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0 ----------------------------------------------
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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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제 휴가는 끝난 거야?”
은설이 입을 열었다.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좀 아쉽다. 많이 돌아다녀 보지도 못했는데.”
“미안. 마음같아서는 더 시간을 같이 보내고 싶지만 해야만 할일이 있어.”
“셀럼이라는 사람 말하는 거지?”
“나는 그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어. 7천억이라는 돈을 무기로 연방에서 그의 자유를 구속하고 있다면 내가 그 빚을 대신 갚아줘야 할 의무가 있지.”
준에게 셀럼은 생명의 은인일뿐만 아니라, 힘든 함내 생활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인간적으로 대우해 준 사람이다. 지금이 바로 그에게 진 빚을 갚을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은설이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이건 내 생각인데...”
“알아. 말안해도.”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7천억이지, 그를 살린 것은 연방에서 밝히지 않은 온갖 기술을 투입한 결과 일 것이다. 아직 상업적으로 시도조차 되지 않은, 아니 외부로 알려지지도 않은 기술이다. 그런 귀중한 실험의 결과물을 단돈 7천억을 주고 내어줄리가 없다.
“하지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를 풀어줄 생각이야.”
“저쪽 너도 동의할까? 또 다른 너 말이야.”
현재 또 다른 준 알스버그는 여전히 스파일리 행성에서 거주하고 있는 중이었다. 행성의 침식을 걷어내고 테라포밍이 완료되면 그 행성이 가지는 가치는 준이 그 행성을 얻기 위해 사용한 돈의 수천수만배 이상 상승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었다.
“하하.”
준은 웃음을 흘렸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어쩔 수 없는 문제이긴 할 거다. 같은 외모라고 해도 분명히 준 알스버그는 두 사람이 존재하는 것 처럼 보일테니까.
“저쪽의 나는 미래의 나야.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선택한 일은 저쪽에 있는 준이 이미 결정을 내린 일이지. 내가 선택한 일은 곧 그가 선택한 일이고. 애초에 같은 사람이니까 이렇게 나눠서 생각하는 게 좀 우습긴 하지만 네가 이해하려면 이쪽이 낫겠지?”
“아. 미안. 사실 이런 게 익숙하지가 않아서.”
“익숙한 게 이상한거지.”
같은 존재인 두 사람이 한 시간대에 있다는 것 자체가 유사이래 처음있는 일이다.
자신이 뭔가 실수를 한 건 아닐까 하고 안절부절하는 그녀의 모습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꺅!?”
“왜? 이제와서 싫은거야?”
준은 그녀의 입술에서 얼굴을 떼며 입을 열었다. 기습적인 키스를 시도한 건 생각해보니 처음이었다.
“그, 그건 아닌데... 스승님도 있고.”
“그 양반 아까 지하실로 돌아갔어.”
“시미는?”
“아...”
녀석은 신경 못썼다. 주변을 둘러보니 머리 위에서 팔짱을 끼고는 내려다보고 있었다. 녀석이 약간 화난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나는 이번에도 따라갈거에요.”
“뭐... 그래. 넌 어차피 여기 있어봐야 할일도 없으니까.”
“핫? 쓸모없어서 다행인거에요.”
시미가 활짝 웃으며 준의 어깨에 내려앉는 걸 보곤 서은설이 웃음을 터뜨렸다.
“시미 잘 챙겨줘. 나는 휴가가 끝났으니 이제 일터로 돌아가야지.”
“그래. 연락할게.”
“보고싶으면 언제든 와도 돼.”
“꼭 갈게.”
“거짓말이면 나중에 화낼거야.”
은설이 얄궂은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준은 서은설과 함께 일단 란도넬 행성으로 돌아왔다. 현재 가지고 있는 경험치가 5천만이 넘었기 때문에 연속으로 공간이동을 사용하는데는 전혀 무리가 없었다.
란도넬에서는 검둥이가 합류했다. 엘라의 호위는 펄이 있으니 큰 문제는 없었다.
“검둥아아~”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엘라가 손을 뻗자 소년의 모습을 한 검둥이가 머리를 숙였다.
슥슥.
마구잡이로 검둥이의 머리를 헝클이는 엘라를 향해 준이 입을 열었다.
