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7 ----------------------------------------------
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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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게 대체 누군데요?”
“요 앞집에 동네 과일가게 청년인데. 완전 스토커야.”
서연경은 가볍게 진저리를 쳤다. 겉으로 봐서는 정말로 싫어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은설이의 생각은 다른 듯 했다.
“호오? 그렇게 싫은 데 왜 그냥 두셨을까요? 천하의 스승님이. 예전같으면 개구리를 만들어서 포르말린에 담가두어도 모자랐을텐데요.”
“얘는. 나도 이제 나이가 몇인데. 어린시절에 했던 실수를 계속 들춰야 하겠니.”
“그말은 정말로 그런 짓을 하신적이 있다는...?”
준이 식겁하며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래도 구애한다는 이유로 개구리로 만들다니. 그건 좀 너무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야밤에 칼을 들고 찾아온 녀석이니까 그정도는 해도 되지 않아?”
“아...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었겠네요. 헌데 연방에서도 그런 사람이 있긴 있군요.”
준은 가벼운 감탄사를 내뱉었다. 치안이 좋지 않은 무역연합에서는 그런 식으로 여자를 납치하거나 강제로 취하는 경우가 잦다. 하지만 연방, 그중에서도 대한민국은 치안이 좋기로 유명하다. 그런 곳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건 제법 의외였다.
“휴. 어쩌겠어. 그만큼 내가 매력적이라는 거지. 젊은 청년들의 마음에 불을 지를 정도로.”
“됐거든요. 여기저기 흘리고 다니니까 그런거 아니에요.”
“아니거든. 지가 좋다고 쫓아온 거거든.”
“그래서 어쩔건데요. 정말로 싫으면 저희랑 함께 가시는 건 어때요?”
“간다니 어딜?”
“란도넬 행성이요. 여기보다는 살기 좋을거에요.”
“얘는. 평생을 여기 살았는데 다 늙어서 어딜 간다고 그러니.”
서연경이 썩 내키지 않는 반응을 보였다.
“흠. 그러시다면 뭐. 별 상관없긴 한데. 그래도 한번쯤 생각해보세요. 거기에 가면 잘생긴 남자들이 엄청 많거든요.”
“뭐? 정말이야?”
준이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서은설이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니가 놀라면 어떻게 하냐.”
“아니. 금시초문이라. 설마 막스 아저씨를 이야기 하는 건 아니겠지?”
“그 아저씨는 그냥 아저씨지만... 직원들 전부 펠로우쉽 사용자잖아. 다들 미남미녀가 되어가고 있다고.”
“그렇군. 전혀 생각지 못하고 있던 사실이네.”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펠로우쉽 사용자가 되면 시간이 지날수록 체형이 변한다.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피부도 어린아이처럼 좋아진다. 어지간히 인물이 엉망이지 않으면 평범한 사람이라고 해도 준 연예인 급으로 외모가 나아지는 극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워낙 다른 사람에 대해서 관심이 없으니 몰랐겠지.”
“아니. 그보다는 다른 이유라고 생각하지만.”
에피알게나스를 자주 보다보니 어지간한 인물은 전부 오징어로 보이는게 문제였다. 솔직히 따지고 보면 서은설도 그녀에 비하면 상당히 외모가 떨어진다. 객관적으로는 충분히 아름답지만, 에피알게나스가 지나치게 인간 이상이라서 그런 것이다. 물론 에피알게나스의 치명적인 문제라면 역시 ‘향기없는 꽃’이라고 불릴 정도로 인간관계 서투르다는 점. 말수도 적고, 정말로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대꾸조차 하지 않기 때문에 델타내에서도 그녀는 그림속의 인물로 취급되고 있었다.
“흠... 그건 좀 땡기는데. 사진 같은 거 있어?”
“흠. 직원 연수 사진이 어디에 있을텐데...”
“난 집이나 한바퀴 돌아볼게. 혹시 모르니까.”
은설이가 델타폰을 뒤적거리는 동안 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연경의 저택은 대지만 200평이 넘는 제법 큰 집이었다. 제법 넓은 마당에는 갖가지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고, 개와 고양이를 비롯한 작은 동물들도 제법 있었다. 그냥 보기엔 마냥 귀엽지만 이 녀석들도 제법 갖가지 실험에 동원된 녀석들이다.
