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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재우다니...?”
“말그대로인데?”
오펜하이머가 바닥에 쭈그려 앉으며 귀를 팠다. 준이 입을 열었다.
“너 화염마법사잖아.”
“화염마법만 쓸 수 있다고는 안했는데. 그냥 잘쓰는게 그거인거지. 슬립마법은 기초중의 기초야. 그정도는 자면서도 쓸 수 있거든.”
“그러냐. 어쨌거나 증거는 없었던 거지?”
“그렇긴 한데. 재미있는 걸 많이 찾았어.”
그렇게 말하며 그녀가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쩌어억!
그러자 공간이 갈라지며 허수공간이 나타났다. 보통의 마법사가 사용하는 아공간과는 전혀 다른, 소름돋는 기운이 어둠속에서 느껴졌다.
준이 슬쩍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뭐냐. 그거.”
“아공간은 좁아서. 그냥 하나 만들어 봤어. 무한대로 물건을 채울 수 있어서 편하더라고.”
“그렇게 편리하기만 한 물건은 아닌 것 같은데?”
“뭐, 약간의 부작용은 있지만.”
그녀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 대수롭지 않은 부분이 마음에 걸려 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게 뭔데.”
“가끔 외도가 튀어나와. 이론적으로는 보라색까지 나오긴 하는데, 지금까지는 파란색이 최대랄까.”
“...그거 진짜 괜찮은거냐?”
“괜찮아. 입구 닫으면 되니까.”
“전혀 안괜찮게 들리는데...”
보라색 외도는 준도 본 적이 없다. 실제로 상대가 가능한 괴물인지조차 불분명 했다. 파란색만 나와도 개척 행성을 비워야 할 정도의 파괴력인데, 남색도 아니고 보라색이라면 그야말로 항성계 전체를 버리고 튀어야 할 정도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게 튀어나올지도 모르는 인벤토리를 가지고 다니는 셈이다.
“그... 가급적이면 란도넬 행성에선 사용하지 마라.”
“그 정도는 조심하고 있어. 일일이 훈계하지마.”
오펜하이머가 짜증난다는 듯이 대꾸했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정말로 조심하는지는 모를일이다.
“됐고. 그건 왜 연거야?”
“이것때문에.”
그녀가 손을 휘젓자, 허수공간 안에서 커다란 금속제 박스가 튀어나왔다. 크기는 가로세로 2미터에 달했고, 외부와 연결할 수 있는 유선 케이블 들이 줄줄이 딸려나왔다.
“헉?”
도널드가 화들짝 놀라며 그것을 가리켰다.
준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게 뭔지 아는 모양이지?”
“아, 아니... 저걸 대체 어떻게...?”
“이거 말고 열개 더 있는데. 그것도 다 꺼낼까?”
오펜하이머의 말에 준이 고개를 저었다.
“됐어. 저 녀석 반응을 보니 이게 뭔지 몰라도 중요한 거라는 건 알았으니까. 이 정도면 협상용으로 쓸만하겠네.”
“네 녀석들 지금 뭘 한 건지 아는 거냐?”
도널드 셰어의 눈동자에 거대한 지진이 일었다. 아무래도 큰 걸 잡은 것 같은데.
“이게 뭐지?”
“아, 알것 없다.”
“알려주지 않아도 상관없어. 가져가서 분석하면 그만이니까. 아니. 지금 이 자리에서 해도 되려나?”
준은 델타 시스템을 켰다. 업그레이드에 업그레이드를 거친 델타는 근거리에서는 케이블 연결 없이도 내부 정보를 검색할 수 있었다.
-CIS탱크를 분석하시겠습니까?
-뭔진 모르겠지만 알아서 정리해서 간략하게 보고해줘.
-잠시 기다리십시오.
AI의 답변과 함께 빠르게 시스템이 분석을 시작했다. 대략 10분이면 분석이 끝날 것 같아, 나는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 허수공간을 닫은 오펜하이머가 입을 열었다.
“잘 가지고 온거야?”
“그럭저럭.”
“그럼 제임스 오빠에게 말 좀 잘해줘. 일 잘했다고.”
“흠. 그러지. 그런데 그런 걸로 되겠어?”
“뭐가?”
“제임스가 일 잘하는 사람을 좋아하긴 하지만, 너는 훌륭한 직원으로 인정받고 싶은 건 아니지 않아?”
“그, 그거야 그렇지만...”
오펜하이머가 고개를 푹 숙이고 얼굴을 붉혔다. 진성 사이코패스에 가까운 녀석이 남자때문에 얼굴을 붉히다니 약간 소름돋는 광경이다. 그런 면에선 에피알게나스야 말로 정말 쿨하다고 해야할까.
“날 왜 보는 거야?”
에피알게나스가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이 녀석은 매번 이상하게 유혹을 해오는 것 치곤 전혀 감정의 동요가 없다. 다른 종족이라 그런 것인지, 아니면 원래 감정이 없는 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오히려 이런 면이 끌리는 녀석들도 있는지 여전히 델타 그룹내에서 그녀의 인기는 하늘을 치솟고 있었다.
까놓고 보면 완전히 변태녀나 다름없는데 말이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분석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도널드 셰어가 초조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그걸 내어놓지 않으면 살아돌아가기는 힘들 거다. 워싱턴 한 복판에서 정보국의 데이터베이스를 강탈하고도 무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미안. 여기서 그냥 내놓으라고 내놓는 바보는 아니라서.”
