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어, 꽃길 걷자 (4) (수정)
“아씨, 뭐야!!!”
미간이 야차처럼 일그러졌다. 짜증 섞인 외침이 터져 나온다. 살펴보니 메모리카드 녹화 분이 다됐다.
그녀의 눈동자가 재빠르게 메모리카드 박스 안을 훑는다. 최강민 방2라고 쓰여 있는 메모리카드를 발견하자 손이 분주해진다. 김서연 피디는 서둘러 그것을 짚어, 슬롯에 갈아 끼웠다.
영상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마음 한편으로는 불안감이 맴돈다.
김서연 피디의 머릿속은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다.
만약 저 뒷부분 녹화분이 잘려 있으면 어떻게 하지······?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메모리 카드를 갈아 끼우며, 화면에서 멀어지고 있는 최강민의 모습이다. 김서연 피디의 표정이 온화해지면서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그 후 화면에 보이는 것은 편곡한 곡을 연주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최강민의 모습이다. 들려오는 건 듣기 좋은 감미로운 미성과 건반소리, 간간히 들려오는 기타소리가 전부인 힐링되는 장면들.
김서연 피디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들려오는 목소리가 애달프다. 가늘고 고운 미성이 가슴 속에 살며시 스며들며 첨벙거린다. 최강민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이며, 가슴을 몽글몽글하게 만든다. 김서연 피디는 생각했다.
어떻게 저게 스물 세 살의 아이돌일 수가 있지?
노래는 1분여정도 지속되고, 끝이 났다. 김서연 피디도 그제야 상념 속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한숨을 쉬었다.
좋다. 분명히 좋긴 하다. 그 시끄럽기만 한 곡이 이렇게 서정적이고 듣기 좋은 발라드 곡으로 편곡이 됐다는 게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아마 이곡을 무대에서 부른다면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감탄할게 눈에 보인다.
아마도 좋은 장면이 연출되겠지?
허나, 한 가지 찜찜한 의문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다.
과연 이게 아이돌 그룹이 부를 곡으로 적절하게 편곡된 건가?
그리고 또 한 가지.
가삿말이 원곡과 많이 달라졌는데, 그 부분이 마음에 좀 걸린다. 분명 원곡은 사랑하는 연인을 위한 곡이었는데, 이게 좀······.
똑똑.
그때 편집실 밖에서 누군가 노크를 한다. 그녀가 의자에 앉은 채 상체만 돌렸다. 누군가 했더니, 캐리첼 남자 조연출이 검은 봉지를 들고 흔들고 있다.
“피디님. 야식으로 떡볶이 사왔는데, 같이 드실래요? 어묵도 있어요. 피디님 떡볶이 환장하시잖아요.”
“떡볶이? 좋지.”
김서연 피디가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연출이 그녀의 등 뒤로 보이는 화면으로 고개를 기웃거린다.
“최강민 녹화 분 보시나 봐요?”
“응.”
테이블 위를 훑은 조연출이 쌓여있는 메모리카드를 보며,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흔든다.
“어후. 녹화양이 아주···. 오늘 밤 새셔야겠네요?”
“응. 아직 수거해온 거 확인도 다 못했어. 일단 오늘 다 확인만 하고, 내일부터는 편집 작업 해야지. 너는?”
“저도 이제부터가 시작이에요. 벌써부터 기가 빨리네요. 저도 한 20개쯤 봐야하는데······.”
“다 그러면서 배우는 거야. 그래도 조연출 딱지 뗄 때쯤에는 편집에는 도사가 되어 있을 걸? 힘내라고.”
김서연 피디가 응원의 메시지와 함께 그의 어깨를 툭 쳤다.
휴게실로 이동하는 도중 조연출이 문득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참, 그러고 보니 그 소식 들으셨어요?”
“뭔 소식?”
“베드 보이즈의 제임스 리요. 이번 라운드 특별 심사위원으로 초청한.”
“그런데?”
“미국과 아시아의 혼혈이라고 알려져 있잖아요. 헌데, 알고 봤더니 모친이 한국인이었다고 하던데요?”
“오, 그래?”
“네, 그래서 한국어를 잘한데요. 듣자하니 개인적인 볼일이 있어서 한국에 진즉 입국해서 지금 호텔에서 지내고 있다고 하던데요.”
“볼일? 무슨 볼일?”
“글쎄요. 그건 저도 모르죠. 아, 그러고 보니까 플레어가 베드 보이즈 노래 부르지 않아요?”
*
3라운드가 펼쳐지는 미션 날.
대기실에서 멤버들이 저마다 목을 풀며, 악기들을 조율하고 있다.
모두가 정신없는 사이 김태현이 슬쩍 내 옆으로 다가와 들릴까 말까한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형. 이거 진짜 괜찮을까요? 형을 못 믿는 건 아닌데, 어째 좀 불안해서요.”
“음, 괜찮아. 편곡 잘 됐고, 연습도 충분히 했는데 잘못될 게 뭐가 있어?”