인간에 비견 될 정도로 지능이 높고, 작은 덩치에 비해 신체능력도 제법 뛰어나 평범한 도둑은 얘네들 선에서 정리할 수 있을 정도다.
준은 델타스토어에서 구입한 동물용 간식을 잔뜩 펼쳐놓고는 동물들이 모여들기를 기다렸다. 서연경의 성격상 따로 맛있는 음식이나 간식을 준비하지는 않기 때문에 준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는 녀석들도 제법 많았다. 그 때문에 사료를 잘 먹지 않는다고 서연경이 투덜대긴 했지만, 그녀도 딱히 말리지는 않았다.
찹찹.
온몸의 털이 새하얀 고양이 한마리가 가장 먼저 나타나 잘게 잘린 쇠고기패티를 먹기 시작했다.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기다리자 곧 십여마리의 동물들이 나타났다. 종류도 개에서 부터 토끼, 집돼지, 너구리까지 제법 다양했다.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그 능력은 의심할 바가 없었다.
“오늘 손님이 온다고 하니까 다들 조용히 잘 있어. 괜히 사람 놀래키지 말고.”
끄덕끄덕.
한꺼번에 고개를 주억거리는 걸 보니 동물이 아니라 애들을 보는 것 같다. 이런 녀석들을 키우면서도 전혀 정을 안주는 서연경을 보면 애초에 정이라는 게 없는 사람인가 싶기도 하다. 그런것 치곤 은설이에게는 각별한 것 같기도 하지만.
찌르르릉-
그때 벨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온다는 손님인가 싶어 정문을 쳐다보고 있자니, 곧 문이 열리면서 훤칠한 미남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제법 괜찮아 보이는데? 인물도 좋고, 제법 귀티가 나기도 하고. 정말 과일가게 청년이 맞는 건가?’
첫인상은 여느 재벌집 2세 같다는 느낌이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누구...”
“준 알스버그라고 합니다. 손님이에요.”
“아. 그러시군요. 전 이철희라고 합니다. 근처 S마트의 지점장을 맡고 있습니다.”
“S마트요?”
S마트는 이 도시내의 거의 모든 유통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대형마트였다. 중소도시라고는 해도 규모가 제법 커서 근처 도시에서도 차를 끌고 올 만큼 유명한 곳이었다.
그런 대형마트의 지점장인데 나이는 20대 정도로밖에 안보인다. 이런 경우는 거의 대부분 낙하산이라고 봐야겠지. 그렇다는 이야기는 본사에도 연줄이 있다는 건데.
이 아줌마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길래 이런 녀석이 꼬이는 거야?
끼익.
현관문이 열리고 서연경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왔어?”
“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결코 잊지 못할 날이 될 것 같습니다.”
“할말이 있어서 부른거니까. 김칫국마시지 말고 들어와.”
두 사람이 현관 안쪽으로 들어가고, 은설이가 밖으로 나왔다.
“왜 나왔어?”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서. 엄마의 연애사는 별로 알고 싶지 않거든.”
“엄마라고 부르긴 하는구나.”
“뭐... 직접 이야기 하긴 그렇지만.”
서은설의 얼굴이 살짝 붉게 달아올랐다. 자기가 말하고도 뭔가 민망한 모양이다. 이 모녀는 대체 어떻게 살았길래 그렇게 간단한 말 한마디 하는 것도 어색해 하는건지 모르겠다.
“그래도 부럽긴 하네.”
“하긴 넌 부모님이 둘 다 돌아가셨다고 했지.”
“생각해보면 그렇게 오래 된 일이 아닌데도, 수십년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애초에 그렇게 오래 살지도 않았으면서.”
“말이 그렇다는 이야기지.”
잠시후, 이철희가 완전히 풀이 죽은 얼굴을 하고 현관문을 빠져나왔다. 깊은 한숨을 쉬는 뒷모습을 보니 결과는 안봐도 뻔한 이야기였다.
안에 들어가보니 서연경이 소파에 반쯤 누워서는 티비를 보고 있었다. 어쩜 저렇게 태평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준이 입을 열었다.