“정말 전쟁을 불사하자는 건가?”
도널드 셰어가 위협적인 목소리로 으르렁 거렸다. 괜한 공갈은 아니었다. 도널드 셰어쯤 되면 보고서 한두장으로 델타그룹에 치명적인 정책을 시행할 수 있는 영향력이 있을테니까.
하지만 그러니 더욱더 약점을 잡아 둘 필요가 있었다.
“그쪽에서 걸릴 짓을 하지 않았다면 내가 죽겠지. 하지만 그보다 내가 까발릴 정보가 더욱 중요하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거고. 자. 그럼 어느쪽일까? 과연 연방은 합법적이고 신실한 태도로 국가를 운영해 왔을까요?”
준은 콧노래를 부르면서 손을 휘저었다. 물론이지만 그럴리가 없다. 연방이라는 거대한 국가연합체가 순조롭게 돌아가기 위해서 물밑에서 이루어졌을 수많은 비인도적이고 불법적인 행위가 얼마나 많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을 정도니까.
투투투투!
창밖에서 헬기소리가 들려왔다. 이 안은 EMP장이 펼쳐져 있는 상황이니까 바깥으로 연락할 방법은 없다. 즉, 도널드 셰어가 불렀을리는 없으니 아무래도 오펜하이머가 저지른 짓들이 발각 된 모양이었다.
도널드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결국 이렇게 까지 되는 군. 헬기까지 뜬 이상, 이제 남은 건 전쟁 뿐이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싸운 것과 워싱턴에서 싸우는 건 그 사건의 규모가 다르다. 이미 이 주변은 헌터들과 온갖 화기들이 이쪽을 타겟으로 삼아 공격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죽게 될 줄이야.”
도널드의 표정은 이미 무언가를 각오한 얼굴이다.
아마도 곧 이곳으로 폭격이 떨어질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준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건물 전체를 감싸는 실드를 펼쳤다. 핵무기가 떨어지지 않는 이상, 이 실드안으로 물리적인 데미지는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핵무기를 워싱턴에서 쓸 멍청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콰앙! 쿵! 투타타타타!
경고도 없이 화력이 쏟아부어졌다. 헬기에서 날아온 미사일과, 기관총이 건물의 외벽을 거세게 때렸다. 엄청난 굉음과 빛이 건물 안쪽으로 쏟아졌다.
“으아악!”
도널드 셰어가 바닥을 뒹굴었다. 꼼짝없이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준은 덜덜 떨면서 머리를 감싸고 있는 그를 염동력으로 일으켜 세웠다.
“이 정보. 러시아와 중국이 알면 참 재미있어 하겠네?”
탕탕.
바닥에 내려놓은 거대한 CIS탱크를 손으로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데이터베이스 안에 들어있는 정보는 제법 놀랄만한 것이었다. 연방이 저지르고 있던 대부분의 테러에 관한 1등급 기밀이 들어 있었다. 그 중에서는 러시아와 중국에 관한 부분도 있었는데, 실제로 준이 이 곳으로 오면서 당했던 여객선 사고도 미국의 주도하에 벌어진 일이라는 확실한 문서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그 일이 연방대통령 조차도 모르게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다는 점이다.
그 말을 들은 도널드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어, 어떻게...?”
“정보국 부국장이라는 녀석이 내 능력도 제대로 모르는 건가?”
“아니. 그게 아니라 그 정보를 대체 어떻게...”
“그런거야 쉽지. 어쨌거나 러시아와 중국의 전쟁을 유발하기 위해서 하고 있는 작업이 엄청 많은 것 같은데 말이지. 이거 군수산업때문에 하려는 거였구만? 그냥 지역패권을 강화하기 위해서인지 알았는데.”
“그런건 원래 겸사겸사 하는 겁니다. 형님.”
“그래 너 똑똑하다.”
“윽.”
준은 검둥이의 이마에 가볍게 한방 먹이고는 다시 도널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표정은 죽음을 예감한 때에 비해서 더욱 좋지 않아 보였다. 혈색이 파란 것이 거의 시체처럼 보였으니까.
“그건 10중 보안이 걸려있는 데이터베이스다. 그걸 해석했을리가 없어...”
“미안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컴퓨터가 좀 좋은 거라서.”
준은 머리를 툭툭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오리진의 조각이라곤 하지만 이미 수많은 조각들을 이용해 업그레이드를 거친 델타는 현존하는 어떤 컴퓨터보다도 그 성능이 뛰어났다. 이정도 보안을 뚫어내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제법 놀라운 정보가 있었다.
-데이터분석 결과 시그마의 존재가 감지됩니다.
-시그마? 그거 조각의 일부 아닌가?
브랜든이 사용해서 공간이동을 가능하게 했던 조각의 이름이다.
그게 왜 지금 여기에서 나오는 걸까.
-자체적으로 진화한 존재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만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정확한 정보는 없습니다.
-일단 계속 추적해줘. 뭔가 나오는대로 말해주고.
-알겠습니다.
연방에서 조각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흔적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조각의 형태였다면 델타맵에 나타났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맵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시그마를 나처럼 직접 체내에 심어 이용하고 있는 누군가 일 수도 있었다.
그런 녀석이 연방정보국과 연결되어 있다.
이건 제법 흥미로운 상황이다. 다만 지금으로선 녀석을 추적할 충분한 자료가 없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