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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일리 행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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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준은 열려있는 웜홀을 왕복하며 전혀 달라지지 않는 주변 풍경을 확인했다.
“웜홀이 작동하지 않는 건가?”
펠로우쉽과의 단절. 공간이동 웜홀의 이상현상. 준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에 대해서 좀처럼 판단을 내리기 힘들었다.
“일단 돌아가는 건 어때?”
카렌이 지구라트를 가리켰다. 준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지구라트를 통해서 이곳까지 왔으니 안으로 들어가면 다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심장이 있는 방 까지 내려간 일행은 다시 지구라트를 빠져나왔다. 하지만 여전히 주변은 짙은 수림으로 가득했다.
“이거 더이상 가벼운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카렌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준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단순히 특정 던전에 들어왔다던가 하는 것이 아니다. 준의 능력반경은 대략 1만 광년. 어쩌면 놈의 능력에 의해서 그 밖으로 튕겨나간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은 맵을 열어 로오나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의 위치는 준의 감시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우주선을 타고 달아나버리면 곤란하니 최우선 과제는 이쪽에서도 우주선을 만드는 것이다.
준은 일단 구 막사를 꺼내었다. 카렌의 팀원들이 안에 들어가서 쉬는 동안 준은 우주선을 만들 생각이었다. 문제는 재료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거대외도 알렉스턴과 싸우면서 소모한 재료가 많아 우주선을 만들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어쩔거야?”
“광석을 좀 탐사해야겠어. 시간이 좀 걸릴테니까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어.”
“그동안 내가 할일은 없어?”
“흠... 팀원들 사기나 떨어지지 않게 해. 낯선 곳이니 불안해 할 수도 있잖아.”
“내 팀원들 중에 그렇게 약한 녀석은 아무도 없어.”
“그러면 근처를 탐색하면서 외도라도 잡고 있어. 위험한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좋아.”
카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셔틀에 탑승한 준은 광물탐사를 활성화 하고는 맵을 켰다. 필요한 것은 철광석이었지만, 알루미늄이나 텅스텐도 괜찮았다. 하지만 어느행성이나 가장 많은 광석이 철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철을 사용하는 것 뿐이다.
“흠... 광석은 별로 없는데...”
가스행성이 아닌 암석행성의 경우는 거의 대부분 다량의 철을 가지고 있다. 산화철의 분포도가 너무 높아 행성 전체가 붉게 보이는 곳도 흔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있는 이곳은 밀집된 광맥이 보이지 않았다. 현재 준의 광물탐색 범위는 약 반경 100킬로미터 정도. 셔틀에 탄 채로 빠르게 이동하면서 행성의 절반을 돌아다녔지만 이렇다 할 광맥을 찾지 못했다.
대신 확인한 것인 지겹도록 무성한 숲이었다. 이 행성은 생명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수목이 자리하고 있었다. 산소포화도가 높고 중력이 0.81이라는 비교적 작은 수치다보니 나무들은 삼백미터가 넘게 자라 수목의 바다를 이루고 있었고, 하늘에는 이십 미터가 넘는 생명체들이 날아다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준을 놀라게 만든 것은 지상을 돌아다니는 생명체들의 모습이었다. 하나같이 10미터가 넘었고, 큰 놈은 50미터가 넘어가는 녀석들도 있었다.
“선사시대를 보는 것 같군.”
지구의 경우 과거에 공룡을 포함한 대형 수각류 공룡들이 번성했던 시기가 있었다. 지금 이 행성의 모습이 딱 그때가 아닐까 싶은 느낌이었다. 비록 생명체들은 털로 뒤덮여 있었고, 수각류라기 보다는 포유류에 가까워 보이는 놈들이었지만 어쨌든 분위기가 그렇다는 것이다.
-뭐 특별한거 없어?
카렌에게서 메시지가 들어왔다.
-별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광맥이 부족해. 이러다가는 우주선을 만들 재료를 못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더 찾아봐. 나오겠지.
-그럴생각이야. 그쪽은 뭐 나온거 없어?
-흠... 조금 이상한 점이 있어.
-뭔데?
-이 행성. 생명력이 엄청나다는 건 확인했지?
