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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일단 순조롭게 아영이들의 복제는 완료되었다. 순식간에 수를 열개 이상으로 불린 신아영은 미대륙 곳곳으로 흩어졌다. 거기서도 열심히 수를 늘리겠지.
따지고 보면 준의 유전자들이 세상으로 퍼져나가는 것이다.
‘더 이상 생각하지말자.’
준은 고개를 흔들어 잡생각을 떨쳐내었다.
“뭐해?”
풀썩.
에피알게나스가 준의 옆에 앉았다. 소파가 기분좋게 출렁였다.
준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그나저나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거야?”
“글쎄... 지금 당장 백악관으로 쳐들어갈 수도 없고.”
아무리 준이 막무가내라고 해도 정도는 있다. 아무런 명분도 없이 곧바로 쳐들어갔다간 연방이 사활을 걸고 준을 쳐죽이려고 할 것이 틀림없었으니까. 정보국과 상대하는 것과, 연방의 전체 무력이 자신에게 투사되는 건 다른 문제다.
제임스에게 물어보면 이런저런 방도를 알려줄 것 같긴 했지만, 그렇지 않아도 과중한 업무에 치여있는 그를 또 써먹을 생각은 없었다.
그가 생각하는 최선은 정보국에서 굽히고 들어오는 것이다. 자비스를 만들고, 그것으로 인해 미대륙의 도시들이 개박살 난 것을 밝히리라는 것 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을 억지로 가두려 하고 히트맨을 보내거나, 은설이를 납치하려고 한 것 들에 대한 사과와 재발방지 정도를 약속받고 싶은 거다.
물론 저들이 그렇게 나올리는 없다.
그러니까 준도 차곡차곡 명분을 쌓기 위해서 계속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 자신은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라스베이거스에서 머물며 보여주는 것이다.
아영이들을 뿌려서 복구작업에 도움을 주는 것도 마찬가지 행보. 현재 연방, 그 중에서도 특히 미국내에서 아영이들의 생산기업인 델타 인더스트리에 대한 관심이 폭증하고 있었다. 연방에서도 만들 수 없는 완벽한 안드로이드를 만들 수 있는 기업에 대한 관심이 거의 대부분이긴 하지만, 그런 관심도 지금의 준에게는 상당한 도움이 된다.
“어차피 여기서 머물거면 지금 해치워 버리자.”
에피알게나스가 준에게 바짝 붙으며 입을 열었다.
“뭘?”
“그거 말이야. 섹스.”
“쿨럭.”
절로 헛기침이 튀어나왔다. 물이라도 마시고 있었으면 시원하게 뿜었을 지도 모른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했잖아.”
“네 성격상 나중이라고 하면 몇년 후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건 인정.”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은설이만 해도 얼마나 질질 끌었던가.
몸이 두개로 나뉘어지는 일이 없었다면, 아직도 은설이와는 서로 질질끌면서 눈치만 보고 있었을 확률이 높다.
에피알게나스가 더욱 바짝 붙으면서 입을 열었다.
“딱 한 번이면 돼.”
“그건...”
준은 슬슬 혼란스러워 지기 시작했다. 인류를 초월한 아름다움을 지닌 소녀가 자신의 곁에 바짝 붙어서 한 번 만 하게 해달라고 조르고 있었다. 그녀의 뜨거운 숨결이 뺨에 닿았다.
아래쪽으로 피가 몰리는 게 느껴졌다.
거기다가 바로 전날 밤에 그렇게 당해버린 기억까지 있으니 한 번 쯤은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잠깐만.”
준은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짜 너무하네.”
“미안. 그건 아닌 것 같아. 나도 사람인지라... 그런 일을 아무런 감정도 없이 할 수는 없어.”
“어제는 잘 하던데.”
“...!”
준은 당혹감에 그녀를 돌아보았다.
설마 그걸 본 건가? 정말 짧은 시간이었는데.
