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뢰라는 것이 생기면 (2) >
텁텁한 공기. 환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 모니터를 주시하며 게임, 혹은 웹 서핑에 열중인 사람들. 어둡지만 사물을 분갈 할 만한정도의 은은한 조명.
전형적인 피시방의 풍경이다. 나를 발견한 여자 알바, 혹은 직원일지 모르는 아가씨가 큼지막한 안경을 쓴 채 나를 향해 인사한다. 이제 막 스무 살이나 넘어 보인다.
“어서 오세요.”
나도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직은 오전시간대라서 그런지 사람은 거의 없다. 밤을 샌 듯 보이는 꾀죄죄한 몰골의 남녀 한 쌍과 추리닝차림의 남자 몇 명이 전부.
음. 그러니까 여기란 소리지?
-몇 번 좌석이야?
내가 영삼이에게 물었다.
-34번이요.
좌석 칸막이에 붙어 있는 번호를 체크해서 확인해보니, 카운터에서도 한참 떨어진 맨 구석자리다. 왜 꼭 나쁜 일을 저지르는 녀석들은 왜 이런 구석을 좋아하는 걸까?
“······.”
역시나 예상대로 좌석은 비어있다.
이걸 이제 어쩐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훑었다. 몇 걸음 떨어진 곳 천장에 CCTV가 달려 있는 것이 보인다. 보안용 CCTV인 것 같은데, 잘하면 얼굴이 찍혔을 수도 있겠다 싶다.
-저거 작동되고 있는 거야?
-네. 빨간불이 들어와 있는 게 녹화중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 혹시 게시 글이 올라왔던 시간에 누가 찍혀있는지 확인할 수 있어?
-저건 폐쇄회로 TV라 녹화 분 영상이 메모리카드에 저장되기에 제가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음. 그렇단 말이지? 그러면 내가 직접 확인하면 되지.
나는 카운터로 성큼 다가갔다.
안경 쓴 여자애가 나를 보고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묻는다.
“손님,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으음. 이걸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나를 쳐다보고 있던 여자애의 눈초리가 이상해지더니, 이내 눈이 동그래진다.
“어? 혹시······.”
여자애가 검지로 안경테를 치켜 올린다. 눈에 힘을 주고 나를 쳐다보자 잘 그려진 눈썹이 예쁜 모양으로 가늘어진다.
“맞죠? 그··· 뭐더라? 아, 갑자기 생각이 안나!!!”
앙증맞은 주먹을 허공에 몇 번 떨쳐내더니, 이내 나를 향해 삿대질하며 소리친다.
“플레어! 최강민!”
와, 눈썰미 좋네 이 여자. 모자를 쓰고 있는데도 나를 알아보다니. 아니면 내가 모자를 써도 사람들이 알아볼 만큼 유명인이 된 건가? 여자애가 깍지를 쥔 손을 자신의 가슴 앞으로 모으더니 말한다.
“저, 팬이에요. 플레어 팬 페이지에도 가입하고, 그··· 쇼케이스 무대에도 갔었는데!”
아, 어쩐지.
더 이상 시치미를 떼든가 모른척하는 것도 우스워 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저예요. 반가워요.”
“꺅. 어뜩해!”
여자애가 좋아죽으려고 한다. 그러더니 질문 공세가 이어진다.
“혹시 이 근처 사세요? 멤버들은요? 여긴 게임하러 오신 거예요? 아참, 사인사인. 사인 한 장만 해주실 수 있으세요?”
우왕좌왕하다가 이내 프린트용지 한 장을 짚어 쭈뼛거리며 내게 내민다. 원래 성격이 이렇게 산만한 건지, 아니면 당황해서 이런 건지 갈피가 안 선다.
내가 진정하라는 의미에서 웃으면서 그 위에 사인을 그려주며 질문에 차근차근 대답했다.
“여긴 잠시 볼일이 있어서 왔어요. 숙소는 다른 곳에 있고요. 사인은 여기 자···.”
사인된 종이를 받아든 여자애가 눈을 껌뻑거리더니 뭔가 떠올랐다는 표정으로 묻는다.
“아, 맞다. 지금 비상시기 아니에요? 어제 김태현 글··· 저도 봤는데. 세상에 어떤 나쁜 놈이 그런 글을···!”
분명히 시기, 질투한 누군가의 음모글이라는 소리를 한참이나 해댔다.알고 있다하니 차라리 잘됐다 싶어 여기 온 목적을 이야기해줬다. 차라리 솔직하게 이야기를 터놓고 도움을 청하는 편이 낫겠다 싶어서. 자초지종을 설명해주자 가뜩이나 동그래진 눈
이 더 동그래진다.
“여기서 그 글이 올라왔다고요? 진짜요?”
“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저기 있는 CCTV녹화분 확인 좀 할 수 있을까요?”
내가 가리킨 방향 쪽에 CCTV를 확인한 여자애가 고개를 끄덕인다.
