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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선 아브락사스는 딥뷰잉 사의 대형여객선이다. 어떻게 구조를 짜냐에 따라서 전장이 같아도 객실의 수를 조정할 수 있다. 현존하는 가장 큰 여객선은 연방을 순회하는 크루즈 여행선인 ‘타이탄’이다. 전장이 250미터에 달하고 객실은 천 개에 이르는데다가 장기여행을 위한 각종 편의시설과 저장고들이 충실하게 마련되어 있다.
아브락사스는 크루즈가 아니라 일반 여객선이라 그만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급여객선에 속하는 편이었다. 란도넬을 기항하는 크루즈가 없기 때문에 선택할 수 있는 여객선 중에서는 최상위급의 기종이라고 할 수 있었다.
“흠... 여기도 제법 많네.”
주변을 둘러보니 열명 중에 한 명은 델타폰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 델타폰의 보급대수는 약 삼백만대가 넘어가고 있었다. 대부분 준이 지배하고 있는 행성의 사람들이 주 소비자였지만, 조금씩 연합과 연방으로도 퍼져나가는 추세였다.
그래도 아직 보급률로 따지면 0.01퍼센트도 되지 않는 수준이다. 갤럭시의 20퍼센트와 파인애플의 15퍼센트를 생각하며 한 톨도 되지 않는 수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준의 경험치는 무지막지한 속도로 쌓이고 있었다. 수익이 기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준 하나에게 집중되는 구조이다보니 그 액수는 점점 커져서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으로 쌓이고 있었다.
‘너무 많이 갖다 쓰긴 했지.’
현재 준의 경험치는 5천만. 원래라면 수억이 넘게 쌓였어야 할 경험치지만 지금까지 가져다 쓴 경험치가 너무 많았다. 함선을 제작하고 무기를 만들고 공간이동에 테라포밍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스파일리 행성에 있는 자신은 거의 1억이 넘게 쌓여있는 상태였다. 하루에 백만 이상의 경험치가 델타폰을 통해서 들어오고, 그 만큼의 경험치가 또 펠로우쉽의 십일조를 통해서 들어온다. 거기다가 환급을 통해서 들어오는 결정체 까지 더하면 한달에 준이 벌어들이는 수익은 거의 1억에 달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정도면 이제 넘치는 경험치를 어디다가 써야할지도 감당이 안되는 수준이다.
‘결국 레벨업에 써야지 뭐.’
경험치는 돈으로 환산이 안된다. 가진 경험치를 남에게 줄 수도 없다. 유일한 방법은 던전 내에 몬스터를 생성해서 그걸 사냥하는 방식으로 일정분량의 손실을 감안하고 경험치를 나누어 주는 것이다.
다만 당장 방대한 전력이 필요없기에 굳이 하고 있지 않은 것 뿐이지, 마음만 먹는다면 약간의 노력을 투자해서 15레벨 이상의 헌터들을 양산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헌터양성프로그램을 돌리는 것만으로도 바쁜 상황이다. 거기에도 일일이 준이 개입해 줘야 하기 때문에 다른 곳에 눈을 돌릴 틈이 없었다. 일단은 바닥부터 다지는 것이 우선이라 판단한 자신이 내린 결정이었다.
‘아직은 강력한 외도의 숫자가 많지 않으니 일단 수를 불리는 게 우선이지.’
이레귤러라 칭할정도로 강력한 외도는 자신이 직접 나서서 처리하면 된다. 지금까지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한동안은 그런 식으로 처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스파일리 행성에서 나타난 외도 같은 놈들이 다수가 나타나는 것만 아니라면 아직은 괜찮았다. 게다가 그놈들은 순수한 외도라기 보다는 로오나인의 지식을 흡수한 녀석들이기 때문에 외도와는 약간 다른 쪽이기도 했다.
“아직까지는 무리어미 정도인가...”
다른 것과 융합하지 않은 순수한 무리어미는 갤럭시 인더스트리 선에서 정리할 수 있다. 물론 그 기업들이 연방에서도 몇없는 탑티어 그룹이긴 하지만 연방 전체의 무력에 비하면 한없이 약한 수준이었다.
투명창이 있는 카페테라스에 앉아 느긋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있는 준을 향해 다가오는 인물이 있었다.
“저기...”
금발에 짙은 화장을 한 여성이었다. 붉은 색의 귀걸이가 유독 눈에 띄었다. 수수한 화장을 즐겨하는 루나와는 많이 다른 느낌이다.
“무슨 일입니까?”
“혹시... 준 알스버그님 아니세요?”
“맞습니다만...”
“꺅! 대박! 진짜에요? 정말 이 사람이 맞아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들고 있던 델타폰, 이제는 델타패널이 된 물건을 펼쳐서 내게 보였다. 거기에는 준의 사진과 함께 준 알스버그라는 이름이 쓰여있었다.
이제는 비밀이랄 것도 없어 공개한 얼굴이다. 하지만 이런식으로 귀찮은 일을 겪에 될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연예인도 아니고 한 기업의 사장일 뿐인데 보통 사람들은 대체로 그런 일에 별로 관심이 없기 때문이었다.
“네. 그런데 무슨 볼일이라도?”
“싸인좀 해주세요.”
“네?”
이런식으로 접근한 사람은 처음이라 준도 약간 당황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알아보면 일단 겁부터 내기 때문이었다.
얼떨결에 그녀가 건넨 펜을 받아든 준은 손을 내밀었다.
“종이는요?”