“소리가 그렇게 크게 나는데 모를리가 있겠어? 시미나 검둥이도 들었을 걸?”
“하, 하지만 그거 음파를 차단했다고...”
“그거 거짓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로봇에 그런 기능이 있을리가 없지.”
“말도 안 돼...”
준은 다시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럼 자기가 당하는 꼴사나운 장면을 실시간으로 방송했다는 말이다. 이 녀석에게 들킨 것도 모자라 시미와 검둥이에게까지.
그렇지 않아도 시미도 준을 덮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중이다. 이대로라면 밤중에 언제 달려들어도 이상한 상황이 아니다.
“그, 그건 어쨌든 불가항력적인...”
“그런 변명 못나보이는 거 알지?”
“하... 그래.”
준은 한숨을 깊게 쉬었다. 에피알게나스가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나랑 하는 거다.”
“아니. 그건 안될 것 같아.”
“내가 로봇보다 못하다는 거? 인간남자라면 로봇보다는 내가 훨씬 더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에피알게나스가 자신을 가리키며 놀란 눈을 떴다. 이러나저러나 자기가 예쁘다는 사실은 알고 있는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 손님이 찾아왔거든.”
투투투!
멀리서 헬기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좋은 타이밍이었다.
헬기가 여전히 유용한 수단이라는 건 몇번을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다.
셔틀은 이래저래 기름을 상당히 많이 먹는다. 최신형의 반중력 엔진을 탑재한 물건은 소형원자로까지 들어가기 때문에 제작 단가도 훌쩍 뛴다. 물론 델타스피릿의 권역 안에서는 델타엔진을 사용하면서 제작비용을 상당히 절감하고 있지만 아직 연방까지 수출되고 있지는 않은 상황이다.
거기다가 더 이상 행성내에서 전쟁을 할일이 없는 상황에서 초음속 전투기는 거의 쓰일일이 없었다. 몇몇 반군들이 존재하긴 했지만, 사막이나 정글 구석에 숨어서 대항하는 정도.
그런 이들을 상대할때에도 헬기가 적격이었다.
어쨌거나 전투헬기는 보병킬러라고 할 만하다.
그건 알겠는데.
‘그래도 그렇지 새카맣게 하늘을 뒤덮을 것 까진 없잖아.’
준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푸른색의 하늘을 배경으로 수백대의 헬기들이 자신이 머물고 있는 호텔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와. 무슨 파리떼 같네요.”
검둥이가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실제로 이렇게 많은 헬기가 떠있는 건 처음본다.
게다가 그게 전부가 아니다.
“탱크도 엄청 많아요.”
도로를 따라 줄지어서 전차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국방부에서 협조를 한 모양이다. 준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자신에게는 저런 화기들이 전혀 먹히지 않는다.
다른 일행들은 위험할 수 있지만 그것도 실드를 펼치면 그만이다.
‘정보 공유가 안된건가...? 하긴 총알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만 알겠지.’
총알정도를 튕겨내는 헌터들은 제법있다. 그러니 아예 화력으로 조지려고 하는 모양이다. 게다가 로버를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라스베가스에 미사일을 날릴 수는 없을테니. 아마도 이게 할 수 있는 전부일거다.
준은 일행들과 함께 천천히 호텔밖으로 나섰다. 안에 있어도 괜찮겠지만, 멀쩡한 건물을 부수고 싶진 않았다. 이 도시의 건물들은 어지간한 것들이 다 사적급이다.
기분나쁘다고 이런 유물들을 파괴할 수는 없지.
놈들은 그가 순순이 밖으로 나오자 약간 당황했는지 허둥지둥 대열을 갖추었다.
삐익-
[준 알스버그! 당장 무장을 해제하고...]
철컥!
준이 니들건을 들어 마이크를 든 장교를 겨누었다.
처처척!
사방에 깔린 전차 사이에서 보병들이 총구를 들이밀었다.
그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잘 따라오라고.”
팟!
준이 일행들과 함께 하늘을 날았다.
