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가 가라. 하와이 (2)
다음 날.
달그락 소리에 나는 부스스 눈을 떴다. 눈꺼풀을 밀어 올리니, 누군가 교복을 입고, 들락날락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교복? 눈에 조금 더 힘을 주자 노아의 모습이 선명해진다. 아, 맞다. 쟤 학생이랬지. 등교하려고 그러나?
아.
눈 마주쳤다.
“안녕.”
“네. 안녕히 주무셨어요.”
고개를 꾸벅 숙인다. 인사성 하나는 참 바르다. 그러고 보니 차조영 실장이 애가 공부도 잘하는 모범생이라고 그랬지. 딱 보기에도 그런 것 같다. 교복도 얌전하게 핏 같은 거 안 줄인 채 그대로고, 용모도 단정하다.
쟤네 부모님은 밥 안 먹어도 배부르겠다. 인물도 좋고, 공부도 잘하는 저런 아들을 둬서.
응? 밥? 그러고 보니 어디서 밥 냄새가 솔솔 나는 거 같은데······.
노아가 부엌에서 등을 돌린 채 뭔가를 썰고 있다.
탁탁탁탁.
칼질 소리가 들려온다. 일정한 간격으로 들려오는 경쾌한 소리. 어디선가 본 모습이다 싶었더니, 어렸을 때 엄마가 아침상을 차릴 때의 모습과 비슷하다.
노아 너 설마 지금······. 아침밥 차리는 거냐?
부엌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문이 열리고 누군가 하품을 하며 걸어 나온다. 바지 안에 손을 집어넣고, 눈은 게슴츠레한 상태로. 곧장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
그리고 곧 이어 장요한이 모습을 나타낸다.
눈을 비비며, 날 보더니 인사 한다.
“형, 잘 잤어요?”
“어? 어.”
길쭉길쭉한 팔다리가 흐느적거리더니, 이내 러그 위로 시체처럼 쓰러진다. 그러더니 고개만 까딱 돌리고는 묻는다.
“노아야. 오늘 아침 메뉴 뭐야?”
“된장찌개랑 계란말이.”
“햄은?”
장요한이 칭얼거린다. 꼭 엄마한테 밥투정하는 아들 같다. 뭐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 생소한 광경은?
화장실에서 나온 박진우가 그걸 보고 혀를 내찬다.
“노아가 니 엄마냐? 대충 주는 대로 먹어. 멍청아.”
“자꾸 멍청이라고 할래?”
“멍청이니까 멍청이라고 하지. 어? 근데 지금 입고 있는 바지 내꺼 아냐?”
박진우가 엎어져있는 장요한의 바지를 보고, 눈을 치켜뜬다. 장요한이 움찔거리더니 이내 몸을 둥글게 말며 등을 돌린다. 딴에는 바지를 가려보겠다고 하는 심산인거 같은데···.
“그런다고 안 보이냐?”
박진우가 성큼성큼 다가와 바지를 이리저리 살펴본다. 신경질적으로 변한 눈썹이 사정없이 꿈틀거린다.
“너······. 죽는다. 내 옷 입지 말라고 그랬잖아!”
그리고는 소파에 앉아서 누워있는 장요한을 사정없이 밟는다. 장요한이 밟힐 때마다 윽윽 소리를 낸다.
“입고 잘 바지가 없어서 그랬어. 사이즈 맞는 게 네 거밖에 없잖아!”
“그러니까 좀 사라고! 내 것 좀 그만 입고!”
박진우는 바지를 벗긴다고, 헤드락을 걸고 장요한은 그걸 또 피해서 좁은 집안을 돌아다닌다. 그걸 본 노아가 인상을 찌푸린다.
“아, 먼지 날려요. 쫌! 그리고 형들 밥 다 됐다고 좀 깨워줘요. 저 늦어서 빨리 학교가 봐야 돼요.”
티격태격하던 둘이 멈춰 서서 물었다.
“너는?”
“오늘 속이 안 좋아서 그냥 갈래요. 먹은 건 꼭 설거지 좀 해놔요. 그대로 쌓아두지 말고.”
“응, 걱정 마.”
아침밥상을 기껏 차려놓은 노아는 밥도 한 숟가락 안 뜨고, 서둘러 학교로 등교한다.
알고 봤더니, 노아는 막내가 아니라 이집 식모였다. 이 나쁜 형들 같으니라고. 도대체 열여덟 살밖에 안된 애한테 무슨 짓을 하는 거야?