“뭐 안물어봐도 뻔한 이야기긴 한데. 어떻게 됐어요?”
“아. 뭐. 하기로 했어.”
“...네?”
“귀를 먹은 건 아닐테고.”
“아니. 잠깐만 지금 그러니까 결혼을 하시기로 했다는 거에요?”
서은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서연경이 귀를 파면서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
“누가 결혼을 한대?”
“네...? 아까 말한거 그거 아니었어요?”
“그걸 진짜로 믿은거야? 우리딸 순진하네.”
“아니... 그럼 대체 뭐에요?”
“이번에 식물생장물약을 하나 만들었는데, 그걸 팔아달라고 귀찮게 굴더라고. 원래는 안팔생각이었는데, 생각해보니 델타스토어도 물건을 납품하는데 여기는 왜 안되나 싶어서.”
“그런 귀찮은 일 안하는거 아니었어요?”
“그래서 조건을 달았지.”
“뭔데요?”
“델타스토어에 올릴테니까 거기서 사라고.”
“아... 그건 뭔가... 그 사람이 원하던 건 아니었던 것 같네요.”
서은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델타스토어에 올리게 되면 다른 사람들도 쉽게 구입할 수 있다. 그렇게 된다는 건 즉, 독점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 처음에는 이 정보를 모르는 다른 기업들을 제치고 앞서나갈 수 있겠지만 결국에는 새어나가게 될 정보다.
“그나저나 S마트 지점장이 왜 식물 생장 물약을 원하는 거죠?”
“모기업이 MST캐미컬이거든.”
“헐. 거기 대한민국 최대의 농업기업 아닌가요.”
서은설이 입을 열었다.
“그런 건 잘 모르고. 어쨌든 거기 회장 아들이라고 하더라고. 지금은 경영수업중이라 작은 구멍가게 하나 맡아서 한다고 하는데. 하는 짓을 봐선 썩 잘하는 것 같진 않아. 그러니까 어떻게든 아버지 눈에 들려고 나를 찾아온거겠지.”
“돈도 제법 많이 들고 왔겠네요. 스승님 돈 많이 필요하지 않아요? 실험실 유지비도 상당할텐데.”
“그렇긴 한데 MST가 좋은 이야기가 별로 없더라고. 그래서 계속 거절했지. 그나마 델타스토어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말도 못꺼내 봤을거야. 네 남친 덕에 수고를 덜었지.”
서연경이 한시름 놓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준은 침대에 누워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찜찜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시미는 자신의 배를 깔고 잠들어 있었고, 은설이는 옆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서연경이 직접 쓴 마법서였다. 그녀가 직접 쓴 책을 읽는 것이 은설에게는 이곳에서의 주요일과였다.
“그 식물생장물약의 가치가 어느정도나 될까?”
준의 질문에 은설이 입을 열었다.
“글쎄. 회장아들이 이렇게 매달릴 정도면 제법 하지 않을까? 그사람 잔뜩 실망한 것 처럼 보였는데.”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그 정도로 절실한 문제라면 이렇게 간단히 넘어갈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드는데.”
“신경쓰지마. 그런 걸로 스승님을 협박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다들 어떻게 됐는 줄 알아?”
“어떻게 됐는데.”
“마당에 묻혀있어.”
“...정말이냐? 나 오늘도 마당에서 수확한 과일 먹었는데.”
“음... 최근에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예전에는 그랬던 것 같아. 여자 둘이 사는 집이니까 우습게 보고 침입한 인간들이 제법 많았거든.”
“험하네. 여기도.”
“사람 사는데는 어디든 다 똑같지. 그러니까 신경안써도 돼. 그런 문제는 너보다 스승님이 훨씬 더 나으니까.”
“뭐,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여전히 불안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어떤 사람들을 상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대기업과 관련된 문제다. 그들은 돈이 되는 문제라면 사람 몇쯤 그냥 묻어버리는 것 따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
아무리 서연경이 이런일에 익숙하다고 해도 과연 이런 일까지 해결할 수 있을까.
‘뭐... 문제가 되면 내가 나서면 되겠지.’
사서 걱정해봐야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먼저 나서서 MST캐미컬을 박살낼것이 아니라면 저쪽에서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나서 행동을 결정해도 늦진 않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