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운 도전 (3) >
녹화 시작 전 우리는 차조영 실장과 박호영 팀장을 따라 MC대기실을 찾았다.
MC 김진수가 우리들은 반겨준다. 나이는 올해 마흔 한 살이 됐다고 하던데, 관리를 지속적으로 받아서 그런지 확실히 나이보다는 동안처럼 보인다.
“안녕하세요. 신인그룹 플레어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90도로 상체를 꺾었다.
MC 김진수가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반가운 표정을 짓는다.
“오, 반가워요. 화면으로만 보다가 직접 보니 아주 다들 인물이 어마어마하네. 아휴, 그리고 나한테는 이렇게 예의, 격식 안차려도 돼요. 원래 예능 바닥에서는 그냥 다 형님, 누님 하는 거지. 요즘에는 그렇게 MC랑 게스트랑 친근하게 보여야 시청자들도 좋
아하고, 시청률도 잘 나와요. 방송 들어가면 말도 지금보다는 편히 할 테니까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요. 프로그램 컨셉이 원래 그런 거니까.”
“네에.”
우리가 아기 새처럼 입을 모아 대답했다.
멤버들의 인사가 끝이 나자 뒤에 서 있던 박호영 팀장이 친근한 웃음을 띠며, MC김진수에게 다가가 악수를 건넨다.
“어휴, 형님 말 놓으세요. 애들 평균나이 스무 살 간신히 넘어요. 거의 아빠뻘인데.”
“에이, 아빠뻘은 아니지. 삼촌이라면 모를까.”
MC김진수가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개그맨 출신이라고 하더니 사람이 꽤나 유쾌한 거 같다.
“애들이 단독 토크는 처음이다 보니, 모르는 게 많습니다. 질문 좀 살살 부탁드립니다.”
“R&N에서 어련히 알아서 다 교육을 시켜서 데리고 왔을까. 내가 알아서 재미있는 부분 쫙쫙 빼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그리고 우리 송피디 편집 실력 끝내줘. 잘 알면서 그러네.”
“그러면 형님만 믿겠습니다.”
박호영 팀장과 몇 번 본 사이라더니 말투가 사근사근하다. 왠지 든든한 아군이 생긴 기분이다.
오늘 방송 어떻게 하나 걱정했는데, 이정도면 아무 문제없이 방송할 수 있겠다. 그런데 박호영 팀장이 다시 우리를 데리고 대기실로 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웃음기를 삭 지우며 당부하듯 말한다.
“질문에 대답할 때 옆에 있는 사람들 리액션 포즈 다 잡히니까 신경 써서 반응해주고, 과도하다 싶을 정도도 상관없으니까. 알았지? 방송 열심히 안 한다 이런 말 나올 수도 있으니까.”
“네.”
“시청자들 호기심 끌겠다 싶은 건 여지없이 가져다 쓰니까 질문이 날아오면 한 번 꼭 생각해보고 대답하고. 특히 요한이 너는 뭔가 대답할 때 생각 없이 말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꼭 두 번 세 번 생각해서 대답하고, 정 어려우면 그냥 대답하지 말고, 옆 사
람한테 마이크 넘겨. 알았지?
“저요?”
장요한이 눈이 동그래져 묻는다.
왜 자기를 걱정하느냐는 그런 표정인데······.
이유를 본인만 모르나보다. 나와 멤버들은 모두들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는데.
쟤는 간혹 필터링 없이 그대로 말하는 경우가 있어서 무슨 사고를 칠지 몰라.
그래도 MC가 우리한테 우호적인 거 같아서 살짝 긴장을 풀고 있었는데, 차조영 실장이 신신당부를 하는 걸 봐선 꼭 그런 것만은 아닌가보다.
그리고 왜 그렇게 박호영 팀장이 신신당부를 했는지는 녹화를 시작하고서야 깨달았다.
*
플레어가 대기실에서 나가고, 담당 연출 송 피디와 방송경력 10년의 김 작가가 MC김진수에게 다가가 물었다.
“애들은 어떤 거 같아요?”
