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라운드 미션 (3) (수정)
“아이고, 머리야.”
다음 날 나는 미간을 문지르며 일어났다. 술을 마셔서 머리가 아픈 건 아니고, 미션 곡 때문에 늦은 새벽까지 두뇌를 너무 혹사시켰는지 머리가 멍해서.
마치 머리에 달린 하드웨어 성능을 매일같이 최대치로 끌어내 쓰는 느낌이랄까?
이러다가 머리가 터지는 건 아니겠지?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책상 위에 놓인 노트북을 쳐다봤다. 새벽까지의 노력의 결과가 저 안에 담겨 있다.
일단 인트로 부분을 만들어놓긴 했는데, 그 결과가 꽤나 만족스럽다.
원래는 현대악기와 국악악기의 합주를 시도해볼까 했는데, 몇 번 섞어보고는 때려 쳤다. 태평소를 제외한 악기들이 일렉, 드럼소리에 묻혀 들리지가 않아서.
결국 파트별로 따로 나누는 게 최선이라는 생각에 현대적인 국악 느낌이 나게 인트로 부분을 짰는데, 이게 꽤 신명나게 잘 나왔다.
거실로 나가자, 박진우가 소파에 앉아 나를 쳐다보며 말한다.
“형, 전에 말씀하신 그 연주자 문제 있잖아요.”
“어, 좀 힘드시겠대?”
“어······ 그게.”
표정에 곤란함이 섞여 있길래 내가 얼른 말했다.
“안 되도 괜찮아. 매니저 형한테 알아봐달라고 부탁해도 되니까······.”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일단 집으로 오래요. 와서 이야기하자면서.”
“그래? 아버지가 부르면 가야지. 다녀와.”
내 대답에 박진우가 머리를 긁적인다.
얼굴에 ‘이게 아닌데’ 하는 표정이 떠올라 있다.
“왜? 무슨 문제 있어?”
“어··· 그게 아니라, 멤버들도 다 함께 오래요. 저녁이라도 한 끼 대접해주고 싶다고.”
“우리를 전부?”
“저랑 같이 숙소 생활하는 멤버들이 어떤가 보고 싶으신가 봐요. 형, 불편하시면 그냥 제가······.”
“아니야. 같이 가.”
“네?”
“네 아버지면 우리한테도 아버지나 마찬가지지. 말 나온 김에 다 같이 가서 인사드리자고. 그렇지 않아도 한번 뵙고 싶었는데 잘됐네. 집이 어딘데?”
“어, 별로 멀진 않아요. 차타고 30분?”
“잘됐네. 멤버들한테 한번 물어봐야겠다. 야, 얘들아. 다들 나와 봐.”
내가 소리치자 멤버들이 하나둘 방에서 나온다.
“진우 아버지가 우리 저녁식사 초대하셨는데. 다들 어때? 괜찮지?”
내 말에 제일 먼저 장요한이 반응한다. 오랜만에 배불리 먹을 생각에 입이 헤벌쭉 벌어지며, 그대로 손가락으로 박진우의 옆구리를 쿡쿡 찌른다.
“야, 너네 집 좀 산다고 하지 않았냐? 고기는 당근 있겠지?”
“왜. 우리 집 거덜 내게?”
노아도 좋다고 고개를 주억거리고, 김태현도 알았다고 대답했다.
일단 연습실에 가기 위해 준비하고, 다시 모이기로 했는데 방안으로 들어가는 장요한과 박진우의 대화가 들려온다.
“그런데 빈손으로 가도 돼? 이럴 땐 뭐라도 사들고 가야한다고 들었는데··· 혹시 너희 집에 휴지 있냐? 휴지 사줄까?”
“멍청아. 휴지 없는 집도 있냐?”
“그러면 세제는?”
“무슨 집들이 가냐? 그냥 가기나 해. 넌 그냥 가만히 있어주는 게 도와주는 거니까.”
그리고.