-지금도 지겹게 확인하고 있지. 온통 숲뿐이야. 지겨워서라도 바다쪽으로 나가보려고.
-응. 그런데 외도가 없어.
-외도가 없다고?
-그래. 보통 이런 거주가능 행성에는 외도가 쉽게 나타나는데, 눈에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아.
-그건 좀 이상하군.
기본적으로 외도는 상당히 낮은 확률로 존재한다. 하지만 그건 전체 행성의 수를 놓고 생각해 봤을때다. 이런형태의 거주가능 행성에서는 생각보다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차원의 틈을 통해 흘러나온 엑조틱 에너지가 그 지역의 생명체와 결합하며 외도화 되기 때문이었다. 물론 외도가 한 가지 이유만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무리어미라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던전에서 쏟아져 나오는 경우도 많다.
어쨌거나 공통점은 생명체의 활동이 클 수록 외도의 발생확률도 높아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까지 극단적으로 생명활동이 많은 행성에 외도가 나타나지 않을 확률은 상당히 낮다.
-알았어. 일단 계속해서 주변을 탐사해줘.
-참. 그런데 음식은 어떻게 하지?
-음식? 그건 왜?
-델타스토어의 요리파트는 마스터가 담당하는 곳이잖아. 구입이 안 되지 않을까?
-데이터 자체는 스토어에 저장되어 있으니까 상관없을거야. 업데이트가 안될 뿐이지.
-아. 그렇겠군. 그러면 굳이 이 놈들을 구워 먹을 필요는 없겠네.
-여기 동물들을 잡아 먹은거냐?
-맛있어. 너무 커서 한번에 먹기엔 양이 많아서 그렇지. 그것도 인벤토리에 넣어두면 될테니까 걱정은 없어.
-좀 챙겨둬. 나중에 마스터에게 가져다 주면 새로운 요리가 나올지도 모르잖아.
-그럼 표본을 좀 챙겨놔야겠네. 외도가 없으니 사실 좀 심심했거든. 그 일이라도 하고 있어야겠네.
-그래. 좀 부탁해.
카렌의 메시지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외도가 없다는 건 보통 사람에게는 축복이지만 카렌과 같은 녀석에게는 심심하기 짝이없는 일이다. 아무리 덩치가 크다고 해도 이곳의 생명체들은 평범한 동물일 뿐이다. 카렌 팀이 전부 나설 필요도 없이 팀원 중 한명만 나서도 50미터가 넘는 생명체를 도륙낼 수 있었다.
무서운 것은 그런 덩치큰 동물보다는 외려 작은 독충이나 뱀 같은 것들이다. 하지만 어지간한 맹독이 아닌 이상에는 펠로우쉽 계약자들을 죽일 만한 독을 내뿜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착각이라는 걸 아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준! 해독제 같은 거 가지고 있어?
-해독제? 왜?
-독충에게 물렸어. 체력이 떨어지는 속도가 무시할 만한 정도가 아닌 것 같아.
-뭐? 상급헌터의 목숨을 위협할 정도라는 거야?
-죽을 정도는 아닌데... 모르겠어. 혹시 몰라서 물어보는 거야.
-일단 에피알게나스가 만들어 놓은 회복물약의 재고가 남아있긴 해. 그걸 네 쪽 인벤토리에 넣어둘게. 응급처치는 될 거야.
예전에 마약중독을 치료하기 위해 에피알게나스의 능력을 이용해 물약을 만든 적이 있었다. 독충의 독에도 먹힐지는 모르겠지만 애초에 에피알게나스의 능력은 혈청을 이용하는게 아니니까 그다지 상관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허탕을 치고 숙소로 돌아온 준은 병상에 누워있는 헌터에게 다가갔다. 카렌팀에는 힐러가 있는데 독때문에 고생한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독에 당한 사람을 확인해보니 이해가 됐다.
하필이면 독충에 물린 녀석이 힐러인 어거스트였던 것이다. 그의 체력바를 확인해보니 총 체력 9천에 약 3천 정도만이 남아 있었다.
준은 카렌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자기 자신에게는 힐을 사용하지 못하는 거야?”
“가능한데. 독이 얼마나 강했던지 물리자 마자 쇼크를 일으키는 바람에...”