“지금 잠깐 봐서 뭘 아나? 그런데 애들이 순딩순딩한게 뽑아먹기 좋게 생겼네. 예능은 몇 번 해보지도 않았다면서?”
“떼토크 두 번 정도? 거의 처음이나 마찬가지에요.”
“좋네. 그러면 에피소드도 무궁무진할거 아니야?”
“형님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죠. 예능 초보들은 긴장해서 뭐 물어보면 입도 잘 못 떼는 거 잘 아시면서.”
송 피디가 가볍게 눈을 흘기며 대꾸하자 MC김진수가 껄껄 웃는다.
“그거야 보기 나름이고. 오히려 아이돌들이 베테랑같이 굴면 그것 나름대로 신선도가 떨어진다고. 애들 캐릭터들은 어때?”
그 말에 김 작가가 대답을 한다.
“어, 이 팀은 최강민이 리더답게 말을 잘해요. 그리고 김태현이란 친구는 꼭 할 말만 하는 친구고, 박진우도 뭐 그런 비슷한 느낌? 장요한이 좀 백치미 그런 게 좀 있어요. 방송한 거 모니터링 해보니까 울기도 잘 울고, 감정기복도 심한 거 같더라고요. 그리
고 노아 걔는 바른 청소년 느낌? 공부를 엄청 잘한대요.”
“공부 잘하는 걸 방송에서 어떻게 써먹는다고. 퀴즈 쇼 프로도 아닌데.”
“그러게요.”
MC김진수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어. 견적 나왔네. 적당히 근황토크 좀 해주다가 좀 쎈 질문은 장요한 그 친구한테 하란 소리잖아. 그치?”
“맞아요.”
두 사람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MC경력 10년차면 어떻게 해야 재미있는 그림이 나오는지 정도는 말 안 해줘도 눈에 훤하다.
“알았어. 오늘 방송 한 번 재미있게 살려보자고.”
*
“한주를 시작하는 유쾌한 오늘의 아이돌 시간이 돌아 왔습니다!”
잠시 후, MC김진수의 노련한 오프닝 멘트와 함께 녹화가 시작됐다.
카메라를 보며 어색한 웃음과 손을 흔들어대던 멤버들이 한 명씩 자기소개를 한다.
나를 시작으로 ‘안녕하세요. 플레어의 누구누구입니다.’의 평범한 인사가 계속 반복되다 장요한 차례에서 순간 멈칫 했다.
“플레어의 활력 비타민제 장요한입니다.”
이러면서 귀여운 표정을 짓길래.
멤버들의 눈이 일제히 돌아간다.
대단한 녀석.
어떻게 낯짝 하나 변하지 않고, 저런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거지? 보는 내가 다 부끄럽다. MC김진수가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더 강한 멘트를 치라는 눈빛을 보낸다. 덕분에 마지막 주자인 노아가 머뭇거리더니, 이내 전쟁에 출전하는 이등병마냥 입술
을 꽉 깨문다. 벌써부터 얼굴이 홍시처럼 달아올라 있다.
“상큼한 막내 귀요미······ 노아입니다.”
손으로 얼굴 꽃 받침대를 만든 노아가 부끄러움에 볼이 터지려고 한다.
이해한다. 열아홉 살 남자애가 저러기도 쉽진 않지.
그렇게 오프닝이 시작되고, 본격적인 토크가 시작됐다.
“멤버들 간의 첫 인상 이야기부터 해볼까요? 음, 누구부터 할까요? 우리 눈치 보지 말고 서슴없이 하기로 해요. 이게 눈치를 보면 또 재미가 없거든.”
10년차 베터랑 MC의 눈이 멤버들을 훑는다. 누구를 지목해야 조금 더 재미있는 답변이 들려올까, 꼭 이 코너에서 분량을 뽑아야하는데 하는 의지로 눈이 빛난다.
흡사 먹이감을 찾는 맹수 같다. 꼭 틀린 말은 아니지. 예능은 분량을 위해서라면 자폭도 마다하지 않는 정글 같은 곳이니까.
