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듀스 나노머신-32화 (32/124)

플레어, 꽃길 걷자 (1)

우리는 또 다시 이전에 앉았던 공개홀 관객석에 자리했다.

장요한이 옆에 앉으며, 쑥덕거린다.

“저번에는 그래도 꽉 찼는데, 지금은 어째 좀 휑하네요.”

서른 넷 팀 중 절반이 1차 예선 전에서 떨어지고, 지금은 딱 그거의 절반만 남았다. 듬성듬성 보이는 빈자리가 꼭 이빨 빠진 옥수수 같다. 그걸 보고 있는 내 마음도 마냥 편치만은 않다.

마치 피로 얻어낸 승리 같아서.

연예계는 밟고 밟히는 전쟁터라고 했으니, 나는 전쟁에서 이긴 장수쯤 되려나?

떨어진 애들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이를 갈면서 연습에 매진하고 있을까? 아니면 주어진 재능을 탓하며 자포자기 하고 있으려나.

인기가 극명하게 나뉘는 게 연예계고, 그러한 규칙에 순응하며 살아가야 하는 게 연예인들의 숙명이라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적응하려면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오늘 2라운드 미션은 1라운드에 비해서 다소 평이한 자유곡 미션.

본인들이 가장 자신있어하는 노래를 선택해서 MR을 틀어놓고 부르면 된다.

1라운드 미션이 탈락자를 빠르게 골라내기 위한 미션이라면, 2라운드는 시청자들을 위해 만들어놓은 미션이라는 게 느껴진다.

제 아무리 실력을 평가하기에는 좋았다고는 하지만 무반주의 댄스곡이 솔직히 시청자들 입장에서 보면 뭔 재미가 있겠는가?

그나마 편집 팀에서 꼬박 며칠 밤을 새며, 재미있는 부분만 오려내고, 갖다 붙이고, 리액션 찍어 내보내고, 감동 인터뷰를 이끌어내서 그나마 그 지경인거지.

그것 때문에 시청자 게시판에도 제작진을 욕하는 글들이 줄줄 올라왔다.

음악 오디션 프로그램인지, 인생극장 다큐멘터리를 보는지 헷갈린다면서.

욕을 푸지게 먹은 덕분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2라운드는 시청자들을 위한 것에 오롯이 집중했다.

우리가 선택한 곡은 전야제라는 곡이었다.

이 역시 유명 아이돌 그룹이 불렀던 곡인데, 반복된 멜로디가 중복적으로 귀에 팍팍 꽂히는 신명나는 곡이다.

딱히 별다른 변수는 없었다.

우리는 9.6점으로 가장 높은 점수를 받고서는 2라운드를 통과했다.

대부분 1라운드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팀들은 이번 라운드 때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무대가 끝난 다음 1라운드 때와 마찬가지로 심사위원들의 극찬이 줄지어 지어졌다.

어느 정도 예상 했던 일이긴 했지만, 그동안의 노력을 칭찬으로 보답 받는 건 역시나 즐거운 일이다.

“노아 군이 이 팀의 막내죠? 고2인데도 성적도 우수하다고 들었어요. 자식을 둔 학부모로서 노아 군을 보니까 진짜 부럽네. 게다가 다니는 곳이 예술고도 아니라 인문계 학교라면서요?”

허진 심사위원이 노아를 쳐다보며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옆에서 차승민이 그 말을 거든다.

“그러게 말이에요. 나도 중학생 아들이 있는데, 진짜 말 안 들어. 그런데 공부하랴, 춤추고 노래 연습하랴 시간 안 모자라요? 한 가지를 제대로 해내기도 힘든데, 정말 대단하네. 잠은 하루에 얼마나 자요?”

노아 쪽으로 마이크가 넘어가자 녀석이 쭈뼛거리면서 말한다.

“어···. 잠은 하루에 3시간 정도? 그리고 연습은··· 멤버형들이 많이 도와줘요.”

그리고는 나를 힐끔거리고는 심사위원들을 향해 고개를 숙인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 말이 꼭 나한테 하는 것 같아서 나는 왠지 흐뭇해졌다.

“멤버들 간의 우애가 돈독해보이니 좋네요. 좋은 무대 잘 봤습니다. 3라운드 때도 기대하겠습니다.”

*

“오늘도 수고했어. 오늘 무대 진짜 끝내주더라!”

녹화를 마치고, 차조영 실장이 엄지를 올리며 멤버들을 치켜세웠다.

나는 승합차 위로 올라 멤버들을 쳐다봤다.

멤버들은 녹화가 끝난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다. 좋은 성적으로 무대를 끝낸 것도 모자라 심사위원들로부터 칭찬까지 들었으니, 기분이 얼마나 좋겠는가. 아, 그건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고.

“오빠! 플레어 오빠들!”

저만치 창문너머로 팬으로 보이는 여학생 무리들이 다가와 멤버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며 소리를 지른다. 그리고는 급기야 뒷좌석에 앉아 있던 나를 보더니, 아예 유리창에 찰싹 붙어서 사인을 해달라고 꺅꺅거린다.

