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젝트 델타-505화 (505/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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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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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치아프군. 너 그럼 다시 작아지는 것도 안되는 거냐?”

“네.”

“맘에 안드는데.”

“준은 내가 싫어요?”

“그럴 리가. 넌 소중한 가족이야.”

“그럼 나도 똑같이 대해줘요.”

시미가 준의 팔에 매달려 어린애처럼 졸랐다. 원래의 시미에 가까운 모습에 그는 조금씩 이성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일단 물이나 한잔 마시고 정신차려.”

“힝.”

시미는 무릎을 감싸고 앉아 입술을 쭉 내밀었다. 뭔가 대단한 결심을 하고 준의 침실에 파고 들었지만 결국 거부당하고 만 것이다. 혼란스러운 감정이 그녀의 내면에서 휘몰아치고 있었다. 정체성이 모호한 식물소녀인 시미는 자신이 느끼는 기분을 준도 동일하게 느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 그녀의 내면은 충분히 성숙하지 않았다.

아직은 타인의 기분보다는 자기 자신의 감정이 우선이었고, 준의 기분이나 감정은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 그녀의 내면에 있던 공격성은 요정의 축복과, 펠로우쉽의 영향으로 인해 사라진 듯 보였다. 하지만 정확히 말해 그것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의 감정으로 형태를 변환한 것 뿐이다.

현재는 준에 대한 비틀린 애정으로 발전하는 과정에 있었다. 그것이 그녀를 고속성장하게 만든 원인이었다.

준은 그녀가 천진난만한 요정으로 남길 원했지만, 그것 역시 시미를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얼렁뚱땅 넘어갈 수는 없어.’

시미가 본격적으로 어프로치를 하고 있는 이상, 자신도 태도를 모호하게 할 수는 없었다. 약속을 하든, 아니면 완전히 거부를 하던 어떤 식으로라든지 행동이 있어야 한다.

‘시미를 잃을 각오를 해야 하는 건가...?’

지금껏 우유부단한 태도로 인해 은설이 겪어야 했던 고초를 떠올렸다.

고심 끝에 결단을 내렸다.

그에게는 루나와 은설만으로도 충분하다. 시미에게는 미안하지만, 지금 당장 누군가를 또다시 받아들인 다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시미.”

“왜요.”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시미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자신을 거부한 준에게 엄청난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어른이 되면 준과 함께 할 수 있다. 그 생각을 줄곧 하고 있었다. 그 희망이 사라진 것이다.

시미는 가급적이면 그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평소 행동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다.

“내가 생각을 좀 해봤어. 앞으로 그 모습으로 계속 살아야 한다면, 더 이상 너를 어린애로 대우할 수는 없겠지.”

“말했잖아요. 나 준보다 나이 많다고.”

“생물학적 나이를 말하는 게 아니야. 그런 걸 일일이 따지고 들어가고 싶진 않아. 그냥 나에게 너는... 사랑하는 동생 같은 존재라는 거지.”

“불공평해요. 내가 제일 먼저 만났는데. 내가 제일 먼저인데.”

엄밀히 말하면 루나를 먼저 만났다. 하지만 그녀와 가까워 것은 시미를 만난 이후이니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런 문제가 아니야. 물건도 아니고, 먼저 만났다고 해서 누군가를 가질 권리가 있는 건 아니니까.”

“나는 그런 거 몰라요. 내가 아는 건, 난 이미 아이를 가질 준비가 되었다는 거에요. 그리고 준외에는 다른 사람을 생각할 수 없어요.”

“쿨럭.”

시미의 돌직구에 사례가 들린 준이 연신 기침을 했다. 인간의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생명체라는 건 상당히 직설적이구나 하고 새삼스럽게 느꼈다.

“그런 건 상대방의 동의가 있어야 성립 가능한거야.”

“어째서요? 준에게 손해가 될 건 없는데요?”

“손해는 아니지만...”

“그러니까 해요.”

“아니. 이야기가 왜 자꾸 그쪽으로 가는거야.”

준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말하면 널 여자로 생각하는 건 좀 무리야.”

“그럼 내가 다른 사람이랑 아이를 가지면 준은 어떨 거 같아요?”

“응...?”

자신도 모르게 표정이 굳었다. 실제로 이 녀석과 인간이 아이를 가지는 것이 가능한가를 떠나, 그런 상상을 한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이 녀석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한건가...?’

