장선화여서 다행이지. 장
선화 캐스팅 못했으면 이거 어쩔 뻔 했어?”
“하긴, 그건 그러네요.”
보조 작가도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장선화는 대한민국에서 몇 안 되는 아역출신 여배우로 연기경력만 10년이 넘는 20대 초반의 몇 안 되는 연기력을 갖춘 여배우다.
김준호와 비슷한 나이또래긴 해도 둘의 연기력은 급이 틀리다. 자동차로 따지면 경차와 고급세단 정도의 차이?
김준호가 어느 날 갑자기 일약 스타덤에 앉았다면 장선화는 차근차근 실력파 여배우로서의 이미지로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 김준호가 연기력은 조금··· 아니 많이 딸린다고 해도 장선화정도의 여주인공이 옆에서 받쳐준다면 그럭저럭 볼만한 장면은 나올
거다. 일단 김준호가 비주얼은 되니까.
세간에서는 역대급 비주얼 커플이 나오는 거 아니냐는 말까지 나돌 정도다.
“김준호가 얼굴만 조금만 더 못생겼어도 그냥 발로 걷어차 버리는 건데 말이야. 나는 걔가 왜 그렇게 인기가 많은지 도통 모르겠다, 진짜.”
“실은 저도 그래요.”
모처럼 죽이 맞은 두 작가가 히죽거린다.
“커피나 한잔 가져다 드릴까요?”
“어, 고마워.”
보조 작가가 커피를 준비하는 사이 송작가라고 불린 여인이 기지개를 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암막 커튼을 걷자 20층에서 보는 탁 트인 한강 풍경이 발아래로 펼쳐진다.
잔잔하게 흐르는 한강의 물결과 고즈넉한 둔치의 풍경. 하늘 위로 솜사탕처럼 푹신푹신한 구름까지 한눈에 다 들어온다. 혼자 보기는 아까울 정도로 기가 막힌 전경이다.
그 같은 전경을 내려다보고 있자 어느 샌가 날카롭게 치솟은 눈썹이 슬금슬금 내려간다. 평온이 찾아온다.
“여기요. 작가님.”
“응, 땡큐.”
송작가가 보조 작가가 갖고 온 커피를 받고, 그것을 홀짝인다.
따뜻한 카페인이 목구멍을 타고 들어오자 조금은 살 것 같은 표정이 됐다. 동글동글한 안경을 벗고, 미간을 문지르자 동태눈알마냥 흐리멍덩했던 눈도 점차 활력을 찾는다.
그래, 바로 이 맛이지. 원고에 찌들어 있다가 마음의 평온과 안정을 가져다주는 서정적인 풍경을 보면서 즐기는 한 잔의 커피.
“끝내준다.”
“뭐가요?”
“일에 찌든 후, 이렇게 내려다보는 전경이? 막 어쩔 땐 카타르시스까지 느껴진다니까?”
“어휴, 송작가님 이쯤 되면 일중독이시다, 진짜.”
못 말리겠다는 듯이 고개를 흔든 보조 작가가 자신의 커피도 들고 오더니, 이내 송작가와 함께 나란히 거실 베란다 앞으로 붙는다.
“그런데 저기 사람들이 왜 이렇게 몰려있어?”
“어? 그러네요.”
송작가가 가리킨 곳을 내려다보니 유독 사람이 몰려 있다.
뭔가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촬영 하나본데요? 카메라가 세팅되어 있는걸 보니까.”
“촬영? 무슨 촬영?”
“그거야 저도 모르죠. 원래 여기 풍경 예뻐서 화보나 그런 촬영 자주하잖아요.”
보조 작가가 어깨를 으쓱거린다. 족히 백 명은 넘어 보이는 사람들의 운집. 그것을 보고 있던 송 작가의 눈에 서서히 호기심이 어린다.
“자기, 바람도 쐴 겸 우리 잠깐 내려가서 구경할까?”
*
한강 둔치. 벚꽃이 서서히 피어나기 시작하는 아름다운 4월이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자전거를 타는 이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신혼부부들, 데이트를 즐기려는 지 손을 잡고 다정한 모습으로 거닐고 있는 커플들까지. 그리고 촬영 현장을 구경하기 위해 모여든 북적거리는 많은 인원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거기 안으로 들어오시면 안돼요! 조금 더 뒤로 물러나주세요!”