10여분을 날아 도시밖에 사막에 내려앉았다. 뒤에서 황급히 따라오는 헬기들의 모습이 보였다. 총탄 한발 쏘지 못하고 닭쫓던 개 지붕쳐다보는 꼴이 된 보병들이 황급히 전차와 함께 도시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으니 한시간이나 걸려 겨우겨우 포위망이 완성되었다. 이게 연방의 전력이라고 하면 조금 실망이다. 군대가 아니라 헌터를 데리고 왔어야지.
아무리 헌터를 상대로 화기가 유효하다고 해도 말이지.
뒤늦게 땀을 뻘뻘 흘리며 쫓아온 적 대장이 준을 향해 크게 외쳤다.
[준 알스버그! 지금이라도 순순히 협조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뭘 협조해야하는 건데?”
[음...? 그, 그러니까. 순순히 잡힌다음에 조사를 받아야...]
“겨우 그 이야기 하려고 이렇게 군대를 몰고 온건가?”
한심하다는 투로 이야기 하자, 마이크를 든 자의 얼굴이 구겨졌다.
준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차피 날 죽이려고 온거, 서로 입씨름 할 필요 없잖아.”
[젠장. 전원 발사!]
투투투퉁!
콰아아아!
콰앙!
뻥!
사방에서 어마무시한 병력들이 화력을 쏟아부었다. 준은 실드를 펼치고는 가만히 기다렸다. 어차피 엑조틱웨폰이 아닌 이상 저런무기로는 타격을 줄 수가 없다.
게다가 이 실드는 설령 엑조틱 웨폰이라고 해도 어느정도 방어가 가능했다. EX필드와 달리 마나를 소모해서 사용하는 기술이니까.
“엄청 쏟아붓는 군요. 쓸데없는 짓을.”
검둥이가 혀를 찼다.
[그만!]
그렇게 1분간 화력이 쏟아지다가 일순간 뚝 멎었다.
준은 가만히 먼지와 연기가 가라앉길 기다렸다.
잠시후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준을 본 적 대장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렸다.
“어... 어떻게.”
얼마나 놀랐는지 들고 있던 마이크도 떨어뜨렸다.
준은 목을 이리저리 움직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는 내 차례지?”
“뭐, 뭐라고?”
“다들 재미있게 놀아보자고.”
준이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콰아아!
그 순간 바닥에서 엄청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뭐, 뭐야!”
갑작스런 상황에 놀란 이들이 총을 발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투타타타!
뒤이어 준을 향해 다시 총성과 포탄이 쏟아졌지만, 준은 느긋하게 기다렸다.
“헉. 헉.”
알베르토 준장은 전차의 위에서 망원경을 들었다.
준 알스버그를 향해 두번이나 되는 집중포화를 쏟아부었다.
‘설마 이번에도 살아나진 않겠지...?’
하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 그가 죽었을 거라는 상상은 그저 바람일 뿐이라는 걸 이미 깨닫고 있었다.
“발사중지!”
화력을 투사할 만큼 투사했다는 생각에 포격을 중지했다.
제발이지 이번만은 죽었으면 했다. 위에서 내려온 명령은 준 알스버그의 척살이었다.
처음에는 헌터 하나에 사단급 병력을 투사하는 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이 싹 달아난 상태다.
첫 번째 포화속에서도 그는 놀랄만큼 멀쩡했다. 이번 공격에서 갑자기 그가 피를 토하고 쓰러질리가 없었다.
휘이잉!
갑자기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계절과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한기에 그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대체 이게 무슨...’
그는 불길한 기운을 느끼며 서서히 연기가 걷혀져 가는 전방을 주시했다.
무언가 좋지 않은 느낌이다.
그가 다시금 발사명령을 하기 위해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연기를 뚫고 거대한 무언가가 뛰쳐나왔다.
크워어어어!
1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외도였다.
그것은 마치...
“공룡...?”
중생대 최강의 킬러.
티라노사우르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