자신도 모르는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았다. 시미가 곁에 있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준은 그녀를 인형처럼, 혹은 애완동물처럼 곁에 두길 원했다. 지금까지는 시미가 그런 역할에 충실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말 잘듣는 인형이길 거부한 시미를 상대로 어떻게 해야할지.

준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대답 안 할 거에요?”

“아니... 그거야... 네 의사를 존중해야...”

준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 녀석을 잃는 것도 상상할 수 없거니와, 다른 사람의 아이를 가진다는 건 더더욱 그러했다.

시미가 고개를 들어 준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마치 준의 마음을 꿰뚫는 것 같았다.

“준은 솔직하지 못해요.”

“...미안하다.”

이유는 몰랐지만, 사과를 해야할 것 같았다. 어쩌면 그동안 시미를 지나치게 무시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당연히 그녀도 생각이 있는 존재라는 걸, 욕망이 있는 존재라는 걸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깟 씨뿌리는게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보통은 사방팔방으로 뿌리고 다니거든요. 얻어걸려라 하는 심정으로.”

“그거야 네가 식물이니까 그런거고.”

애초에 개념이 다르다. 존재의 본질이 식물인 시미와, 인간인 준은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시미가 조심스럽게 준을 향해 다가왔다. 은근한 그 몸짓에 준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야 했다.

성인이 된 시미는, 지금껏 볼 수 없었던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건 같은 인간에게서는 경험할 수 없는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스윽.

시미의 얼굴이 준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 머리가 복잡한 준은 어떻게 해야할지 판단을 내리기 힘들었다. 이대로 그녀를 밀쳐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자신의 이기심과, 그녀에 대한 애착. 그리고 은설에 대한 미안함 등이 뒤섞여 어떤 행동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시미의 손이 준의 목덜미를 스치고 천천히 그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녀의 손길이 맨살에 닿을 때마다 긴장으로 인해 준의 몸이 움찔거렸다.

“준은 가만히 있으면 돼요.”

“너... 대체 어떻게 이런 걸.”

“내가 본 게 얼마나 많은데요.”

“...훔쳐본거냐?”

“처음부터요.”

시미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지금껏 본 적 없는 들뜬 미소다. 그녀의 내면에 있는 활화산 같은 욕망이, 지금 이 순간 준을 향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시미의 입술이 준의 입술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그녀의 입술이 반쯤 열리는 순간.

“스톱. 거기까지.”

다시 이층으로 올라온 은설이 입을 열었다.

“우유부단하기 짝이 없다니까.”

“너라면 어쩌겠냐?”

“뭐, 곤란한 상황이긴 하지.”

은설이 고개를 돌려 시미를 바라보았다. 다시 작아진 시미는 물컵에 들어간 채로 볕이 잘든 창가에서 헤엄을 치고 있었다. 잔뜩 불만인 표정이다.

“거의 다 됐는데. 치사하게.”

“아직은 아니야. 꼬맹아.”

은설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시미를 데리고 온 것은 은설의 판단이었다. 그녀 역시 준에게 일정지분(?)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건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은 아니었다. 적어도 1년 정도는 자신이 준을 독점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거야? 이 녀석 다시 못 돌아가는 거 아니었어?”

준이 물컵에 담긴 시미를 보며 입을 열었다. 시미가 흥, 하며 고개를 돌렸다.

“거짓말이야. 스승님이 그러는데 지속시간 5분짜리라고 하더라고.”

“5분이라...”

그 시간이면 어차피 별건 못했을 거다. 시미는 제한된 시간안에 최대한의 어필을 한 셈이다. 준은 방금전의 상황을 떠올리고는 얼굴을 붉혔다. 정말 그 순간만큼은 시미를 어린애로 볼 수 가 없었다.

은설이 그런 준의 반응을 보고는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어쨌건 간에 아주 효과가 없는 건 아니었나보네.”

“무슨 소리야. 그런 거 아니라고.”

준이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변명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마지막엔 거의 시미에게 홀린 상태나 마찬가지였고, 그 모습을 정면으로 본 은설에게는 통하지 않는 변명이었다.

“됐고요. 내가 안 말렸으면 아주 끝까지 갈 기세던데.”

“으음... 그건...”