그 도란도란한 대화를 소파위에 앉아 있는 김태현이 부럽다는 표정으로 빤히 쳐다보고 있다.
*
“우와, 너희 집 진짜 크다. 정원도 있네?”
차조형 실장이 내려준 곳은 꽤 큰 2층짜리 전원주택집 앞이었다.
“나는 근처에 볼일 좀 보고 있을게. 식사다 끝내고 전화해. 데리러 올 테니까.”
“넵.”
차조형 실장이 떠나고, 우리들은 옹기종기 때문 앞에 나란히 섰다.
박진우가 벨을 누르기 전 멈칫하더니, 나와 멤버들에게 한 가지 당부의 말을 전한다.
“저기, 형들. 얘들아. 나한테 여동생이 한명 있거든?”
여동생이라는 말에 장요한이 즉각 반응한다.
“우와, 너 여동생도 있냐? 몇 살인데?”
“나랑 연년생이야. 이제 스무살.”
“예뻐?”
그리고 예상했던 질문도 나온다. 역시나 남자들은 기승전 그게 제일 궁금하구나. 그 말이 왜 안 나오나 했네.
“어, 예뻐. 헌데, 성격이··· 어후.”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박진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때만 해도 나는 박진우가 괜히 저런다 싶었다.
원래 여동생을 가진 오빠들은 다 여동생들을 폄하하기에 급급하니까.
내 동생 성격 지랄 맞다. 미친년이다. 껌 좀 씹고, 침좀 뱉고 다니는 년이다등등. 이게 혹시 소개시켜달라고 할까봐 미리 방어막을 치는 걸 수도 있거든.
그도 아니면 가족의 눈으로 늘 바라보는 거라 이성적인 매력을 전혀 모르는 걸 수도 있고.
아무튼 벨을 누르자 잠시 후, 문이 덜컹하고 열린다.
안으로 들어가자 잘 깔린 정원 잔디가 보인다. 묶여서 짖고 있는 강아지··· 가 아니라 개님이 보인다. 덩치가 꽤 크네. 진돗개인가?
듬성듬성 박힌 돌다리 같은걸 밟으며 현관문에 도착할 무렵쯤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밖으로 나온다.
여자애였다.
어려 보이는 것 같으면서도 묘한 성숙미가 풍기는 분위기. 불그스름한 빛이 맴도는 긴 머리, 화장기하나 없는 하얀 얼굴위에 유별나게 긴 속눈썹이 자리 잡은 인형 같은 얼굴. 척 보기에도 들어갈 데는 들어가고 나올 때는 나온 기가 막힌 신체비율. 두터운 가디건을 걸치고 있는데, 가만 보니 박진우랑 뭔가 묘하게 닮았다.
입구에서 멤버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뭔가 자세가 박진감이 넘쳐 보인다. 쟤가 혹시 그 여동생인가?
현관문까지 일행이 다가오자 여자애가 손을 흔든다.
“오빠!”
듣기 좋은 생기발랄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진다. 생긴 것만큼이나 목소리도 곱다. 역시 여동생이란 건 좋은 거였어.
“안녕하세요. 저 진우오빠 동생 박안나라고 합니다.”
자신을 소개한 박안나가 고개를 꾸벅 숙인다.
예의도 바르다.
박진우 녀석이 처음으로 부럽다. 근데 성격이 장난이 아니라고? 좋기만 해 보이는데 왜? 역시 그냥 흔한 남매간의 헐뜯기인 걸로.
“어머니랑 아버지는?”
“안에 음식 장만 중.”
“아. 그래?”
그때 박안나가 뭔가를 찾는 표정으로 고개를 기웃거리더니, 이내 내 앞으로 한발자국 다가온다. 가까이서 보니 진짜 예쁘게 생겼다. 역시 핏줄은 핏줄인가보다. 그러고 보면 박진우도 어디 가서 빠지는 비주얼은 아니지.
