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98 ----------------------------------------------
지구
*
*
*
중년사내의 이름은 릭 팔머. 연방정보부에서도 기밀만을 취급하는 13과의 베테랑요원이었다. 물론본인에게서 직접 정보를 얻는 것은 어려웠다. 하지만 던전 에는 4명이나 되는 인질이 있었고, 그들을 이용하면 얼마든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지독하기로 유명한 러시아 요원들의 입도 열었는데 연방출신 요원들의 입을 여는 건 훨씬 쉬운 일이다.
몇 번의 심문을 통해 얻은 정보와, 제임스와의 대화를 통해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이 자는 인질이나 협상카드로서 별 쓸모가 없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인질극같은 저질스런 작전을 펼친 순간 이들은 연방정부와의 연관성을 강력하게 부인할 수밖에 없고, 그건 연방정부도 마찬가지였다.
-일단은 저쪽에서 어떻게 나오는 지 지켜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대놓고 공격을 당했는데 참으라고? 이것들 해적보다 더 질이 나쁘다고.
연방에 대해서 나름대로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번 일로 전부 사라졌다. 최강대국에 발전된 민주주의 국가라고 해도 결국 국가적 이익 앞에서는 한없이 소인배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렇다고 연방정부에 쳐들어 갈 수는 없잖습니까.
-못 할 것도 없지.
-제발. 그건 참아주십시오. 제가 다른 건 전부 해결할 수 있는데 그것만은 불가능합니다.
제임스가 반쯤 우는 말투로 사정했다.
물론 준도 양심이 있으니 적당한 선에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두 명의 자신에게 시달리느라 업무가 더욱 가중되고 있을 것이 뻔 하기 때문이다.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 지을게.
-휴. 한 분은 그래도 놀러 가신다고 해서 마음이 편했는데 결국 이렇게 되는 군요.
-언제는 내가 사고 안친 적 있냐. 그러니까 진즉에 인원충원을 좀 하지.
-지금도 계속 뽑고 있습니다. 다만 그 인재들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업무에 익숙해 지는 것은 아니다보니. 거기다가 일이 늘어나는 속도가 제 예상을 초과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하긴 내가 사고를 좀 많이 치긴 했지.
업계 최고 대우로 직원들을 뽑고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핵심파트의 인원들은 내부 직원들 중에서 신뢰도가 높은 인물들 위주로 가려서 선정하기 때문에 충원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다.
생각 같아서는 연방정부를 한번 들쑤시고 싶었지만, 무턱대고 들이댔다가는 정말로 델타스피릿 전체가 공중분해 될 위험도 있었다.
때문에 일단은 어떻게 나오는 지 보고 그때그때 대처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나저나 두 사람 뭐하고 있었던거야?”
“그냥 여자들간의 대화.”
“흠. 뭐. 알았다.”
이야기하기 싫다는 뜻으로 알아들었다. 어차피 들어봐야 이해하지도 못할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준이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지구에 온 첫날부터 트러블이 생겨서 어떻게 하냐. 괜히 내가 미안해지네.”
“신경쓰지 마. 나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건데. 이 사람들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손님대접이 영 꽝이야. 호텔에서부터 그러더니 이제는 국가요원이라는 사람들이 협박이나 하고...”
“뭐, 그만큼 오만하다는 거지. 그나저나 방금은 왜 인질인 척을 한 거야?”
“준이 어떻게 나오나 보고 싶어서.”
“쯧. 그 정도도 눈치 못챌거라고 생각한거야?”
“알거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일종의 이벤트랄까. 인질을 구출해 줬다면 두 여자의 뜨거운 애정공세를 받을 수 있었을텐데.”
“두 여자라...”
준은 가만히 시미를 쳐다보았다.
녹색의 머리칼에 어울리는 하얀색 블라우스와 린넨스커트가 제법 잘 어울렸다. 최근 들어 옷을 잘 입고 다니는 걸로 봐선 누가 패션에 조언을 해 주는 모양이다.
아마도 엘라겠지.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무리지.”
“...그럴수가. 저, 저도 여잔데요?”
“넌 아직 너무 어려.”
“준보다 나이가 많다고욧.”
“평생을 땅속에서 살았잖냐. 그런 건 나이로 안쳐주는 거야.”
“그, 그럼?”
“앞으로 20년은 더 있다가 와라.”
“...준 미워.”
다다다.
쾅.
시미가 방을 뛰쳐나갔다.
준과 서은설은 시미를 찾기 위해 호텔을 나섰다.
“삼십분 정도 내버려 뒀으니 이제 화가 풀렸겠지.”
준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말이 너무 심했어.”
“날 믿어. 그 녀석 무지 단순하다고. 지금 자기가 왜 방을 뛰쳐나갔는지도 잊어버렸을걸?”
“그러면 좋겠지만... 헌데 지금 어디에 있어?”
준은 펠로우쉽 계약자의 위치를 알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시미가 어디에 숨더라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남산타워 쪽인데?”
제법 오래된 건축물인 남산타워는 재보수를 통해 제법 고풍스러운 멋을 풍기고 있었다. 지금은 사적으로 분류되어 함부로 철거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국보로 지정된 흔치 않은 건물이기도 하다.
“왜 거기에 있지?”
“글쎄. 높은 곳에 올라가고 싶었나보지.”
허공을 날아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남산 타워에서 약간 떨어진 숲속이었다. 달빛을 충분히 받을 수 있을 정도로 개방된 지형에 시미는 머리만 내놓고 땅속에 들어가 있었다.
“...누가 보면 귀신인 줄 알겠다.”
“저리가요.”
“대체 뭐하는 거냐 거기서?”