준은 한숨을 쉬었다. 여자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뭔가 주도적으로 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차라리 연방과 싸우라고 하는 편이 더 쉬울 것 같았다.

델타폰을 통해서 계속해서 시약상점이 업데이트 되었다. 그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보았고, 그 덕분에 대한민국에서 델타폰의 전파속도가 빠르게 늘어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큰 도움이 된 것은 ‘지력상승의 포션’이었다. 말그대로 먹으면 머리가 좋아지는 물약인다. 한 병 먹을 때마다 약 하룻동안 50퍼센트 이상의 암기력과 이해력이 증가되는 효과가 생긴다.

한 병 가격은 1EP로 십만원 정도나 하는 고가이지만, 학부모들 사이에서 빠르게 입소문이 퍼지면서 순식간에 백 개 이상을 팔아치웠다. 일부는 델타폰에 대한 것을 비밀로 한 채 포션을 비싼 값에 파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준은 딱히 그런 사람들을 제지 하지 않았다.

그렇게라도 해서 포션의 능력이 알려지게 되면 후에 델타폰의 홍보에도 도움이 될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아무것도 안하면 지겹지 않냐?”

서연경이 소파에 반쯤 드러누워있는 준을 향해 입을 열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제로 준이 아무것도 안하는 것은 아니다. 집안 청소는 물론 식사, 설거지까지 전부 준이 하고 있었다. 물론 잡일은 염동력을 이용했고 요리는 델타폰을 이용했지만 어쨌든 할 일은 하고 있으니 서연경도 불만은 없었다.

다만 한창 일할나이의 준이 집안에서 한발짝도 나가지 않는 것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지는 것 뿐이다.

“지겹긴요. 마음같아선 한 1년 정도는 이러고 있고 싶은데요.”

“음. 회사는? 사장이 이렇게 있으면 제대로 안돌아 갈텐데?”

“그건 문제 없습니다. 미래의 제가 열심히 일하고 있을테니까요. 과거의 나 정도는 좀 놀아도 됩니다.”

“그건 무슨 소리야?”

“하하. 설명하려면 복잡하고요. 그냥 문제 없다고만 알아두시면 됩니다.”

애초에 여행을 온 목적이 휴식을 위해서였기 때문에 준은 지금 상황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시미와 서은설과 함께 여행을 다니는 것도 좋지만, 기본적으로 준은 엉덩이가 무거운 편이다. 아무일이 없다면 집밖으로 나가는 걸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것이다.

그동안 수십, 수백광년을 넘나들면서 쌓인 피로도 때문이기도 했다. 지금처럼 여유로울 때 쉬어두지 않으면 바쁠 때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냐. 별일없으면 그럼 나 좀 도와줄래?”

“무슨일인데요?”

그녀는 한창 시약을 제조하는 일에 빠져있었다. 그동안은 만들어도 한두개 정도의 소량생산밖에 할 수 없었고, 결국 비싼 가격에 부자들에게 파는 물건들만을 제조할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제법 의욕도 떨어졌고 동기부여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일단 만들기만 하면 얼마든지 많은 사람들에게 팔 수 있었다. 자신이 만든 물건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서연경은 마치 처음 마법을 배울때처럼 의욕이 넘치고 있었다.

“막 개발중인 약이 하나 있거든. 그걸 만드려면 손이 좀 많이 필요해서.”

“굳이 제가 필요한 걸 보니, 꽤 복잡한 모양이네요.”

“맞아. 사실 여러사람이 필요한데, 은설이에게 물어보니까 염동력을 사용할 줄 안다며? 그러면 충분할 것 같아서.”

“뭐, 노느니 일하는 편이 낫긴 하죠. 그런데 무슨 약이에요?”

“경험치 물약.”

“네?”

“펠로우쉽 계약을 하면서 이것저것 알아봤거든. 결국 핵심은 레벨을 올리는 거고, 그를 위해선 경험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됐지. 헌데 경험치를 얻는 방법이 몬스터를 잡아서 결정체를 먹는 수밖에 없더라고.”

“그렇죠.”

“효율이 너무 나쁜 방식 같아서. 좀 손을 써봤지. 몇가지 처리만 해줘도 지금보다는 훨씬 더 흡수효율이 높아질거야.”

“얼마나요?”

“계산대로라면... 한 두배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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