그런데 용건이 나한테 있나? 라고 생각하는데, 박안나가 하얀 목을 기울여 내 뒤를 쳐다 본다.
내가 아닌 내 뒤에 용건이 있었나?
내가 반사적으로 옆으로 물러섰다.
가만 내 뒤? 내 뒤라면······.
내가 비켜선 공간. 그곳에서 뭔가를 발견한 것 마냥. 그녀의 예쁘장한 얼굴 위로 환한 미소가 떠오른다.
마치 초등학생이 작고, 뽀송뽀송한 병아리··· 아니 오리새끼를 본 듯한 표정이다.
“안녕?”
“안녕하세요.”
그 공간 안에 있던 노아가 움찔하며 고개를 숙인다.
“음···. 괜찮다면 혹시 말 놔도 될까? 내가 한 살 더 많거든. 아, 너도 말 놔도 돼.”
“어······ 그러세요.”
노아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박안나가 치아가 보일정도로 환하게 웃는다. 그리고 멤버들을 돌아보더니 덧붙인다.
“다른 오빠들도 편하게 말 놓으세요. 아참, 내 정신 좀 봐. 추우니까 얼른 들어가요. 집안 따뜻하게 덥혀놨어요.”
그러고 노아를 향해서도 손짓한다.
“춥지. 얼른 들어가자.”
어어? 이런 광경은 예상하지 못한 건데?
노아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눈을 하고 나를 쳐다본다. 둘이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사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 광경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데, 박진우가 한숨을 쉬었다.
“쟤가 노아 팬이라 그래요. 뭐··· 설마 잡아먹기야 하겠어요?”
집안으로 들어가자 박진우의 부모님으로 보이는 나이 지긋한 두 분이 개량 한복을 입은 채 현관문으로 나온다.
“어서 들와요. 우리아들이랑 한집에서 같이 산다고 하길래 궁금해서 초대했어요. 바쁜 시간 뺏은 건 아니죠?”
흰머리가 곱게 센 어머니는 가야금 명인이라 소개하고, 아버지는 소개했던 대로 명창으로 소문난 인간 문화재였다.
여동생은 국악 예술 고등학교 학생으로 장구, 판소리 전공자라고 하고.
아. 이제 봤더니 집안이 전부 국악인 집안이구나.
그러고 보니 박진우도 판소리를 하다가 그만뒀다고 했지.
“배가 고플 테니 일단 저녁부터 먹죠. 자, 이리로.”
척보니까 어머니는 친절하고, 귀부인 같은 스타일이고, 아버지는 근엄하고 진지한 스타일로 보인다. 어머니의 안내로 부엌으로 들어가자 도우미 아주머니 한명과 함께 차린 것으로 보이는 말 그대로 식탁다리가 부러질 듯한 진수성찬이 펼쳐져 있다.
갈비찜에, 불고기, 나물, 생선, 튀김, 잡채, 버섯볶음 등등. 나는 무슨 한정식 음식점에 들어온 줄 알았다.
박진우 어머니가 멤버들을 돌아보며 웃으며 말한다.
“별로 차린 건 없지만 많이들 들어요. 부족하면 더 먹고.”
이게 별로 차린 게 없는 거라고?
장요한 녀석이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박진우를 툭툭 건들며 묻는다.
“야, 너 혹시 매일 이렇게 먹는 건 아니지?”
“뭐, 가끔?”
“이걸 가끔 먹는다고?”
얘는 진짜 유복하게 자랐구나.
그리고 장요한은 진짜 한 열 끼는 굶은 애처럼 음식을 입안으로 구겨 넣었다. 어찌나 많이 먹던지 나는 뱃속에 음식을 저장하려는 줄 알았다.
오랜만에 아들을 만난 부모님도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 조금 야윈 거 같네. 티비는 잘보고 있다. 정감 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그리고 김태현은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그런 박진우를 부럽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다. 예전부터 느끼는 건데, 그런 김태현의 모습을 볼 때면 기분이 조금 이상하다.
