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86 ----------------------------------------------
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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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가지가지 하는구나.”
“교, 교화시키려는 목적이었습니다. 형님.”
“교화는 잘 됐고?”
“적어도 인근에서 학교폭력은 많이 사라졌다고...”
“그게 말이 되냐?”
준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남을 괴롭히지 못해서 안달이 난 녀석들은 어디에나 있다. 그런 놈들을 모아서 싸움을 붙인다고 다른 곳에가서 사고를 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어디에 있는가.
“학교에서 지원도 해주고 있어. 정식 부로 인정도 받았고.”
펄이 기지개를 펴며 나타났다. 구석방에서 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애초에 저 녀석 입장에서보면 불량학생이라고 해도 애들 재롱에 불과한 일이다. 대놓고 사람 팔다리를 잘라대는 녀석이니 기껏해야 주먹질이나 하는 건 장난 처럼 밖에 보이지 않았겠지.
“그래서 잘했다는 거냐?”
“저. 표창도 받았어요.”
엘라가 어디론가 뛰어가더니 커다란 상패하나를 가지고 왔다. 보니 학교에서 준 것도 아니고 프라이어 시티에서 준 거다. 학교에서야 모를 수 있지만 시에서 보면 엘라 알스버그가 준의 딸이라는 걸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적당히 눈치를 보다고 상을 줬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엄마도 아냐?”
“응.”
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루나가 알고 있다면 큰 사고를 친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언니가 인정했다고? 그럴리가 없는데.”
“저, 정말인데.”
“그건 내가 나중에 물어볼테니까 각오하고 있어. 그나저나 이게 다 뭐야...”
학생들이 바글바글할때는 몰랐는데 생각보다 어수선하거나 탈선의 흔적은 없었다. 내부는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담배를 핀 흔적도 없었다. 아마도 그런 건 검둥이 선에서 철저하게 관리 했을 것이다.
“어쨌든 당장 그만둬.”
서은설이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엘라는 묵묵 부답이었다.
“대답안하니?”
“싫어요.”
“뭐라고? 너 진짜 혼나봐야 정신차리겠구나.”
“칭찬받았단 말이에요. 잘했다고. 작은엄마는 알지도 못하면서.”
궁시렁 대며 반항하는 엘라를 보며 서은설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지간해서 그녀의 말을 어기는 적이 없었던 그녀였기에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만해. 자세한 건 루나에게 물어보면 되잖아.”
“제가 물어볼게요.”
서은설은 그렇게 말하고는 루나에게 통신을 넣었다. 한참동안 가만히 있던 서은설이 깊은 한숨을 쉬더니 입을 열었다.
“너 때문에 프라이어 시티 전체 학교폭력사건이 절반으로 줄었다는게 정말이야...?”
“네.”
“그리고 여기서 훈련받은 학생들이 델타스피릿 헌터지원프로그램의 장학생으로 뽑혀갔다고?”
“그건 제가 좀 손을 썼습니다. 하도 미래가 안보이는 녀석들이라.”
검둥이가 입을 열었다. 이곳에 있던 학생들은 단지 베스커빌 중학교에 있던 학생들 만은 아니었다. 인근 중고등학교에서 손을 놓고 있던 불량서클의 학생들 포함 상당수 아이들이 이곳을 거쳐갔다.
“그건 잘했네.”
“그래도...”
서은설이 뭔가 불만스럽다는 듯 입을 열었지만 준이 그녀를 가로막았다.
“큰 사고친거도 아니고, 문제아들 교화시킨데다가 일자리 까지 알아봐줬으니 잘못한 일은 아니잖아.”
“하지만 아직 엘라는 어리잖아.”
“그렇긴 한데 보통 아이도 아니잖아. 옆에 검둥이도 있으니까. 알아서 잘 할거라고 믿어.”
“...알았어.”
서은설은 엘라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더니 말을 이었다.
“잘했다고 칭찬은 못해주겠어. 하지만 지금처럼 잘 커준다면 더이상 뭐라고 하지는 않을게.”
“응. 작은엄마.”