“성장중이거든요. 시미는 식물이니까. 땅속에 있으면 금방 클거에요. 그동안 준을 따라다니느라 발육이 더뎠으니까.”
“그게 며칠 만에 되겠냐?”
“몰라요. 20년 쯤 있으면 되겠죠.”
아무래도 단단히 화가난 모양이었다. 준은 가만히 한숨을 쉬고는 입을 열었다.
“그래. 알았다.”
“뭐가 알았다는 거에요?”
“10년으로 줄여줄게.”
쫑긋.
시미의 머리칼 몇가닥이 하늘로 치솟았다. 아무래도 구미가 당기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미간을 잔뜩 찡그리고는 고민에 빠졌다.
“10년이라... 흐음...”
“어차피 10년은 금방 간다고. 생각해봐. 너 40살이 넘는다고 했지? 그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기억해?”
“그냥 먹고 자고 놀고 했더니 지나갔어요.”
“거봐. 10년도 금방이라니까.”
“흠...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이쯤 되면 거의 다 넘어왔다고 생각한 준이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럼 5년으로 줄여줄게.”
“정말요?”
“그래. 5년 뒤에.”
‘그때가서 오늘일을 기억한다면 말이지.’
준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미가 그걸 기억할 리가 없다고 확신했다.
부스럭부스럭.
그녀는 땅을 파헤치고 빠져나오더니 준에게 달려왔다.
준은 그런 시미의 뒷덜미를 집어 들고는 등과 엉덩이에 묻은 흙먼지를 털었다.
팡!
“아흑. 준 살살.”
“이상한 소리 내지마! 이 자식아!”
어쨌든 정신없는 하루가 지나고 룸서비스를 불러 흐트러진 방안을 정리했다. 다음날 아침 일행은 서은설이 살았던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그녀의 말대로 많은 것이 변해 지금은 고아원 건물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상태였다.
그래도 과거의 골목들은 제법 남아 있었다. 그녀가 다녔던 학교도 그대로였다.
“저기가 원래 고아원이 있던 곳이야.”
“아. 최신형 모듈아파트로 전부 교체됐구나.”
“그 뒤로는 뭐... 어쩌다보니 스승님에게 맡겨졌지.”
“그러고보니 그 스승님이라는 사람은 누구야?”
“인근 고등학교 교사였는데, 마법에 개인적으로 흥미가 있으셔서 좀 익히셨나봐. 그걸 나에게 가르쳐 줬지. 덕분에 민성오빠를 따라서 사냥도 할 수 있었고. 내가 민성오빠랑 가고 싶다고 했을 때 엄청 서운해 하셨어.”
“지금은 어디 계신데?”
“아직 교사로 계신다고 하더라고. 그렇지 않아도 찾아뵈려고.”
“오늘?”
“아니. 내일 가자. 오늘은 데이트.”
“나도.”
시미가 머리를 내밀었다.
가볍게 식사를 하고, 최신 홀로그램 기술을 적용한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았다. 물론 구현화 기술을 통해 보는 영화에 비해 기술력의 수준이 너무 낮아 큰 감흥은 없었다.
영화관을 나오며 준이 입을 열었다.
“구현화로 영화관을 만들면 엄청 돈을 벌 수 있겠는데.”
“할 수 있어?”
“음... 될 것 같긴 한데. 기본적으로는 프로그래밍 관련 기술이라 실사영화는 힘들겠지만.”
델타스피릿 산하의 엔터테인먼트 기업은 아직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다. 기본적으로는 기업홍보와 격투대회의 방송을 통한 수입이 전부였다.
이번 기회에 영화제작에 뛰어들어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델타폰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제법 비싼 구현화 비용 때문에 자주 사용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걸 여러사람이 같은 영상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영화관을 만들 수 있다면 제법 저렴한 비용으로 구현화 기술을 통한 영상을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좋아. 돌아가면 이것부터 해봐야지.”
“그럼 첫 영상은 내가 주인공으로 하면 안 돼?”
“뭐, 주인공 모델을 너로 하면 되겠지. 너무 날로 먹는 감은 없지 않아 있지만.”
실사가 아니라 컴퓨터 그래픽으로 제작하는 영화에도 실제인물을 사용하는 것은 최근에는 당연한 일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어쨌거나 익숙한 얼굴이 나오게 되면 그게 실사든 그래픽이든 사람들은 좋아하기 마련이니까.
배우들 입장에서는 실제로 연기를 할 필요도 없이 초상권만 빌려주면 되는 일이니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연기력이 떨어지는 유명스타의 경우는 오히려 실사영화보다 이런 CG로 제작된 영화를 선호하기도 했다.
서은설의 경우는 평소업무가 있으니 이런식으로 인지도를 높여서 경험치를 끌어모으는 방법도 제법 좋을 것 같았다.
영화를 보고 서울 시내를 택시를 타고 돌아다녔다. 마음 같아선 그냥 셔틀을 이용하거나, 날아다니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디까지나 관광을 온 것이니 굳이 능력을 사용해서 돌아다니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하루코스로 서울 관광을 마친 일행은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식사를 마치고 후식을 즐기고 있는데, 멀리서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곧바로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니 역시 연방의 인물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야...?”
“그 사람들이 실종되었으니까 상황파악을 좀 하고 싶은 거겠지.”
뚜벅. 뚜벅.
곧 식당 전체를 검은양복들이 가득 채웠다. 저녁을 즐기던 사람들은 모두 자리를 떴고, 남은 일행은 준 일행 뿐이었다.
쨍.
준은 느긋하게 서은설과 시미와 잔을 마주쳤다. 와인은 포도를 발효한 것이니 먹을 수 있다며 우겨 시미도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약간씩 얼굴이 붉어지고 있는 걸 봐선 금방 취하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