“······그래도요.”
“걱정 마. 잘 될 테니까.”
누군가 문을 두들기며, 얼굴을 비춘다. 조연출이다.
“녹화 시작합니다! 플레어 팀 나와 주세요!”
찬란하게 조명 빛이 내리쬐는 무대 위에 우리가 나란히 자리했다.
나와 김태현이 베이스, 기타를 하나씩 잡고, 박진우가 드럼을. 장요한은 피아노를 노아는 마이크를 쥐었다. 대형 기획사 연습생들답게 멤버들이 악기 하나씩은 다룰 줄 알았다.
아주 뛰어난 연주가들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이 곡은 연주 실력보다는 멜로디와 목소리로 승부를 봐야하는 곡이니까.
심사위원들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무대 위에 있는 우리를 쳐다본다. 심사위원 옆 특별석에는 특별 심사위원으로 초청된 미션 곡들의 가수들이 자리해 앉아 있다. 그들 중에 제임스 리의 얼굴도 보인다.
그가 인사를 한 후 마이크를 켰다. 하울링소리가 잦아지고, 조금은 어눌한 한국어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제가 작곡한 In your dreams곡을 부르신다고 하시 길래 특별히 초대되어 나왔어요. 좋은 노래 부탁드립니다.”
그의 담담한 인사말을 듣고 난 후, 허진 심사위원이 마이크를 입에 대고 말했다.
“듣자하니 재미있게 편곡을 했다면서요? 우선 무대부터 볼게요.”
“시작 하겠습니다.”
담담한 내 목소리와 함께 시선이 삽시간에 무대 위로 집중된다.
잠시 후, 퉁-하는 드럼소리와 베이스와 기타의 선율이 그 위에 나지막하게 깔리며, 그 위에 영롱하고 투명한 피아노의 선율이 더해진다. 아주 작고, 차분하고, 나지막한 소리다.
심사위원들과 관객석들이 동요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 그들이 알고 있는 원곡과는 인트로 부분부터가 너무나도 다르니까 그럴 수밖에.
하지만 그들 중 오직 단 한 사람. 제임스 리만은 더할 나위 없는 진중한 표정으로 무대 위를 바라보고 있다.
플레어의 무대가 시작이 되고, 그가 들었던 멜로디 구간이 지나자 그가 결국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저, 저건···!?”
*
가슴속에 무언가가 들끓는 것이 느껴진다.
3살 때 미국으로 입양되어, 한국에 대한 기억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제임스 리는 늘 향수병에 시달렸다. 늘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고, 비어있는 듯 하고. 그것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채워지지 않는 밑 빠진 둑과 같았다.
15살 때 음악을 만나 영혼의 위로를 받으며, 음악에 빠져들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치유가 되는 듯 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늘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 마음을 조금씩 녹여 완성한 곡이 바로 Meet your mother in a dream이었다. 오직 자신만이 소장하고 있을 줄 알았던··· 이제는 너무 오래되고, 멜로디마저도 희미해진 그 곡이······.
눈앞에서 불려지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의 생모가 있는 곳, 아니 있을지도 모르는 곳.
자신이 태어난 마음속의 고향에서.
노랫말이 끝나고, 계속해서 랩 파트부분이 이어진다.
원곡에는 없었던 부분이다.
랩을 가만히 듣고 있던 제임스 리의 눈이 점차 커지더니, 이내 격정어린 감정이 얼굴에 자리 잡는다.
1절 가사가 자신의 목소리를 담은 것이라면 랩 파트 부분의 내용은 어머니가 자신에게 해주는 화답가였으니까.
자신이 그토록 듣고 싶었던 어머니의 화답들이 무대 위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대가 끝이 났지만 존은 무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잠시 동안의 침묵이 맴돌고, 카메라가 일제히 존의 모습을 비춘다.
다들 영문을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왜 제임스 리가 저런 표정을 짓는지,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모두들 궁금하다는 표정들이다.
제임스 리가 눈 밑을 손끝으로 문지르더니, 카메라를 보고 기쁜 표정을 감추지 않고, 미소를 짓는다.
궁금증을 담은 관객들의 따가운 시선 속에서 꾹 다물고 있던 그의 입술이 벌어졌다.
“미안합니다. 제가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은 기분이라서······.”
“네?”
무대는 끝이 났지만 그는 여전히 무대가 주는 감동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허진 심사위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어··· 지금 그러니까 플레어의 무대를 보고, 선물을 받은 기분이라는 말씀이시죠?”
“네, 그렇습니다.”
심사위원들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히 무대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로큰롤 스타일의 음악을 저렇게 발라드로 무리 없이 편곡을 했다는 것 자체가 훌륭했으니까. 그리고 서정적인 멜로디와 가사말도 원곡을 생각했을 때 의아하긴 했지만 나쁘진 않았다. 충분히 공감이 갈법한 가사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울 정도까지였나? 의아함이 들었다.