화를 내는 줄 알고 잔뜩 겁을 먹었던 엘라는 서은설의 말에 미소를 되찾으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에게 있어서 서은설은 루나보다도 더 정서적으로 가까운 사람이다. 어릴때부터 일때문에 바쁜 루나를 대신해 항상 곁에 있어준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루나보다도 더 그녀에게 인정받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도 다들 잘 지내고는 있나보네.”
“그런데 무슨일로 이렇게 일찍 오신겁니까? 한달 주기로 오시던 분이.”
검둥이의 말에 준이 입을 열었다.
“아. 자세한 상황을 이야기 하자면 길고. 지구쪽으로 여행이나 한번 다녀오려고.”
“지구요? 그렇게 한가하게 놀러나 다녀도 되는 겁니까? 당장 스파일리 행성일이 아직 안끝났을 텐데요.”
“아. 거긴 괜찮아. 내 대신 일할 사람이 있거든.”
“제임스님은 아직 란도넬 행성에 계신걸로 알고 있는데요.”
“말고. 있어 그런 사람.”
“설마 저 말고 다른 후계자를...”
“네가 무슨 후계자냐. 임마.”
“서운합니다. 형님을 위해 뼈와 살을 바쳤는데.”
“이상한 소리하지마!”
“놀러갈거면 시미도 따라갈래.”
“시미는 나중에 같이가자. 엘라가 심심하잖아.”
“나 안심심한데?”
“같이 가지 뭐.”
서은설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그건 좀...”
“시미에게는 빚이 좀 있거든.”
“그래? 뭔데?”
“있어 그런거.”
서은설은 시미의 속마음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녀가 준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고, 또 그것이 단지 호기심이나 동경이 아니라, 여자로서 좋아한다는 걸 잘알고 있었다. 일전에 충동질을 했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고, 그 이후로 시미가 시무룩해 하는 걸 몇번이나 봐왔다.
‘밀어줄거면 끝까지 밀어줘야겠지.’
이번 기회가 아니면 준을 독점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 천진난만해 보이는 시미가 속으로 어떤 감정을 삭이고 있을지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두 명 정도면 뭐... 시미랑 노는 것도 재미있고.’
어차피 독점 같은 건 바란 적 없었으니 이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왕 란도넬에 온김에 루나와 제임스까지 만나고 나니 하루가 지났다. 루나는 정말 엄청나게 놀란 표정으로 디스플레이에 떠있는 준과, 그녀의 눈앞에 있는 준을 번갈아 보았다. 며칠 더 머물까 하다가 루나가 억지로 떠미는 바람에 지구 행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
“자, 스페어는 가서 재미있게 놀다오세요.”
“스페어라니. 사람을 짝퉁취급하고 있어.”
“그럼 2번으로 할게요. 잘 놀다와요. 2번 남편.”
“작별키스는 안해주는거야?”
“안돼요. 우리남편에게 걸리면 큰일나요.”
“끙.”
옆에서 서은설이 큭큭 거리며 웃었다.
란도넬 행성에서 지구까지는 대략 한달 정도 걸리는 거리다. 거리로 따지면 약 일백광년. 고속정을 타고 가면 보름이면 되는 짧은 거리지만, 인류의 절반이상은 반경 일백광년 안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와아.”
객실 창밖으로 무수히 많은 별들이 반짝였다. 시미가 신기하다는 듯 밖을 쳐다보았다. 사실 준이 보기에는 늘 똑같은 지루한 풍경일 뿐이었다.
“정말 지구로 가는 거네.”
“몇 살까지 거기 살았던거야?”
“거의 10살? 난 그래도 나이가 제법 있는 편이었어. 뿔뿔이 흩어지고 나서 운좋게 스승님 밑에 들어가서 마법을 배웠던 거고.”
“스승님은 지금 지구에 계신거야?”
“응. 그러고보니 연락 못드린지도 꽤 됐네.”
“전화라도 하지.”
“산속에서 일체의 연락을 끊고 사시거든. 그래서 민성오빠가 날 찾는데 무지하게 오래걸렸대.”
