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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설마 다 같이 죽자는 건가?”
“어차피 날 죽이러 온 거 아니었나? 죽을때 죽더라도 뉴욕시를 날릴 수 있으면 역사에 이름 한줄정도는 새길 수 있겠지.”
“오명이라도 상관없다는 거로군.”
“연방이라는 거대한 국가를 조각낼 수 있다면 오명이라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만.”
아이반의 눈동자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헌터로서의 능력은 상급일지 모르나, 오랜시간 타성에 젖어 산 몸뚱이는 이미 늘어질대로 늘어져 있는 상태였다. 이미 그의 몸은 마약에 절어 격발기를 들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단순히 위협용은 아닌 것 같고. 협상의 여지는 있는거겠지?”
“무식하게 밀고 들어온 녀석치곤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는 군.”
“뭐, 그럴만하니까 그렇게 한거지. 굳이 이리저리 머리쓰면서 골치아프게 돌아가는 걸 좋아하지는 않거든.”
“대단한 자신감이군. 이 언더시티가 그렇게 만만해 보였나?”
“언더시티라. 뭐 너희들이 뭐라고 부르는 지는 관심없는데, 내가보기엔 여기는 그냥 쥐새끼들 소굴처럼밖에 보이지 않는다만.”
“여유있는 척은 적당히 하지. 아무리 네 녀석이 강하다고 할지라도 이 폭탄이 터지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건 터뜨려 보면 알거고.”
준은 피식 웃으며 천천히 녀석을 향해 움직였다.
아이반이 한걸음 뒤로 물러서며 스위치를 내밀었다.
“정말 이 폭탄이 터져도 좋다는 말이냐?”
“솔직히 말하면 난 연방사람도 아니고, 뉴욕이 날아간다고 해도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거든.”
“무슨...?”
“내 소문을 못들어 본 건가? 하긴 연방놈들 그렇게 쉽게 내 이름을 풀어댈리가 없지.”
자비스를 단독으로 처리하고, 아영이들을 풀어서 복구작업을 하고 있지만 거기에 준의 이름은 들어가 있지 않았다. 델타 인더스트리라는 상호명 정도만 알려져 있었고, 준이 이곳에 와 있는 것은 철저히 비밀에 붙이고 있는 것이다.
시키는 대로만 움직이는 아이반이 준의 이름을 알리가 만무했다.
이미 ELF는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비선조직이 와해된 상태였고,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정부국의 지시에 맞추어 적당한 곳에 테러를 하는 것 뿐이었다.
거기에 들어가는 온갖 자원까지도 모두 지원을 받는 상황이니 사실상 연방의 꼭두각시라고 해야 옳았다.
“네, 네놈이 연방사람이 아니라면 왜 날 죽이려고 하는거지?”
“죽이려는 생각은 없었는데, 생각이 조금 바뀌려고 하는 걸?”
“무슨 소리지?”
“내 원래 협상문은 이랬단 말이지. 머리라는 게 있으면 적어도 연방정보부의 지시를 받은 자료들을 차곡차곡 쌓아놓고 있을 거고, 그게 아니더라도 저쪽에 타격이 될 만한 무언가를 손에 쥐고 있을 거라고 말이지.”
“그, 그건...”
“그런데 말이야. 그 무기가 뉴욕 지하에 있는 폭탄이라고 하면 좀 마음에 안들거든. 겨우 가지고 있는 패가 이거라면 내가 널 가만히 내버려 둘 이유가 없잖아.”
준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허공에 푸른색의 던전입구가 나타났다.
“머, 멈춰라! 조금이라도 더 움직이면 이걸 터뜨려 버리겠다!”
아이반이 손에 든 스위치를 들어올리며 외쳤다.
준이 피식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저 폭탄들. 전부 합치면 몇 kg이지?”“무, 무슨...?”
“얼추 세어보니까 한 200킬로그램 쯤 되려나?”
준은 염동력을 이용해 폭탄들을 들어올렸다.
아이반이 이를 악물더니 손에 들고 있던 스위치를 눌렀다.
꽉!
“꺅!”
시미가 깜짝 놀라며 준의 등에 바짝 달라붙었다.
하지만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이반이 당황한 표정으로 폭탄을 살펴보았다.
“이, 이게 어떻게 된거지?”
“불발탄인가보지.”
“그, 그럴리가. 이건 내가 직접...”