와, 역시 방송이 대단하긴 대단하다. 고작 방송에 한 번 나갔을 뿐인데, 멤버들의 이름을 저렇게 다 외우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그 같은 뜨거운 반응에 장요한이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유리창문을 내렸다. 다른 멤버들도 바싹 붙어 창문 쪽을 기웃거리는데, 그 모습이 마치 미어캣 새끼들 같다.

창문이 내려가자 여자애들이 창가로 다닥다닥 붙어서 쫑알거린다. 아주 양쪽에서 난리가 났다.

“오빠들! 우리 팬 카페 설립하기로 했어요!”

“맞아요! 저희가 만들 거예요!”

팬 카페?

귀가 번쩍 뜨인다.

옆에 서 있던 또 다른 여자애 한 명이 말에 보탠다.

“저희 입덕 했으니까 덕질 많이 해드릴게요! 오빠들은 이제부터 저희만 믿고, 꽃길만 걸으시면 돼요!”

저마다 돌아가며 한마디씩 듣기 좋은 말들을 건네준다. 그럴 때마다 내 마음도 말랑말랑해지고, 간질간질해지고 그런다. 나는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는데, 누군가 나를 이렇게 좋아해준다는 사실이 아직도 어색하다.

멤버들도 저마다 잔뜩 올라가 있는 입 꼬리를 가리느라 정신이 없다.

연예인들이 인터뷰 때마다 왜 팬들을 사랑한다고 붙이는지 이제야 알겠다.

이렇게 조건 없는 사랑을 듬뿍 주는데, 어찌 사랑을 안 하고 배겨?

그 소리를 들은 차조영 실장이 운전석에서 내려 여자애들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팬 카페 만들게? 너희들이?”

“네. 오늘 애들끼리 모여서 의논해서 설립할거에요. 제가 매니저 할 거에요!”

자신을 한빛나라고 소개한 여자애가 손을 번쩍 치켜든다. 모직코트를 입은 여자애다. 체구가 작고 예쁘장한 얼굴이지만 박력은 운동선수 저리가라다. 저 기세면 다른 팬덤들이랑 기세싸움을 벌인다고 해도 절대 꿀리지는 않겠다. 차조영 실장이 한빛나를 요리저리 뜯어보더니 물었다.

“고맙기는 한데······ 너 몇 살인데?”

“고3이요. 이제 스물 살 돼요.”

“대학교는?”

“합격한 데는 있는데 그냥 안 가려고요. 공부 쪽은 제 취미가 아니라서. 등록금 아까워요.”

“아······.”

차조영 실장이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명함을 한 장 꺼내 한빛나에게 내밀었다.

“내가 플레어 매니저인데, 혹시 필요한 일 있으면 이 번호로 연락 줘. 나도 도와줄 일 있으면 도와줄 테니까.”

“넵! 아참, 매니저님! 제가요. 첫 번째 방송 끝나고 오빠들 정보 좀 모아봤는데, 인터넷에서는 딱히 건질게 없더라고요. 그래서 말인데··· 오빠들 미공개 사진이나 영상 좀 공유해주시면 안돼요? 회사 홍보팀에 이야기하면 그런 것도 주고 그런다던데. 공유해 주시면 저희가 커뮤니티사이트 돌아다니며 영업도 많이 뛸게요.”

“그런 건 또 어디서 들었어?”

한빛나가 귀여운 표정으로 혀를 쏙 내밀었다. 보기 좋은 보조개가 양쪽 뺨에 파인다.

“헤헷. 실은, 제가 이전까지 브이투오빠들 덕질 좀 했거든요. 스텝까지 갔는데, 창원오빠 음주운전 사건이랑 민재오빠 열애 기사에 폭탄 맞고, 팬덤 분위기 개판이라 탈퇴하고 나왔어요. 그래서 어디에 새둥지를 틀고, 있을까 고민 중이었는데, 때마침 플레어가 딱 보이더라고요. 그때 오빠들을 보는 순간 내가 있어야할 곳은 여기다! 싶었죠.”

차조영 실장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내가 회사 들어가면 자료 모아볼게. 연락은 어디로 주면 될까?”

“저한테 전화로 주세요. 제 전화번호가 몇 번이냐면요······.”

차조영 실장이 예비 팬 카페 매니저에게 전화번호를 받는 걸 지켜보는 데, 마치 딴 세상 이야기를 하는 줄 알았다.

스타 스케줄을 왜 저리 팬들이 잘 알고 움직이나 했더니, 저렇게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때문이구나. 헌데, 저 정도면 팬 카페 매니저한테 월급이라도 줘야하는 거 아니야? 공짜로 시간과 노력을 우리 홍보에 힘써주는데?

뒤에 앉아 있던 김태현이 고개를 내밀며 작은 말로 속닥였다.

“실제로는 무명인 그룹같은 경우는 팬 카페 운영해달라고 돈을 주는 회사도 있대요. 팬 카페 키워서 팔아먹으려는 매니저들도 있고.”

“진짜?”

볼일을 끝낸 차조영 실장이 운전석에 올라타며 말했다.