“엄청나군. 대체 무슨 벌레이기에 그렇게 독이 강한거야.”
“그렇지 않아도 궁금해 할 것 같아서 잡아왔어.”
카렌이 손짓을 하자 스카라가 두꺼운 유리병에 들어있는 벌레를 가지고 왔다.
“...쇼크를 일으킬 만 하군.”
벌레의 크기는 거의 30센티미터가 넘었다. 이정도면 벌레가 아니라 그냥 괴물이라고 봐야했다.
“이 동네 야수들의 크기가 크잖아. 생각해보니 몇십미터씩 되는 동물들에게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독이니 얼마나 강할지 상상이 안되더라고.”
“그래도 버티는 걸 보니 다행이야.”
“물약에다가 본인의 체력도 강하고, 무엇보다도 펠로우쉽 계약 덕이지. 일정 체력 이하로는 독이 침범이 못하더라고.”
“그런 기능이 있었나? 출혈을 막아주는 힘은 있는 걸로 아는데.”
“어느정도 이상의 독도 막아주는 것 같아.”
“이런 독충의 수가 많은건가?”
“제법 있는 것 같아. 불을 확 질러버릴까.”
“참아. 이렇게 숲이 많은 곳에서 불이 났다가는 순식간에 전부 타버릴걸.”
“대기가 습해서 크게 번지지는 않을 것 같던데? 모르긴 몰라도 비도 엄청 자주 올거야.”
“어쨌거나 스파일리 행성과는 180도로 다른 곳이라는 건 확실하군.”
스파일리 행성과는 완전히 다르다. 당연한 일이다. 그곳은 사막이었고, 이곳은 온통 숲으로 둘러싸인 곳이니까.
하지만 왠지모를 불길한 생각에 준은 맵을 펼쳤다. 주변의 지형을 살피는 것은 의미가 없다. 준은 오리진의 조각을 탐색하기 위한 모드로 전환했다.
그러자 주변 항성계의 정보와 함께 로오나의 위치가 점멸했다. 처음에는 이 지도를 눈여겨 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천천히 살펴보니 주변 항성계의 지도가 심하게 낯이 익었다.
무엇보다도, 지도에는 지금 준 자신이 있는 행성의 이름이 표시되어 있었다.
“카렌.”
“왜?”
“여기. 스파일리 행성인 것 같다.”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거긴 사막이고 여긴 온통 우림이잖아. 기후와 식생이 완전히 다르다고.”
“나도 좀 이해가 안되는데. 주변 항성계의 위치가 동일해. 무엇보다도 델타맵이 이 곳을 스파일리 행성이라고 지칭하고 있어. 내가 틀릴 수는 있어도 델타가 틀릴 가능성은 희박해.”
“뭐야. 그럼 스파일리 행성 반대편에 이런 숲이 있었다는 거야?”
“아니. 그럴리가 없지.”
“그럼 대체 어떻게 된거야?”
“나도 이건 가정인데...”
준은 주저하면서 입을 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만약 자신의 가정이 맞다면 이곳에 온 이후 있었던 모든 이상한 일들이 설명이 된다.
“여긴 과거의 스파일리 행성인 것 같아.”
“뭐라고?”
카렌이 말도 안된다는 듯 준을 쳐다보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말이 안되는데 그녀의 놀라움은 훨씬 클 것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그것이 가장 말이 되는 결론이었다.
“생각해봐. 이 지독한 우림들. 그리고 생명들. 저것들이 모두 썩어서 땅속에 묻힌다고 가정했을때 충분히 석유의 재료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아?”
“세상에. 네 말대로라면 여긴 대체 몇년이나 과거라는 거야?”
“최소한 몇백만년이겠지.”
“하...”
카렌이 어이가 없다는 듯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이건 그녀가 생각하는 스케일을 한참이나 벗어난 상황이다.
“내가 널 만나고 나서 수없이 많이 황당한 일을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그중에서도 제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
“아직 확실한건 아니야. 어디까지나 가정...”
“가정이라고는 해도 거의 확실하다고 생각하고 있는거지?”
“AI에게 분석을 요청했어. 곧 대답이 나올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