“금방 돌아올게. 검둥이가 없다고 학교 빠지고 그러면 안되는거 알지?”
“그랬다간 엄마한테 맞아요.”
엘라가 입술을 쭉 내밀곤 툴툴거렸다. 루나는 지금도 오버시어가 있는 연구소에서 외도연구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연구성과는 계속해서 델타 그룹 전체에 실시간으로 적용되고 있었다. 지금은 외도의 장갑이 화기를 막아내는 매커니즘에 대해서 연구중이었다.
간단히 말해 준의 EX필드를 과학적으로 재현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아직은 초기 단계라 이렇다할 성과는 없었지만 오버시어의 도움을 통해서 조금씩 실마리를 잡아가는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펄은 어디갔어?”
“연못에 들어가 있어요. 걔는 아빠 무서워 하잖아요.”
“그렇긴해도 얼굴을 안볼정도는 아닌데. 뭔가 이유라도 있나...?”
준이 엘라의 방을 가로질러 연못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프라이어 빌딩 최상층에는 두개층을 합쳐서 조성된 연못이 있다. 구조적으로 문제가 있을 수 있는 부분은 준이 건축기술을 사용해 모두 보강해 놓았기 때문에 안전에 문제는 없었다.
“흠..,”
준이 연못 안을 천리안을 통해 들여다보았다. 연못 가장 깊숙한 곳에 그녀의 커다란 조개집이 있었다. 입구가 꼭 닫힌 것으로 봐선 안에서 나올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뭐, 다음에 보면 되겠지.”
꼬르륵.
조개 안에서 공기방울이 새어나왔다.
검둥이와 시미를 데리고 다시 연방의 지구행성으로 돌아갔다. 위치는 서연경의 집이 있던 곳. 그곳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집터 주변에 둘러져 있는 접근금지테이프였다.
“벌써 그쪽에서 다녀갔나 보군.”
“어디 말이에요?”
“연방정보부.”
“거기 누구야? 여기 접근금지라고 붙어 있는 거... 저, 저게 뭐야?”
그때 경찰 하나가 준을 향해 다가오다가, 시미를 보고 움찔 하며 물러섰다.
“만드라고라 처음봐요?”
“보통사람은 당연히 처음보지 바보야.”
검둥이가 입을 열었다.
“시미 바보 아니거든. 검둥이가 더 바보지.”
“내가 왜?”
“펄...읍읍!”
“뭐하는 거냐? 너희들.”
검둥이가 시미의 입을 틀어막고 있는 걸 보면서 준이 한숨을 쉬었다.
“저, 정체를 밝혀라!”
철컥!
경찰이 권총을 뽑아들며 큰 소리로 외쳤다. 확실히 수상해보이는 조합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다짜고자 총을 뽑다니.
준이 염동력을 끌어올려 권총을 비틀었다.
“억?”
끼기긱!
경찰은 갑자기 느껴지는 엄청난 힘에 총을 놓쳤다.
끼이이익!
권총이 허공에서 멋대로 비틀리더니 공처럼 둘둘 말리기 시작했다.
“...신이시여.”
경찰이 엉덩방아를 찧더니 신을 찾았다.
준은 완전히 구체가 되어버린 권총을 다시 그에게 던져주고는 천천히 다가갔다.
“히익?”
“무턱대고 총을 들이 밀기에 조금 손을 썼을 뿐이야. 해칠 생각은 없어.”
준이 나름 부드럽게 말한다고 했지만 경찰은 더더욱 겁을 먹은 얼굴이다. 10미터가 넘는 거리에서 손도 대지 않고 권총을 고철로 만들었으니 귀신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긴 할 거다.
“근처에 연방에서 온 사람이 있지?”
끄덕. 끄덕.
경찰은 입을 여는 대신 고개를 격하게 주억거렸다.
“거기까지 좀 안내를 해줬으면 하는데.”
“아, 아, 알겠습니다.”
경찰이 주춤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후들거리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왜 이렇게 까지 겁을 먹는거야?’