학교 잘 가라고 손을 흔들어준 다음 물었다.
“노아가 매일 저렇게 아침 차려? 학교 가기 전에?”
바지를 뺏긴 장요한이 빤스 차림으로 머리를 긁적인다.
“원래는 아침당번 정해서 번갈아가면서 하기로 했거든요?”
“그런데?”
“노아가 한 번씩 먹어보고는 그냥 하지말래요. 자기가 다 한다면서.”
그래. 너 하는 거 보니 안 봐도 알만하다. 니들이 라면이나 끓일 줄 알겠지, 뭔 밥을 해봤겠니.
“형들! 밥 다 됐어. 나와서 밥 먹자!
박진우가 밥 뜨고, 찌개를 옮겨 담는 사이 김태현이 방문을 열고 나온다. 어제까지 본 김태현은 왠지 모르게 다가서기가 힘든 분위기다. 묘한 카리스마가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고, 벽을 생성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어딘지 모르게 박력도 있는 것 같고. 쟤는 기분 상 동생이 아니라 형 같다.
아마도 김승우만 없었다면 멤버들 중 리더는 저 녀석이 됐을 거다.
헌데······.
그런 녀석이 입가에 침 자국을 드러낸 채, 식탁의자에 앉아 졸고 있다. 그것도 눈은 풀리고, 반쯤 입은 벌린 채로. 알고 봤더니 아침잠이 많았다.
그래도 저 모습을 보니 왠지 조금은 더 친숙한 느낌이 나는데?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김승우까지 식탁의자에 착석했다.
된장찌개와 진미채 볶음, 김치와 시금치가 전부인 식단.
나는 된장찌개를 한 숟가락 떠먹어보고, 왜 노아가 아침식사당번이 된 줄을 알았다.
“맛있네.”
“그쵸?”
진심이다. 고2짜리가 만들었다고는 말할 수 없는 맛이다. 하다못해 밑반찬들도 다 맛있다. 오랜 자취생활로 인해 내 입맛이 저렴하게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이정도면 어지간한 사먹는 반찬보다도 훨씬 낫다.
“노아 부모님들이 맞벌이를 하셔서, 어려서부터 집에서 뭘 자주 만들어먹고 그랬나 봐요. 애가 요리 센스가 있죠. 누구랑은 다르게.”
그러면서 박진우가 힐끔 옆에 앉은 장요한을 쳐다본다.
지 이야기하는 줄도 모르고 녀석은 열심히 밥 퍼먹기에 바쁘다. 김태현은 지 앞에 밥을 가져다놔도 먹는 둥 마는 둥 여전히 졸기에 바쁘고.
김승우는 말없이 조용히 밥만 먹고 있다. 눈이 마주쳤는데도 녀석은 눈길도 돌리지 않고, 태연하게 그 상태로 밥을 먹고 있다. 미동도 없이.
눈빛이 고요하다. 꼭 거센 폭풍이 몰아치기직전의 호수처럼.
뭐지, 저 표정은?
신경 끄고, 밥이나 먹자는 생각에 마지막 남은 계란말이에 젓가락을 짚으려 할 때였다. 녀석의 젓가락과 겹쳐졌다.
“너, 먹어.”
내가 손을 떼며 양보했다. 그깟 계란말이 하나쯤.
그러자 김승우가 계란말이를 입에 가져가며 피식 웃는다.
“어차피 줄 생각도 없었거든.”
뭐?
녀석이 묘하게 웃는다.
나를 보는 시선이 뭔가 미묘하다.
불현듯 어젯밤 녀석이 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분명 나를 쫓아낸다고 했었지.
그리고 몇 시간 뒤 나는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녀석이 묘하게 짓던 표정의 의미도.
거센 폭풍우가 R&N에 상륙했다.
치맛바람을 머금은 토네이도가.
*
가장 먼저 직격탄을 맞은 것은 본부장실이다.
“본부장!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정 대표님 어딨어?”
문이 벌컥 열렸다.
“아, 김 사장님. 여긴 어쩐 일로···.”
“정 대표 어딨냐니까?”
“대표님, 외주 미팅 있으셔서 참석차 부산 가셨습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죠? 전화해보셨습니까?”
“전화연결이 안되니까 그렇지!”
“이 시간이면 회의 중이실겁니다. 급한 일이라도 있으세요? 그러시면 제게 말씀하시면 도움을···.”