“그럼 네 실력이 형편없던가.”
덜컹. 덜컹.
준은 공중으로 들어올린 폭탄들을 던전의 입구 안에 처넣었다.
사람이 있는 곳은 아니라 폭발이 일어난다고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곳이었다. 물론 저 던전은 폐쇄해야겠지만.
슥.
입구가 닫히고 전철안의 모든 폭탄이 사라졌다.
“빌어먹을!”
아이반이 허리춤에서 총을 뽑아들었다.
“꼬, 꼼짝마.”
“총알은 안통하니 치우시고. 검둥아!”
“넵! 형님!”
파앗!
번개같은 속도로 튀어나간 검둥이가 아이반의 등뒤에서 나타났다.
“무슨!”
검둥이의 속도에 놀란 아이반의 몸을 뒤집으며 로우킥을 날렸다. 하지만 이미 검둥이는 가볍게 몸을 띄운 상태에서 몸을 회전하며...
빠악!
“컥!”
아이반의 관자놀이에 검둥이의 회축이 먹혀 들어갔다.
짝. 짝.
준이 박수를 치며 감탄했다.
“너 요즘 운동하냐? 그런 기술은 처음보는데?”
“인간형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이런저런 기술을 익히는 중입니다. 아무래도 너무 오랫동안 개같이 살았더니 몸이 영...”
검둥이가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웃음을 흘렸다.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노력이라도 하니 그래도 다행이었다. 그래도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리진 않았구나 싶은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한거지?”
에피알게나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뭐가?”
“방금 그거. 저자가 스위치를 눌렀는데 폭탄이 터지지 않았잖아.”
“아. 그거 말이지? 별거 아니야. 어차피 저 스위치에서 보내는 건 전기신호잖아.”
“그런데?”
“그냥 이 근처의 전자기파를 죄다 동결 시켰지. 이런 건 고급기술이라 함부로 유출하면 안되는건데.”
“대단하네. 원래 그 정도까지 전자기파를 컨트롤 할 수 있었던 거야?”
“최근에 좀 많이 사용하면서 응용기술을 익혔달까. 그래도 미래의 나에 비하면 아직 부족하지만.”
미래의 준 알스버그. 그는 전기력이 가지는 반발력을 제거함으로서 자신의 몸을 건물벽을 통과하도록 만들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하면 우리몸을 구성하고 있는 원자가 건물을 구성하고 있는 원자들과 부딪혀서 손상을 입지는 않을까 하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원자를 구성하는 원자핵과 전자사이에는 엄청나게 넓은 빈 공간이 있었다.
예를 들어 두개의 은하가 서로 충돌하여 하나가 되는 경우를 상상해보자. 두개의 은하는 서로의 별을 튕겨내기도 하고 뭉침과 떨어짐을 반복하면서 격렬하게 반응하겠지만, 사실상 은하안의 별들끼리는 서로 부딪히기는 커녕 근처에 가지도 않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몸이 벽을 통과하게 될 경우에도 서로 부딪히지 않고 스쳐지나가기만 할 뿐인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전자기력을 아주 미세하게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지금의 준에게는 아직 힘든 일이었다.
어쨌거나 자신이 이룬 경지이니 딱히 초조해 하거나 하는 건 아니다. 언젠가는 익힐 수 있을테니까.
“이 녀석은 어떻게 할까요? 형님.”
검둥이가 기절한 아이반의 멱살을 쥔 채로 다가왔다. 두 사람의 키 차이가 좀 나다보니 기절한 아이반의 몸이 바닥에 질질 끌려오고 있었다.
“일단 근처에 쉴 곳을 좀 찾자. 깨어나면 연방을 압박할 자료가 있는지 좀 알아보고.”
“정말 그런게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일단 자기가 살려면 가지고 있었겠지. 정보국이 아무리 엘리트 집단이라고 해도, 이런 테러리스트들에게는 자기들만의 노하우가 있는 법이거든. 아마도 그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방법으로 숨겨두었을 거야.”
물론 준도 추측만 할 뿐이었다.
만에 하나 아니라면, 그냥 그런 것도 못하는 멍청한 놈이라고 둘러대면 그만이었다.
“여기 있습니다.”
아이반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서류뭉치를 건넸다.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아직도 이런 종이서류를 쓰는 거냐?”
“그, 그것이... 정보국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건 그렇긴 한데... 뭐, 딱히 안될 건 없긴 하지.”