MC의 눈이 닿을 때마다 멤버들이 움찔거린다. 첫 번째는 꼭 피하겠다는 의지로 애써 시선을 슬그머니 옆으로 돌린다.
그러다 그의 눈이 장요한에게 닿았다.
그래, 저놈이라면···? 하는 기대감으로 눈빛이 번들거린다.
“우리 요한군부터 할까요? 듣자하니 R&N에서 연습생 생활을 가장 오래했다고 하던데. 이야기 좀 들려줘요. 시청자들도 궁금해 하는 내용들이니까.”
“어···.”
장요한이 머뭇거리길래 MC김진수가 질문은 던진다.
“가장 먼저 본 사람이 누구였나요?”
“태현이형이요.”
“그때 모습이 어땠나요? 솔직하게요.”
“솔직하게요? 음··· 날라리?”
필터링을 거치지 않은 대답이 툭 튀어나간다. 작가진들 사이에서 풉 하는 웃음소리가 새어나온다. 그와 동시에 기분 좋은 미소가 MC김진수의 입에 걸린다. 이건 건졌다 하는 표정이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해줘요. 눈치 보지 말고. 재미없다 싶으면 편집하면 되니까.”
장요한이 머뭇거리더니, 입을 떼어 놓았다.
“2년 전에 처음 봤는데, 머리는 노랑색으로 염색을 해가지고, 민소매를 입고 건들건들 들어오는데, 눈 마주치는 연습생 들마다 피하느라 급급했어요.”
“왜요?”
“어··· 맞을까봐? 들리는 소문이 장난이 아니었거든요. 이미 언더쪽에서는 웬만큼 소문이 난 형이라.”
MC가 귀가 솔깃해져서는 묻는다.
“몰로요? 랩? 아니면 싸움?”
“둘 다요.”
주저 없는 대답에 김태현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눈치를 살살 보던 장요한이 급하게 말을 수습하고 나섰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좋은 형이더라고요. 지금은 멤버들 중 제가 제일 믿고 따르는 형이에요. 하하하하.”
웃지 마. 그게 더 어색해!
MC가 김태현을 한번 스윽 쳐다보더니, 인정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하긴 그러고 보니 태현군이 멤버들에 비해서는 좀 쎈 이미지긴 하네요. 랩하는 친구들이 다 그렇지. 그래야 또 맛이 살거든.”
이렇게 상황이 수습되나 했는데, 그가 짓궂은 질문 하나를 불쑥 던져놓았다.
“그러면 요한군은 둘 중 누가 더 좋아요? 듣자하니 최강민군을 되게 잘 따른다고 하던데. 최강민, 김태현. 둘 중 한 명만 고른다면?”
그래. 여기서 그냥 넘어가면 그건 예능MC가 아니지.
그 같은 질문에 장요한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린다.
MC가 짓궂은 표정을 짓고는 손가락을 차례대로 펴며 재빠르게 카운트다운을 센다.
“하나, 둘, 셋!”
카운트가 끝날 때까지도 장요한이 끝내 대답을 못했다. 그리고는 뒤늦게 둘 다 좋다고 했지만, 이건 내가 봐도 거짓말 같다.
어휴, 저 멍청이. 그냥 눈치를 보지 말던가.
이건 내가 아니라 옆에서 박진우가 중얼거리는 말이다.
MC김진수가 바로 상황을 정리한다.
“혹시 숙소로 돌아가면 태현군한테 맞는 건 아니시죠? 아, 농담이에요. 농담. 멤버들 사이좋은 건 팬들 사이에서는 이미 유명한데.”
김 작가가 오케이 사인을 보내자 MC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면 다음 질문으로 넘어갈도록 할게요. 질문에 해당되는 멤버가 있으면 손가락으로 가리켜주시면 됩니다. 안 찍고 이런 거 없어요. 아셨죠?”
“네.”
“멤버들 중 가장 안 씻는 사람은?”
어··· 그게 누구더라?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손가락 네 개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향해 가리킨다.