“어어, 거기 선 밟으면 큰일 나요. 조심조심.”
빛을 뿌리는 조명기구들과 그것에 맞춰 반사판을 이리저리 대보는 스태프들.
오늘은 플레어의 화보 촬영이 있는 날이다.
멤버들 개인 화보와 단체 화보를 동시에 진행한다. 어디 무슨 잡지에 실을 거라고 그러는데, 어떻게 알고 왔는지 팬들이 스무 명 정도 따라와서는 힘내라고 응원의 말을 전해주며, 챙겨온 따뜻한 차와 쿠키, 김밥등을 건네준다.
그중에는 이제는 얼굴이 익숙한 한빛나도 끼어 있다.
“코로나는 이쪽으로 모여주세요!”
코로나는 공식 팬클럽 명칭이다.
태양의 대기 현상인 플레어와 표면 현상인 코로나.
코로나는 태양대기의 가장 바깥층을 구성하고 있는 부분으로 플레어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형제 같은 녀석이다.
“회원 분들은 모두 정열유지하면서 정해진 수칙을 유념하여 행동해주세요. 거기요! 혼자 개별 행동하시지 말라니까요?”
지목당한 회원이 움찔하며, 도로 무리로 합류한다.
이제는 팬클럽 매니저다운 티가 팍팍 난다. 알아서 팬들을 관리하고, 현장에 나와 진두지휘를 하는 게 꼭 전쟁터에 나온 장군 같다.
“오늘 현장 처음 나온 신입 팬 분들도 있으니까. 당부 사항 전해드릴게요. 혹시 촬영 들어가면 괜히 오빠들 눈길 받아보려고, 오빠들 이름 부르거나 그러지시면 안돼요. 괜히 오디오 잡혀서 잡음생기면 팬들 때문에 한 번 촬영 간다고 감독님 싫어하시니까.
갖고 온 개인용품들, 특히 쓰레기가 될 만한 것들은 모두 싸가지고 집에 가지고 가서 버리시고요. 현장 주변 청결에 특별히 신경써주세요. 괜히 팬들 몰려서 주변 더러워졌다는 소리 들리면 그것도 오빠들 이미지 먹칠하는 거예요. 저희는 얌전히 지정된 장소에서 조용히 응원을 하는 겁니다. 다들 아셨죠?”
“네에.”
스무명 정도의 정회원들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을 한다. 차조영 실장이 그런 한빛나를 보며 손짓 하자 그녀가 인사를 꾸벅한다.
“안녕하세요. 실장님.”
“빛나야 잠깐 이리 좀 와볼래?”
대답을 하고, 쪼르르 달려가는 한빛나를 보며 신입 회원들이 뒤에서 숙덕거린다.
“와, 우리 매니저님 저기 실장님이랑도 되게 친해 보인다. 그쵸?”
“저번에 보니까 실장님 개인번호도 알고 있던데요? 제가 통화하는 거 들었어요.”
“진짜요? 와, 대박. 그런데 제가 현장 나오는 건 처음이라서 그런데 원래 이렇게 현장에 나오면 수칙 뭐 이런 게 빡세나요?”
옆에 회원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다른 팬클럽에 비해서 저희는 특히나 더 그래요. 혹시나 오빠들한테 피해 안 가게 하려고 매니저님이 얼마나 빡세게 구는데요. 그래도 여기는 그것만 잘 지켜주면 분위기 진짜 좋아요. 오빠들도 촬영하다가 틈틈이 와서 말도 걸어주고, 안부도 물어주고 그래요. 사진 찍어주는 건 기본이고요.”
옆에 회원 한 명이 말을 더 보탠다.
“맞아요. 인지도 조금만 쌓이고, 인기 좀 얻는다 싶으면 팬들 무시하고, 귀찮아하고 그러는 그룹도 진짜 많아요. 헌데 플레어오빠들은 그런 거 전혀 없어요. 인성도 진짜 좋아요. 매니저님들도 다 친절하고. 아마도 꽃달래님도 덕질 조금만 해보면 금방 오빠들한테 빠지실 걸요?”