“종이 말고 여기에 해주세요.”
휙.
그녀가 갑자기 옷을 젖혔다. 갑자기 드러난 가슴골에 준은 헉, 하는 신음을 흘렸다.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지?
“여기에 싸인해 주세요.”
“아... 거기에요.”
준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브래지어에 대충 사인을 마쳤다. 한숨을 쉬고 돌아서려는데 그녀가 큰 소리로 외쳤다.
“얘들아! 진짜야! 여기와바!”
“정말야? 대박! 나도 사인받을래!”
“나도! 나도!”
갑자기 수십명의 여성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다, 단체 여행객이었나요?”
“에버리치 4대학 의류학과 졸업여행중이에요.”
“그, 그렇군요...”
준은 한숨을 쉬었다. 한두명이라면 겉으로는 싫은 척 하면서 사인해 줄 수 있겠지만, 수십명이나 되면 그건 정말로 고역이다. 진짜다.
“감사합니다!”
“후...”
어떻게든 사인을 마친 준이 탈진한 채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았다. 여자들 사이에 끼어 있으면 이상하게 기력이 빠지는 느낌이다. 외도를 잡을때보다 더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신이 나셨구만.”
“헉?”
귀에 서은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침부터 어딜 갔나 했더니. 여대생 사이에 둘러싸여가지고는...”
“그, 그게... 밥먹었냐?”
“유언은 그게 다야?”
서은설이 준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자, 잠깐.”
딱!
“윽.”
비명을 지른건 서은설 쪽이었다. 25레벨이 넘는 준의 몸은 어지간한 공격으로는 흠도 나지 않는다. 때려봐야 아픈 건 상대방인 것이다.
“그러게 내가 잠깐 멈추라고 했잖아.”
“아오. 약올라 죽겠네. 진짜 화를 내봐야 소용도 없고.”
“아냐. 진짜 별로 안좋았어. 다 너보다 못생겼더라고.”
“입에 발린말이라면 됐어.”
“진짠데.”
실제로 펠로우쉽 계약이후 그녀의 외모는 점점 나아지고 있었다. 어린시절의 고생 때문에 거칠어졌던 피부가 뽀얗게 재생되었고 신체가 최적화 되며 군살없이 완벽한 몸매를 자랑하고 있었다. 동양계 치고도 몸매가 좋은 편이라 지금 이 카페테리아에 있는 누구보다도 아름답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됐고. 시미는?”
서은설이 입을 열었다.
“너랑 같이 온거 아니었어?”
“아니. 없던데? 너랑 같이 나간 줄 알았는데?”
“얘는 또 어딜 간거야?”
“찾아보지 뭐.”
준은 델타맵을 띄워 시미의 위치를 확인했다. 3차원 매핑이 가능한 델타맵에서 시미를 추적하자 곧바로 그녀의 위치가 전송되었다.
“엔진실 근처에 있는데?”
“왜 거기에 있지...?”
“글쎄... 이 함선은 아직 원자력 엔진이라 가까이 가지 않는게 좋을 텐데.”
준과 서은설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자의적으로 그곳에 갔을리가 없다. 혹시 나쁜 사람에게 속아서 끌려갔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험해... 납치범이 죽을 수도 있어.”
서은설이 입술을 깨물면서 입을 열었다. 준도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공격을 당하면 사람뿐만이 아니야. 그녀석의 음파는 물리력을 동반한다고. 엔진룸에 이상이 생길 수도 있어. 그럼 정말로 위험해.”
다층의 안전장치가 있긴 하지만, 오로지 음파에 특화된 그 능력은 근거리에서 맞으면 전차도 박살낼 수 있을 정도의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만에 하나라고 해도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이 함선 전체가 우주공간을 떠도는 미아가 될 수 있었다. 그런 함선은 해적들의 먹이가 되기에 딱 좋다.
물론 그럴 경우 당하는 쪽은 오히려 해적이 되겠지만, 어쨌든 기분좋게 가는 여행에서 트러블이 생기는 것은 준이나 서은설도 원하지 않았다.
“여기가 어디지?”
시미는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준을 찾으러 나왔다가 그만 길을 잃어 버린 것이다. 여객선은 넓고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어 충분히 지도를 숙지 하지 못한다면 순식간에 길을 잃어버릴 수 있었다. 그를 위한 미아보호센터가 있긴 하지만, 누군가 그녀를 그곳으로 데려가지 않는 이상 스스로 찾을 수는 없었다.
한참을 헤매고 있는 와중에 누군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거기. 길을 잃은거야?”
“아? 네.”
고개를 들어보니 30대 초반의 사내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스킨헤드에 입술에 피어싱을 한 사내였다. 팔뚝에는 해골에 꽂힌 칼자루 무늬의 문신이 있었는데, 인근 루테라 행성에서 기승하고 있는 '아포칼립스'라는 테러집단의 상징이기도 했다.
하지만 시미는 꽃무늬의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그 남자가 마음에 들었다.
“꽃을 입었네요. 예뻐요.”
“아... 그래? 어쨌든 내가 길을 찾아줄테니까 따라올래?”
“네. 준을 찾아야 해요.”
“준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너 같은 아이들이 갈만한 곳이 있어.”
“네.”
시미는 아무런 의심없이 사내를 따라갔다. 엘라가 보면 한숨을 지을만한 일이었다. 자경대 역할을 수행하며 수없이 질나쁜 인간들에 대한 교육을 했지만 그 성과가 미미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