“제임스 리?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곡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내막이 숨겨져 있는 것 같은데.”
허진 심사위원의 질문을 들은 존, 아니 제임스 리로 돌아온 그의 설명이 이어졌다.
In your dreams라는 곡에 담긴 비하인드 스토리를 전해 듣고 나서야 심사위원들은 물론 관객석에 앉아 있는 경쟁 팀들도 감탄성을 내뱉는다.
“아······.”
“이제는 제가 묻고 싶네요. 이곡을 부른 플레어분들에게. 어떻게 이렇게 편곡을 하실 생각을 하셨는지. 그리고 원곡은 혹시 알고 편곡 방향을 이렇게 잡으신 건지. 사실은 이게 정말 미치도록 궁금해서 이 자리에 오게 된 거거든요.”
그래, 궁금하겠지. 아주 궁금해서 미칠 거다.
하지만 자세한 내막을 설명해줄 수는 없으니, 대충 뭉개서 말하는 수밖에.
내가 마이크를 잡았다. 담담한 내 목소리가 공개홀에 가득 울려 퍼진다.
“저는 단지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하는 어느 입양된 청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을 뿐입니다.”
그 말을 들은 제임스 리의 두 뺨이 움찔거리더니, 다시 한 번 눈시울이 붉어졌다. 하지만 그는 얼굴에 미소를 띤 채 환한 웃음을 짓는다.
“사실 이번에 한국에 들어온 건 저희 생모의 소식을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저는 아직도 저를 낳아주신 생모를 찾고 있거든요. 만일 저를 낳아주신 그 분이, 이 한국 땅에 계신다면 꼭 이 방송을 보셨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 군요.”
카메라 옆에 있는 스탭이 팔을 빙빙 돌린다. 다음 진행을 해달라는 표시다.
그걸 본 허진 심사위원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건넸다.
“어, 제임스 리. 이제 점수를 주셔야 될 것 같습니다. 몇 점을 주시겠습니까?”
제임스리가 무대를 향해 활짝 웃더니, 망설임 없이 점수 버튼을 눌렀다.
10점.
네 명의 심사위원은 떨떠름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납득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다음 심사평을 하기 위해 허진 심사위원이 입에 마이크를 가져다 댔다.
“작곡가가 곡을 만든 의도를 정확히 파악한 편곡이었습니다. 아주 감명 깊게 잘 들었습니다. 멜로디도, 연주도 아주 좋았습니다. 다시 한 번 부모라는 존재에 대해서 깊이 깨닫게 해준 곡이 아닐까 싶습니다. 완벽했습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최고 점수를 드리겠습니다.”
10점.
관객석에서 자그마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시즌1때부터 여지껏 심사위원이 누구에게 10점을 준 일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뒤이어 차승민 심사위원이 마이크를 잡았다.
“우리나라에서 기다리고 기다리던 천재 뮤지션이 나온 것 같습니다. 노래로 감동을 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번 무대가 단순한 감동을 주기 위한 무대라고는 생각되질 않는군요. 힐링이 되는 무대였습니다. 앞으로 이 팀이 어떤 일을 해내갈지가 벌써 두근거리는 느낌입니다. 저도 10점 드립니다.”
“저는 제 스스로가 랩에 대해서 아주 잘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김태현군의 랩을 들으니 제가 너무 자만에 빠져 살았던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드는 군요. 리듬감, 스웨그, 기술도 중요하지만 결국은 랩도 음악을 표현하는 수단이고,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대화라는 걸 깨달 알았습니다. 저도 10점 드립니다.”
언더독도 코를 찡긋거리며 말하고.
사연을 들은 후로부터 계속 눈가에서 눈물을 뽑아내던 홍유라가 눈가를 티슈로 두드려내며 말했다.
“어디 있다가 이제야 오셨나요. 사랑합니다. 여러분.”
홍유라도 10점을 꾹 누른다.
“와아아!!!”
전광판에 TOTAL 50점이라는 글씨가 박혔다. 관객석에서 일제히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심사위원단 전원 만점이라는 역사적인 점수가 나온 것이다. 역대 오디션 프로그램 중 참가자들 중 만점을 받아본 이가 있었던가?
단연코 없다.
플레어 멤버들이 무대에서 저마다 상기된 표정으로 부둥켜안고, 나는 제임스 리를 쳐다봤다. 그가 나를 보며, 미소를 띠고 있다. 내가 화답하듯 고개를 숙였다. 무대에서 내려오기가 무섭게 VJ가 따라붙으며 내게 질문을 던진다.
“최강민씨, 편곡 작업을 하면서 어떤 기분으로 작업을 하셨는지요?”
감동적인 무대 뒤에 감동적인 멘트를 원하는 속내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질문이다. 한두 번 인터뷰를 따본 솜씨가 아니다.
마이크를 붙잡은 내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났다.
“저는 한 사람을 위해 노래를 불렀을 뿐입니다. 이 곡은 존을 위한 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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