준은 천천히 서류를 뒤적였다.
그 안에는 연방 정보국과 합작을 통해 일으킨 수많은 테러사건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파리에 있는 르몽드 사옥 폭파사건이었다.
유서깊은 언론사인 르몽드의 경우 연방의 독재적인 의사결정에 대해 지속적으로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해온 곳이었다. 정부의 심기에 거슬린 대가치고는 참혹하게도 사망자만 200명이 넘게 일어난 사건이었던 만큼 연방내에서는 엄청난 이슈가 되었던 테러사건이기도 했다.
애초에 연방에 관심이 없던 준이었지만, 서류에 있는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그것만으로도 현 내각 전체가 총사퇴를 해야할 정도의 무지막지한 사건이었다.
“간이 큰 놈들이구만. 이런 일을 저지르고도 들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연방의 정보국이 마음만 먹으면 대통령을 암살하고도 들키지 않을 수 있을 겁니다.”“그 정도인가? 내가 보기엔 엄청 실력없어 보이던데.”
“그거야 형님이 말도 안되는 개캐라서 그런 거지요.”
준의 말에 검둥이가 기가차다는 듯 입을 열었다.
“개캐...? 그거 욕이냐?”
“개 사기 캐릭터라는 뜻입니다. 형님. 놈들이 힘없이 당하긴 했지만 어쨌든 그렇게 바보는 아닐겁니다. 금방 털리긴 했어도 유효한 협박 수단을 가지고 형님을 뒤흔들기도 했고요.”
“하긴 셀럼과 내가 연관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고.”
그것때문에 결국 슈퍼솔저 프로젝트가 까발려지고, 자비스 사태가 일어난 원인이 되긴 했지만 실제로 그들이 상당한 수완가라는 점은 인정해야 할 부분이었다.
준은 제법 흡족한 표정으로 서류를 인벤토리에 챙겨넣고는 아이반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일단 내용은 상당히 마음에 들어. 헌데 이것만으로는 좀 부족한 것 같은데?”
“뭐, 뭐가 또 있습니까?”
“이 내용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있어?”
“디지털 파일이라고 할 만한 건 없습니다. 그건 놈들이 귀신같이 찾아내니까요.”
“오프라인으로 저장해 놓은 건 없는 건가?”
“어떻게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것 까지 찾아냅니다. 결국 이런 구시대적인 물건을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흠... 아쉽군.”
서류라는 건 얼마든지 조작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연방을 궁지로 몰아넣으려면 한방을 확실히 날릴 수 있는 증거가 반드시 필요했다.
“녹음을 따놓은 것도 없는 건가?”
“그들은 말하지 않습니다. 저도 들을 생각도 없고요.”
“그래도 연방소속이라는 것을 알아볼만한 무언가는 있을 거 아니냐.”
“그것이...”
아이반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자세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제대로 된 답을 내어놓으면 목숨만은 살려주지.”
준의 말에 아이반이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이, 있긴 있습니다.”
“뭐지?”
“정보국과의 연결고리요. 녀석들이 저에게 연락하는 창구가 있습니다.”
“창구?”
“그들은 사람을 직접 보내옵니다. 보통은 노숙자를 이용하지요. 돈을 얼마 쥐어주고는 심부름을 시키는 방식입니다.”
“노숙자를 추적하자는 건가? 한번 이용해 먹은 사람을 다시 쓸리가 없잖아.”
“바로 그 점입니다.”
아이반의 말에 준은 곧바로 그가 하려는 말을 깨달았다.
“이 일은 누구에게도 알려져서는 안되는 일이지. 그런데 노숙자들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니고. 그러니 한번 써먹은 녀석은...”
“살려두지 않을 겁니다.”
“그렇군. 노숙자를 죽이러 오는 녀석을 잡아서 역추적하겠다는 거로군. 하지만 마냥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건가?”
“이쪽에서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암호문을 이용해 특정 사이트에 글을 올리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저쪽에서 연락책이 옵니다.”
“좋아. 바로 시행하도록 해.”
아이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에피알게나스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헌데 저 녀석 믿을 수 있는 거야?”
“어차피 죽을 목숨인 녀석이야. 만에 하나라도 살아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죽어라고 매달리겠지. 만약, 함정이라면 그냥 죽여버리면 되는 거고.”
준은 일부러 마지막 말은 들리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아이반의 어깨가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