“네, 물론이죠!”
어떻게 아이피 주소를 알았냐고 묻기에 대충 아는 경찰을 통해 알아냈다고 둘러댔다. 다행히도 그냥 납득하는 눈치였다.
여자애가 카운터 피시 앞에 앉아 메모리 카드 안에 있는 영상을 찾기 시작했다. 글이 올라온 시간을 시점으로 34번에 앉았던 손님들을 찬찬히 되짚어간다. 생각보다 범인이 빨리 나왔다. 글이 올라온 건 새벽시점이었고, 새벽시간에는 오고가는 손님이 거
의 없었으니까.
“이 손님 같은데요? 잠깐만요.”
앉아 있는 얼굴이 흐릿해 CCTV아래로 지나치고 있는 장면을 정지해 얼굴을 확대시켰다. 어림잡아 스물 언저리의 나이로 보이는 남자. 모자를 썼지만 얼굴 윤곽을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이 사람 여기 자주와요?”
“음.”
흡사 FBI라도 된 것처럼 의욕적으로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인상까지 쓰며 모니터를 보던 여자애가 눈이 아픈지 눈두덩이를 문지르며 떨어져 나갔다.
“아··· 미안해요. 처음 보는 손님 같아요. 잠깐만요! 혹시, 회원 가입 되어 있는 정보라도 있으면······.”
그러더니 마우스를 몇 번 왔다 갔다 하며, 키보드를 치더니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 비회원으로 로그인했네요. 자주 오는 손님은 아닌가 봐요. 자주 오는 손님들은 보통 회원가입이 돼 있으시거든요.”
체형이나 드러난 얼굴 윤곽이 새벽에 피시방을 들락거리며 게임하는 중독자의 모습은 아니다.
가만. 근데 어디선가 낯익은 얼굴 같기도 한데······.
-영삼아, 혹시 누군지 찾아낼 수 있겠어?
-인물 데이터베이스에서 일치하는 사람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러더니 잠시 후.
-샤인의 멤버 이택민이랑 정보가 일치합니다.
라고 알려온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나는 깜짝 놀랐다.
샤인?간혹 가다가 무대에서 마주칠 때 상냥한 웃음으로 인사를 건네던 그 샤인?
컨셉이 계속 겹쳐 라이벌 구도로 방송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싹싹해 보이고, 인상도 서글서글해서 괜찮은 애들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순진해 보이는 가면 뒤에 숨어서 음흉한 꿍꿍이를 꾸미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친다.
내가 다시 화면을 주시했다. 몰랐을 땐 누군지 전혀 모르겠던데, 알고 나서보니 그 녀석이 확실한 것 같다. 여자애는 전혀 감도 못 잡는 눈치다. 하긴 저걸 보고 샤인 이택민을 연상하면 그게 더 이상한거지. 굳이 이야기해줄 필요는 없겠다 싶어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턱을 문질렀다.
이빨 사이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나온다.
머릿속엔 온통 궁금증으로 가득하다.
이 자식이 무슨 심정으로 이런 글을 올린 걸까? 혹시 술이라도 먹었나?
화면상 보이는 걸음걸이를 보니 딱히 그런 것 같진 않다.
지금쯤 이 자식은 뭘 하고 있을까? 남에게 거대한 똥 덩어리를 투척해놓고, 자신은 낄낄거리며 방송, 행사장을 뛰어다니고 있으려나?
아니면 숙소에서 이 사태들을 지켜보며 웃고 있나? 유유자적하게 있을 녀석의 모습을 생각하자 목구멍에서 뜨거운 게 넘어오는 느낌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다.
“저, 저기······.”
나도 모르게 잠깐 무서운 표정을 지었나보다. 여자애가 흠칫하더니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묻는다.
“괜찮으세요?”
“아, 미안해요. 잠시 딴 생각을 하느라.”
내가 부드러운 미소를 짓자, 그제야 여자애의 표정이 원래대로 차분하게 돌아온다.
“혹시, 이거라도 필요하시면 복사해 드릴까요? 메모리카드 용량이 별로 안 커서 내일이면 영상자동으로 삭제 될 거예요.”
“아 그래요? 그런데 제가 따로 뭘 챙겨온 게 없는데.”
“괜찮아요. 제걸 드릴게요!”
여자애가 곰돌이 스티커가 붙어 있는 USB를 가방에서 꺼내 영상을 긁어 담더니, 그것을 내게 내민다.
“이거 1기가 밖에 안하는 거예요. 저도 예전에 사은품으로 받은 거라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사실 딱히 필요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혹시 경찰이라도 개입하게 된다면 누군가의 증언, 혹은 부연설명을 해줄 이가 필요하긴 하다. 그래야 어떠한 근거로 범인을 지목하게 되었는지를 밝혀낼 수 있을 테니까.
“고마워요. 이 은혜 안 잊을게요.”