“100명이나 되는 동생들을 어떻게 다 챙겼는지 지금 생각해도 대단하네.”
“우리오빠는 마음먹은 일은 꼭 하고 마는 성격이거든.”
“뭐, 그 녀석이 대단한건 나도 잘 알지.”
장민성을 처음만났을 때만 해도 그녀석의 실력은 최하급 헌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거의 상급헌터을 목전에 둔 상태였다. 물론 펠로우쉽 시스템의 도움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레벨업보다는 스스로 실력을 갈고닦아서 거기까지 올라간 것이다. 실제로 현재 장민성의 레벨은 아직도 5레벨에서 머무르고 있는 상태였다.
펠로우쉽의 체력회복과 부상방지시스템을 극한으로 이용한 자학적인 수련의 결과였다.
“오빠가 요즘 목표로 삼은게 뭔지 알아?”
“뭔데?”
“너 이기는거.”
“이런... 그건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꿈일텐데.”
“꼭 한번이라도 좋으니 바닥에 쓰러뜨린 다음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던데. 뭔진 나도 모르지만.”
“안타깝게 됐군. 앞으로도 들을일이 없을거야.”
준은 웃음을 흘렸다.
준과 서은설, 시미가 탄 여객선은 객실이 약 오백개에 달하는 대형 여객선이었다. 연방소속 함선이었고 내부에는 한달 넘게 생활하는 사람들이 지루하지 않도록 각종 편의시설이 완비되어 있었다.
출발한지 보름이 지났다. 별다른 일 없이 시간을 보내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준이었지만, 모든 일을 또 다른 자신에게 맡겨두고 휴식을 취하는 것은 제법 달콤한 일이었다.
창밖은 광속이상의 속도로 날아가면서 보여지는 시공간 왜곡과 빛의 산란때문에 휘황찬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서은설과 시미가 잠들어 있는 것을 깨우지 않으려 조심스럽게 객실에서 나섰다. 산책이나 좀 할 생각이었다.
쿵.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자신의 등을 툭 치고 중년 사내가 있었다. 구부정한 자세로 궁시렁 거리는 뒷모습이 어쩐지 낯이 익었다.
“잠깐 거기.”
“뭐야.”
중년사내가 고개를 홱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중년사내의 눈동자가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너, 넌...?”
“와.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준은 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중년사내, 브랜든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면서 그 손을 맞잡았다.
“아. 뭐... 잘 지냈지. 너는?”
“굳이 말안해도 알만큼 잘 지내고 있었지. 뭐. 이 여객선에 탔다는 건 뭐야? 너도 란도넬에서 온거야?”
“아니. 난 중간에 탔지. 저기 로무스 행성.”
“거기는 왜?”
“왜긴. 일자리 때문이지. 최근 일자리가 많다고 해서 갔다가 물먹고 돌아오는 길이야.”
“흐음. 그래?”
준은 그의 기색을 살폈다. 꽤 오랫동안 고생을 한 듯 얼굴은 푸석해져 있었고, 손도 굳은살이 잔뜩 박혀 있었다. 편한 일만 골라서 하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아무래도 새크리파이스에서 짤리고 범죄자 신분으로 쫓기다 보니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는 모양이었다.
“일행없으면 오랜만인데 식사나 같이 할까?”
사실 이제와서 브랜든에게 남은 악감정은 없었다. 죽을 뻔 한 경험도 있었고, 고생도 엄청나게 한 듯 하니 굳이 과거의 구원을 꺼낼 필요는 없었다.
“일행이 있어서. 그만 가볼게.”
브랜든은 그렇게 말하고는 급하게 자리를 떴다. 준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 내가 불편할 만도 하지.”
그는 죽을 위기를 겪었다. 사실 그 이유의 대부분은 준 자신 때문이었다. 그를 두려워 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했다.
“그렇다고 저렇게 까지 불안해 할 건 없을텐데.”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더이상 파고들지는 않았다. 어차피 이제 두 사람은 서로 관련이 없는 사람이다. 굳이 잘해줄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증오할 필요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