“그런 팬 카페는 어차피 오래 가지도 못해. 그런 식으로 성공하는 그룹도 보질 못했고. 팬덤도 결속력이 있어야 유지가 되는 건데, 그건 팬심이 있어야 가능한 이야기거든. 팬심은 절대 돈 주고 살수 없지. 그러니까 니들도 팬들한테 잘해야 돼.”

차조영 실장이 뒤로 팔을 뻗으며 손에 한웅큼 쥐고 있는 거를 내밀었다.

뭔가 싶어 봤더니 사탕이었다.

“자, 급하게 오느라 줄 선물을 준비 못했다면서 이거 나눠 먹으랜다.”

“우와아!”

장요한이 사탕을 무슨 신주단지 모시듯 두 손으로 받아든다. 그리고는 잽싸게 포장지를 벗겨 한 개를 우물거리고는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와, 달다, 달아.”

“사탕이 달지. 그러면 쓰겠냐?”

박진우가 그걸 보고는 혀를 내찼다.

“넌 어차피 팬이 준거면 똥이라도 맛있다고 할 거잖아.”

“미친놈아. 그래도 나도 사람인데, 설마 똥이 맛있다고 하겠냐?”

“어, 넌 그럴 것 같아.”

단호한 음성이다. 입술을 꾹 다물고, 분한 듯 박진우를 째려본 장요한이 사탕을 호주머니 속으로 감춘다. 그리고는 소리친다.

“넌 먹지 마! 넌 이걸 먹을 자격도 없어!”

“난 원래 사탕 싫어해. 너나 많이 먹어.”

박진우는 관심도 없다는 듯 쿨하게 눈을 감으며 쿠션에 등을 기댄다. 느긋한 행동과 그 같은 무관심이 불난 장요한을 활활 타오르게 만들었다.

“먹지 마 먹지 마! 먹기만 해봐, 아주··· 그냥!”

눈을 치켜 뜬 장요한이 보란 듯이 박진우만 쏙 빼놓고는 사탕을 주섬주섬 멤버들한테는 하나씩 나눠준다. 물론 나도 받았다.

어이쿠야. 다 큰 성인 녀석들이 하는 짓이 영락없는 초딩들 같네.

그걸 보고 있던 차조영 실장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이제 둘 다 그만 싸우고. 오늘은 바로 숙소로 갈 테니까 푹 들 쉬고 있어. 2라운드 미션도 무사히 잘 마쳤는데, 조촐하게 축하파티라도 해야지. 내가 통닭이랑 피자 먹고 싶은 거 다 사줄 테니까 실컷 먹고. 맥주 마시고 싶은 사람은 맥주도 마셔도 돼.”

“진짜요?”

이건 내가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같은 날 시원한 맥주 한 캔이 생각나서.

R&N에 오고 난 다음부터 술을 제대로 입에 댄 적도 없으니 시원한 맥주 한 캔이 간절했다.

몸 관리해야 한다면서 평소에도 술과 기름진 건 먹지도 못하게 하던 양반이 갑자기 이러니까 어리둥절할 수밖에.

“어, 대신 딱 오늘 만이야. 내일부터는 숙소에서 뭐 시켜먹고 그러는 건 자제하는 게 좋을 거야.”

“그건 또 왜요?”

“본선 진출한 여덟 팀한테 전담 카메라 팀이 붙을 거야.”

“카메라요? 웬 카메라?”

“숙소랑 연습실에도 카메라 달아놓을 거니까 불편해도 삼일만 참고. 보기 좋은 장면은 편집해서 기사로도 내보내고, 홍보영상으로도 써먹을 거라니까 다들 그런 줄 알고 긴장 늦추지 말고. 카메라 앞에서 절대 욕 같은 거 하면 안 돼. 알았지? 너무 잘 먹고, 잘 쉬는 모습을 보여줘도 안 되고. 괜히 시청자들이 그거 보고, 괜히 편하게 연습생 생활한다는 말 나올 수도 있으니까.”

이건 또 뭔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리야?

“애초에 그런 말 없었잖아요?”

“이미 회사에서도 수락한 일이야. 오히려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해. 평소 아이돌들은 어떻게 지내나 궁금해 하는 시청자들도 많거든. 이게 또 호감이 될 수 있는 요소가 있어. 아, 그리고 3라운드 미션에 대해서는 들었지?”

“어, 미션 곡 편곡하는 거요?”

김태현이 대답했다.

“맞아. 자세한건 내일 미션카드가 전해질 거라니까 그때 확인해봐."

“네.”

“자, 그러면 이제 출발한다.”

시동을 건 차가 서서히 움직이며, 방송국 주차장을 빠져 나간다. 장요한 녀석이 창문에 딱 달라붙어 팬들을 향해 손을 흔들다. 아쉬운 듯 멀어지는 팬들을 향해 힐끔거리던 멤버들도 뒤늦게 피로가 몰려왔는지, 차가 도로위에 올라타자 기다렸다는 듯이 축 늘어진다.

대기와 녹화 시간이 10시간이 훌쩍 넘으니 지칠 수밖에.

그건 나도 마찬가지.

음. 그나저나 편곡이라···.

미션 곡을 편곡을 해야 한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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