“뭘요. 이 정도 가지고. 혹시 언제든지 도움 필요하면 말씀만 하세요! 저도 부지런히 돌아다니면서 태현 오빠 잘못 없다고 알리고 다닐게요.”
“알았어요. 고마워요.”
*
피시방에서 나온 후 나는 손에 쥔 USB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걸 이제 어떻게 써먹어야할까. 일단 범인이 샤인 멤버 중 이택민이라는 건 알아냈다. 이걸 경찰에 넘겨? 영상을 통해, 이택민이 글 작성자라는 합리적인 의심을 해볼 수가 있다. 하지만 이것으로 진짜 충분한가를 의심해보니, 해답이 금방 나온다.
“부족해. 뭔가 더 확실하고 구체적인 게 있어야 돼.”
지금 필요한 건 당장 이 사태를 잠재울 한방이다.
그리고 가장 좋은 방법은 본인 입으로 스스로 그 글을 올렸다는 것을 실토하게 만드는 거다. 걔가 제 정신이 아닌 이상 네, 제가 했습니다. 하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고, 어떻게 해야 살살 구슬리면서 자연스럽게 그 말을 토해내게 만들 수가 있을까?
머릿속이 바쁘게 움직인다.
역시나 가장 좋은 방법은 낚시다.
결론을 내린 내가 영삼이에게 물었다.
“이택민 핸드폰 번호 좀 알 수 있을까?”
-네. 가능합니다.
“그러면 걔한테 문자 한통만 넣어줘. 조금 전에 봤던 그 영상과 함께 첨부해서.”
-뭐라고 보낼까요?
한참을 고민 끝에 내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보내줘.”
*
샤인 숙소 거실.
러그 위에서 뒹굴거리고 있던 이택민이 핸드폰을 보며 낄낄거리고 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하다.
“드디어 실검 1위네. 남의 그룹 실검1위 먹은 게 이렇게 재밌을 줄이야.”
“야, 너는 그게 재밌냐? 나는 어째 일이 점점 커지는 거 같아서 불안하기만 하구만. 그러다가 걸리기라도 하는 날엔······.”
옆에 앉은 멤버의 말에 이택민이 도끼눈을 치켜뜬다.
“야! 자꾸 재수 없는 소리할래? 그리고 걸리긴 누가 걸려?”
“걔네들이 경찰에 신고하면? 아마 소속사에서 명예회복 어쩌구저쩌구하면서 고소할게 뻔한데, 그러면 신상 다 털리는 건 시간문제지.”
이택민이 안심하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걱정 마. 내가 괜히 그 추운 새벽에 피시방까지 갔다가 온줄 알아?”
“아이피는 그렇다고 쳐. 회원 가입정보는 남아 있을 거 아니야? 그걸 추적하면?”
“내가 빙시냐? 그런 것도 생각안하고 글 싸질러 놨게? 어차피 그거 내 아이디도 아니야.”
“그러면 누구 건데?”
“나도 모르지. 어떤 카페에서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주은 아이디니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도용 아이디일걸?”
부엌에서 물을 마시고 나온 멤버가 그 이야기를 들으며 혀를 차며 머리를 흔든다.
“너도 참. 너 답다. 저런 걸 같은 멤버라고······.”
“아, 시발. 왜 나한테만 뭐라고 하는 건데? 막말로 플레어 엿 먹고 있어서 다들 기분 좋으면서. 걔네 1위 찍었을 때 다들 기분 엿 같다고 그랬잖아. 캐리챌에서도 1위 먹어놓고도 플레어랑 계속 비교되는 바람에 짜증난다고 했으면서.”
“짜증난다고 했지 누가 이런 짓 하라고 시켰어?”
“그러면 얘네 그냥 이대로 냅둬? 틈만 나면 플레어랑 우리랑 저울질하는 네티즌 등쌀에 스트레스 받아서 제대로 활동이나 하겠어? 앞으로 얘네 이것보다 더 뜨면? 가뜩이나 음원 비교돼서 말나오는 중이고, 회사에서는 우리한테 지지 말고, 더 열심히 하라
고 지랄이고, 이탈되는 우리 팬들 얘네가 죄다 흡수하고 있던데. 난 그 꼴 더 못 봐. 내가 얘네 때문에 벌써 탈모가 올 지경이라니까?”
이택민이 자신의 정수리를 가리키며 과장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R&N에서 올린 입장표명 글 못 봤어? 강력대응할 거라고 하잖아.”
“아, 몰라몰라! 이제 와서 뭘 어쩌라고? 어차피 알지도 못해. 지네들이 고소해 봤자지. 회사차원에서 강력대응? 지들이 뭘 할 수 있는데?”
이택민이 미간을 구기면서 뻗어댔다.
그때 옆에 놓은 핸드폰에서 문자 알림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본 번호다.
문자를 확인한 이택민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아, 시발. 이건 또 뭐야??”
< 신뢰라는 것이 생기면 (2) > 끝
ⓒ 윤민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