헐. 나, 나였나?
MC가 의외라는 표정을 짓는다.
“최강민군이 잘 안 씻어요?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
“저 형 들어오면 발도 안 닦고 그냥 자요.”
“외출할 때 빼놓고는 세수도 잘 안 해요.”
“하긴, 형이 좀 안 씻는 편이긴 하지.”
박진우와 장요한이 합세해서 나를 공격하고, 김태현까지 거들고 있다.
에라, 이렇게 된 이상 나도 모르겠다.
“사람피부는 너무 자주 씻어주면 건조해져서 오히려 피부에 나빠진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피부 각질층 아래에 있는 자연 보습인자와 기름막은 수분을 증발하는 걸 막아주는데 피부를 자주 씻으면 이게 없어지거든요. 오히려 더 피부가 손상될 수 있어요.
제가 다 안 씻는 데는 그러한 이유로······.”
MC김진수가 옳다구니 맞장구를 쳐준다.
“오, 그거 말 되네! 그래서 나도 잘 안 씻어요. 집에는 샴푸가 다 떨어진지 일주일짼데 별로 불편하지도 않아요. 왠지 알아요?”
멤버들이 모두 궁금한 표정으로 대답을 기다린다.
“샾에 갈 때만 감거든. 어쩔 때는 삼일씩도 안 감고 그래요.”
그러면서 킬킬거린다.
그 후로도 한참동안이나 더러운 이야기가 오고 갔다. 식초로 무좀을 이겨낸 군대 이야기나 차안에서 방구를 꼈을 때 대처법이라던가. 술 먹고 복도에다가 오줌 싼 이야기. 그러면서 그때마다 은근슬쩍 나를 자신의 이야기에 끼워 맞추려고 한다.
이 양반이 진짜.
내가 그 정도는 아니지.
카메라 주위에 모여 있는 스태프들 반응도 나쁘지 않다.
아, 이제 막 방송 시작하는 내 이미지 이대로 괜찮은 건가?
“점심 먹고 계속 녹화 이어 갈게요.”
담당 PD의 소리에 잠깐 동안의 휴식시간이 이어지고, 우리는 대기실로 모두 되돌아왔다.
아까부터 장요한이 눈치를 보다가 태현에게 다가가 쭈뼛거린다.
“형, 아까는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나봐. 내가 괜한 소리를 해가지고. 미안.”
목소리가 기어 들어간다.
김태현이 피식 웃는다.
“됐어 인마. 생각해보면 내가 그땐 그랬지. 독기만 잔뜩 올라서는 랩 한다고 폼도 잡고 그랬는데. 신경 쓰지 마. 다 옛날 일인데.”
김태현이 대수롭지 않게 넘기자 그제야 장요한이 안색이 밝아지더니, 배달 온 도시락을 까먹기 시작한다. 다른 멤버들도 벌써 저마다 자리에 앉아 특제불고기 도시락을 하나씩 손에 쥐고, 먹을 준비를 하고 있다. 노아가 내게 손짓한다.
“형, 형 것도 내가 까놨어요.”
“어, 그래. 먼저 먹어.”
나는 노아에게 먼저 먹으라는 손짓을 하고는 차조영 실장에게 다가가 조용한 어조로 속삭였다. 이상하게도 아까부터 괜히 불안한 마음이 든다.
“태현이 분량 저대로 방송 나가도 괜찮겠죠?”
“저 정도야 문제없지. 막말로 아이돌치고 왕년에 안 놀아본 사람이 어디 있어? 말을 안해서 그렇지 연예계에 고딩 일진들 수두룩해.”
차조영 실장은 아무런 문제가 될게 없다는 말투다.
하긴. 듣고 보니 그것도 그러네.
그런데 문제는 이 망할 예감이 한 번도 틀려본 적이 없다는 거지.
그리고 방송이 나간 다음 날 새벽. 커뮤니티 게시판에는 김태현과 관련된 장문의 글 하나가 올라왔다.
< 새로운 도전 (3) > 끝
ⓒ 윤민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