“내 아들. 내 아들 일 어떻게 된 거야? 이번에 데뷔하기로 한 팀에서 찬밥 됐다며?”
쳐들어온 것은 김백만이었다. 김승우의 아버지이자 TA프로덕션의 사장. R&N대표의 고향 선배. 지금은 비즈니스 파트너로서 같이 일을 하고 있다.
“아, 그게요. 무슨 소리를 듣고 오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흥분부터 가라앉히시고···.”
“내가 지금 흥분 안하게 생겼어!? 어디서 굴러먹은 돌이 박힌 돌을 빼내려고 들어? 그리고 회사에서도 그러는 거 아니지. 승우가 실력이 부족해? 아니면 외모가 딸려? 어디다가 내놓아도 잘 팔릴 애를 데리고 있으면 팍팍 밀어주지는 못할망정, 엄한 애를 데리고 와 빼내려고 들어. 들긴!?”
김관수 본부장이 확 인상을 찌푸렸다.
다짜고짜 본부장실로 쳐들어와서 대표를 동네 꼬마 부르듯 하는 것도 못마땅한데, 회사 운영에 참견해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더군다나 본부장 나이도 몇 년후면 오십을 바라보는 데, 반말 일색 하는 것도 짜증나고.
‘어휴, 대표님 고향 선배만 아니면 그냥 확······.’
“무슨 오해가 있으신 거 같은데요. 사장님. 일단 좀 진정 좀 하시죠.”
“오해는 무슨. 듣자하니 그 얘 본부장이 꽂았다고 하던데. 사실이야?”
“낙하산이 아니라 오디션을 보고 절차대로 들어온 겁니다. 연습 생으로 놔두기에는 실력이 너무 아까워 데뷔 반에 넣은 거구요. 딱히 문제가 될건 없는데요.”
김백만 사장이 김관수 본부장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한다.
“본부장. 내가 뭐 섭섭하게 한 거 있어? 아니면 우리 승우가 뭐 잘못했어?”
“갑자기 그런 말씀을 왜 하시는 겁니까?”
“걔 빼.”
“네?”
“이번에 새로 들어왔다는 녀석 팀에서 빼라고. 신경 쓰이니까!”
*
수화기 너머로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그렇게 말을 했다고. 걔 빼라고? 김 선배가?
“네. 그렇다니까요? 본부장실을 한바탕 뒤집고, 아주 난리가 났었습니다.”
-그 선배가 성격이 좀 급하긴 하지. 안 봐도 알만하네.
“진짜 들이박고 싶은걸 억지로 참았습니다. 아니, 자기가 뭔데 걔를 빼라 마라 합니까?”
“왜, 그래 보지 그랬어.”
“네?”
곧이어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농담이야.
농담 참 살벌하다. 본부장이 몸을 부스스 떨며 묻는다.
“그보다 대표님. 언제쯤 오세요?
-아마도 특별한 일 없으면. 오후 쯤? 혹시 김 선배가 나 언제 오냐고 물어봐?
“네. 일단 알았다고 하면서 김 사장님 돌려보내긴 했는데, 내일 다시 올 거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괜찮을까요? 돌아갈 때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었는데.”
-해야 할 일이라면 해야지. 대표 자리라는 게 그러라고 있는 거니까. 그러고 보니 김 선배랑 같이 일한지도 벌써 15년쯤 됐나?
“네, 회사 창립 한지가 그 정도 됐으니까, 아마 그쯤 됐을 겁니다.”
-그래? 그만큼 같이 했으면 갈라설 때도 됐네.
“네? 그게 무슨···.”
김관수 본부장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허나, 엄청난 발언을 한 것 치곤 정도운 대표의 목소리는 담담하기 그지없다.
-자네가 보기에는 어때, 그 친구.
화제가 넘어가기에 김관수 본부장은 떠오르는 데로 대답했다.
“뭐···. 좋습니다. 인물, 실력, 뭣하나 빠지지 않아요. 게다가 보고 있으면 남을 잡아끄는 뭔가 특별한 매력이 있습니다. 잘만 키워 놓는다면 틀림없이 R&N를 대표하는 간판스타가 될 겁니다.”
-아니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김승우랑 비교해서 말이야.
“네?”
말이 잠시 끊어지더니 이어졌다.
-만약 둘 중 한 명만 선택해야 한다면 누굴 선택 하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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