팬들의 대화를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여성 두 명이 속닥거린다.
“플레어? 쟤들 이름이 플레어야? 내가 아이돌 그룹은 잘 몰라서.”
“네. 요즘 제일 핫한 그룹이에요. 저도 저 그룹 노래 자주 듣는데, 노래 진짜 좋아요. 와 진짜 다들 잘생기긴 잘 생겼다. 어머··· 송작가님 최강민이에요! 실제로 보니까 얼굴 진짜 작다. 저기요, 저기.”
보조 작가가 한강을 배경으로 사진 촬영을 하고 있는 누군가를 가리킨다.
그걸 보고 있던 송작가의 눈이 점차 가늘어진다.
“누구?”
“지금 개인화보 촬영 찍고 있는 애요. 와, 비주얼이 진짜··· 쟤는 근데 왜 저 얼굴로 아이돌을 하고 있대? 얼굴 낭비가 따로 없네. 그냥 배우나 하지.”
송작가가 보조작가가 가리키는 방향을 쳐다봤다.
가지런하게 정돈된 차분한 머리,
어려보이는 외모답지 않게, 깊이 있어 보이는 눈빛, 훤칠한 키와 잘 다듬어진 균형잡힌 몸매, 평범한 캐주얼차림의 청바지와 티셔츠를 걸쳤을 뿐인데 그 모습이 헉소리가 난다.
확실히 아이돌하기에는 아까운 외모다.
촬영 감독 주문에 몇 가지 포즈를 연달아 취하는데, 우스꽝스러운 포즈마저도 계속 눈길이 간다.
“강민씨! 조금 더 공격적인 포즈로. 야성미가 살아 숨쉬는··· 그런 포즈 있잖아요.”
“감독님 이렇게요?”
포즈와 표정이 조금 전과는 완전히 상반되게 바뀐다. 재킷 한 쪽을 어깨 아래로 늘어트리며 도발적인 포즈를 취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드넓은 초원을 달리고 있는 얼룩말을 보는 것 같다.
감독이 얼떨떨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정신없이 셔터를 누른다.
“그렇지! 바로 그거야! 대충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네. 강민씨 진짜 아마추어 맞아?”
“하하하, 감사합니다.”
심지어는 목소리마저도 좋다.
카메라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한 자연스러운 시선 처리와 포즈, 주변 환경과는 상관없다는 듯이 자신만의 공간속에서 빠져 저런 연기를 펼친다는 것은 전문 연기자나 가능할법한 일이다. 주변 의식을 크게 안하니 보는 사람들도 몰입이 확확 된다.
대사 한줄 싣지 못하는 한 장의 사진에 포즈, 표정만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것을 보는 이에게 전달하는 것 또한 엄청난 연기력이 필요한 거다.
그걸 갖췄네. 쟤가.
최강민에게서 한참동안이나 눈을 떼지 못하고 있던 송 작가가 보조 작가에게 넌지시 묻는다.
“자기야, 저 친구 올해 몇 살이지?”
“최강민이요? 아마 스물 셋? 넷? 그쯤 됐을 걸요?”
“진짜? 혹시 저 친구 드라마나 영화에 출연한 작품 있어?”
“아니요. 데뷔도 이제 막 했는걸요?”
“음. 그래?”
말도 안 된다. 고작 그 정도의 나이에 전문 연기자도 아닌, 아이돌이 그걸 갖고 있다니.
전문적으로 배운 것 갖진 않았으니, 그냥 타고 났다고 봐야하나?
그래도 만약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그런 선천적인 재능이 있다면······.
“다음 주에 우리 조연급 비공개 오디션 있지?”
“네.”
“그러면 캐스팅 디렉터한테 전화 좀 해줘. 리스트에 최강민도 좀 넣어달라고.”
보조 작가의 눈이 커진다.
“네에? 최강민을요? 무슨 배역으로요?”
“박선우역으로. 진짠지, 아닌지는 그때 가서 확인해보면 알겠지.”
< 풍요로운 4월의 어느 날 (1) > 끝
ⓒ 윤민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