아무리 염동력을 발휘했다고 해도 그거야 좀 놀랄 정도지 이렇게 괴물을 본 것처럼 무서워 할 일은 아니다. 혹시 뒤에서 검둥이가 변신이라도 했나 싶어 돌아보았지만 녀석은 여전히 시미와 투닥거리고 있는 상태였다.
“이, 이쪽으로...”
‘뭐, 별 상관은 없겠지.’
알아서 말을 잘 들어주면 오히려 편하다.
경찰을 따라서 도착한 곳은 다름아닌 지역 경찰서였다. 그곳에 들어가자마자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장 순경! 자리 지키랬더니 왜 들어오는 거야?”
“이 경장님. 그, 그것이...”
장순경이 계속해서 준을 가리켰다.
“뭐?”
“그러니까...”
휙휙.
이제는 아예 대놓고 준을 손가락질 하기 시작했다. 이경장은 대체 뭔짓인가 싶어 장순경이 가리킨 사람을 쳐다보았다. 말끔하게 생긴 청년이었다. 연예인 급의 미남이라고 하긴 어려웠지만, 그래도 길거리를 지나다니면 제법 눈길을 받게 생긴 사람이다. 그리고 그 뒤에는 귀엽게 생긴 소년 하나와 그 소년의 머리위에 앉아 있는 요정이 있었다.
“요, 요정?”
이경장은 그제서야 장순경이 데리고 온 사람의 정체를 알아챘다. 바로 한 시간 전, 연방정보부의 높은 사람들이 경찰서를 찾았고, 이 근처에서 요정을 데리고 다니는 젊은 남자를 발견하면 곧바로 연락을 달라고 한 것이다.
얼마전에 있었던 우주선 납치미수 사건의 용의자라는 말과 함께 그의 사진도 함께 건네받았다. 하지만 잠깐 보고 잊어버린 터라 눈앞에 있는 이 청년이 그 사진속의 주인공이라곤 생각지 못한 것이다.
“비, 비상!”
“뭐야?”
“무슨 일이야!”
이경장이 소리를 지르자 근처에 있던 경찰들이 일제히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들 역시 준을 알아보고는 일제히 권총을 봅아들었다.
차차차착!
“...이거 뭔가 대단한 오해를 사고 있는 것 같은데?”
준이 가볍게 손을 들며 헛웃음을 흘렸다.
“장순경! 가서 서장님께 보고드리고 그 사람들 불러와!”
“네, 넵!”
장순경이 황급히 자리를 떴다. 그를 보낸 이경장은 권총을 겨눈 채 조심스럽게 준에게로 다가갔다.
“간이 커도 너무 큰 녀석이군. 테러리스트가 경찰서를 찾아와?”
“테러리스트? 아, 그렇게 된 거였군.”
준은 그제서야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연방정보부에서 자신을 테러리스트라고 알린 모양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일이 사정을 이해해 줄 이유는 없었다.
준은 느긋한 태도로 경찰서 안을 슥 돌아보았다.
“사람이 찾아왔는데 여긴 뭐 차같은 것도 안주는건가?”
“무, 무슨?”
“서있는 것도 그러니까, 자리 좀 안내해주지 그래? 어차피 연방정보부에서도 사람이 올테니까 가급적이면 편안한 소파가 있는 곳이면 좋겠는데.”
“개소리 지껄이지마라. 우리가 왜 그래야하지?”
“서로 편하면 좋잖아. 보시다시피 난 어디 도망갈 생각이 없어. 너희들이 부른 사람들이 올때까지 가만히 기다릴 작정이야. 헌데 그때까지 이렇게 서서 기다리게 만들생각이야?”
“...”
이경장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의 상관인 박경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젠장. 일단 따라와라.”
준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이경장의 뒤롤 천천히 따라갔다.
뒤에서 따라오던 검둥이가 입을 열었다.
“형님. 웬일로 이렇게 얌전하게 따라가십니까?”
“뭐 임마. 내가 여길 뒤집어 놓기라도 했어야 된다는 말이냐?”
“평소 성격이라면 그러셨을 것 같은데요.”
“여기 은설이가 살던 동네잖아. 혹시라도 지인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런 큰 뜻이... 제가 형님의 깊은 뜻을 미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새끼. 안 본사이에 아부가 많이 늘었구만.”
준이 키득거리며 웃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