왠지 자신이 알고 있는 김태현이 아닌 것 같아서.
내가 아는 김태현은 동생들 잘 챙기고, 어른스럽고, 늘 듬직한 모습을 보이려는 녀석인데, 간혹 지금처럼 아주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고 보니 김태현이 자신의 과거나 집안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은 한 번도 없지.
언제 기회가 되면 붙잡고, 한번 이야기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슬슬 이야기를 꺼낼 타이밍이 됐다고 생각한 듯 박진우가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아버지. 전화로 이야기한 건 어떻게 됐어요?”
“아, 그거? 음. 아빠가 생각해 봤는데, 회원들은 아무래도 연령대가 좀 있다 보니, 그런 프로그램이랑은 좀 안 맞는 것 같기도 하고··· 해서 생각해봤는데, 안나랑 나가는 건 어떠냐?”
“네?”
“너랑 멤버만 괜찮다고 하면 안나가 해보고 싶다고 하던데.”
박진우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동생 쪽을 향해 돌아갔다.
박안나는 노아 옆에서 이것저것 노아를 챙기고 있다. 노아는 부담스럽다는 듯이 뚱한 표정을 짓고 있고.
와, 쟤는 진짜 친화력이 세계제일이구나.
누가 보면 꼭 친누나인줄 알겠네. 아, 팬이라고 했으니까 팬심인건가?
“오빠. 세션 그거 나랑 우리 팀이 하면 안 돼?”
그 말을 들은 박안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화에 끼어든다.
“네가?”
“응. 작년에 우리 팀 전국 국악 경연대회에서 우승한 거 알지?”
나랑 멤버들이 뭔 소리냐는 표정으로 갸웃하자, 박진우가 옆에서 설명을 덧붙여준다.
“동생이 학교 친구들이랑 국악소녀단이란 팀을 만들었는데, 작년에 그 팀이 전국 국악 경연 대회에서 우승을 했거든요. 다들 전공자들이라 실력 걱정은 딱히 안 해도 돼요.”
대게 학생이라면 연주 실력이 미흡할거라는 편견이 있는데, 예고학생들. 더군다나 졸업을 하는 전공자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예고에 입학시키려는 학부모들이 점차 늘어남에 따라 그만큼 입시경쟁도 치열해졌는데, 특히나 악기 분야 같은 경우는 더 그러하여 일찍부터 명인, 대가들이라 불리는 선생들에게 교육을 받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다보니 이미 고등학교 입학 전부터 어지간한 연주는 가능한 애들이 태반이다.
적게는 4-5년, 많게는 7-10년 가까이 악기를 끼고 사는 애들.
박안나는 그런 경우와는 조금 달랐지만, 걸음마를 시작할 때부터 집안 환경으로 인해 장구를 비롯한 여러 가지 국악악기를 자연스럽게 접하면서 성장했고, 이미 중학생 무렵에는 어지간한 곡들은 수준급 연주가 가능했다.
워낙 바닥이 좁은 국악계이기에 알 만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미 박안나라는 이름이 파다하게 나 있었다.
박진우가 그와 같은 걸 설명해준다.
내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물어는 봤어? 다들 해 주겠대?”
박진우가 동생에게 묻는다.
“어. 내가 이미 물어봤는데. 우리 오빠가 플레어 박진우라고 말했더니, 다들 서로 하겠다고 난리던데?”
“그래?”
박진우가 동의를 구하는 시선으로 나를 쳐다봤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박안나가 좋아서 소리를 지른다.
“꺅. 감사합니다. 지지배들 아주 좋다고 난리 나겠네.”
지지배들?
“아. 저흰 전부 동성 친구들이라 여자밖에 없거든요. 제 친구 중에도 노아 팬 있는데, 이 소식 들으면 아주 좋아할걸요?”
순간 젓가락질을 하던 노아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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