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64 ----------------------------------------------
스파일리 행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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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하고 물러서. 이런 식으로 부딪혀 봐야 너에게 좋을 건 없어.”
“뭐라고?”
“애초에 그 애가 몇 살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랑 동갑이겠지.”
“아. 그렇군.”
검둥이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엘라의 진짜 나이는 알려지면 안되는 정보였다.
“어쨌든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안되니까.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나참. 무슨 개소리야. 네가 무슨 아빠라도 되냐?”
“아빠는 아니고 삼촌 정도는 되겠지.”
“뭔 개소리야.”
검둥이의 말에 제임스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할이야기 다 끝난 건가? 그럼 난 이만 간다.”
“응?”
방금 전 까지 제임스에게 멱살을 잡혀 있던 검둥이가 언제 그랬냐는 듯 옥상 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무슨 영문인지는 몰랐지만, 이대로 그냥 내보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든 제임스가 검둥이에게 달려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 자식이! 어딜 도망가!”
“너는 나에게 부탁을 했고, 난 거절했다. 그거면 서로 볼일은 다 본 것 같은데?”
“웃기고 있네. 너는 무조건 내 부탁을 들어줘야 돼.”
“왜?”
검둥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제임스는 순간 할말을 잃고 머뭇거렸다. 그에게 이런 식으로 되묻는 사람이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원하는 모든 것을 얻어왔다. 그가 요구하면 누구든 들어주었고, 그것은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제임스의 아버지는 란도넬에서 제법 유명한 건설회사의 사장이었다. 특히나 최근 델타스피릿이 란도넬 행성을 지배한 이후부터는 제법 경기도 좋아진 상태라 회사가 더욱 번창해지고 있었다.
당황 후에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상대는 아무래도 자신의 힘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네가 아직 전학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모르는 모양인데. 이런 식으로 나오면 너 학교다니기 상당히 괴로울 거다.”
“그럴 리가 없으니까 쓸데없는 걱정하지마.”
“내가 걱정하는 걸로 보여?”
“말장난 할 시간있냐?”
“이 새끼가!”
휘익!
결국 참지 못한 제임스가 검둥이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검둥이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주먹을 보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걸 죽여? 아니. 괜히 사고치는 것 보다는 그냥 한 대 맞아주는게 편할지도 모르지. 헌데 그랬다가는 또 더 귀찮게 할 것 같은데. 아냐. 학교에 온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괜히 누님에게 쓸데없는 걱정시켜드리긴 좀 그렇지. 하지만 엘라에게 찝적대는 놈을 내버려 두기에도 찝찝하고... 헌데 이 자식은 왜 이렇게 느린거야? 한 대 맞아주는 것도 힘드네.’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마침내 제임스의 주먹이 검둥이의 얼굴에 닿았다.
딱!
“으악!”
제임스가 손목을 쥐고는 바닥을 뒹굴었다. 검둥이가 멀뚱히 그 모습을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한두 대 맞아주고 끝내려고 했는데 자기가 먼저 쓰러져버리니 황당하기 그지 없었다. 검둥이는 걱정어린 말투로 입을 열었다.
“너 혹시 어디 지병이라도 있는 거냐? 골다공증이라던가.”
“으으으. 대체 무슨 짓을 한거야! 왜 내 손목이...”
제임스의 손목은 퉁퉁 부어오르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뼈가 부러진 듯 보였다. 그러자 제임스의 곁에 있던 두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검둥이에게 달려들었다.
“이 자식이!”
“죽으려고 환장했냐!”
딱! 딱!
“으아앙!”
“으허헝!”
그리고 사이좋게 제임스의 곁에 드러누워서는 울부짖었다. 검둥이는 가만히 세사람을 지켜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옥상을 빠져나갔다.
“뭐하고 온거야?”
교실에 들어가보니 엘라와 아이들이 남아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검둥이가 의외라는 듯 입을 열었다.
“기다린거냐?”
“무슨 이야기를 하고 온건지 궁금해서.”
“궁금하면 숨어서 보지 그랬어?”
“그건 실례잖아.”
“그러냐...”
검둥이는 머리를 긁적이고는 말을 이었다.
“별거 없었어.”
“벌써부터 비밀이 생긴거야? 애완동물 주제에 주인에게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다는 거야?”
“애완동물이라니. 이래봬도 네 삼촌뻘이다.”
검둥이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이야기 해줘.”
“됐어. 집에나 가자.”
녀석들이 엘라에게 관심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이 녀석은 호기심 때문에라도 만나려고 들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틀림없이 사단이 일어날 것이다.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았다.
녀석들도 손목이 부러졌으니 어지간해선 덤비지 못할 것이다. 최소한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있다면 자신이 평범한 학생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테니 다시는 시비를 걸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검둥이는 자신이 너무 순진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음날. 손목에 보호패드를 착용한 제임스가 어제보다 많은 패거리를 이끌고는 검둥이 앞에 나타났다.
“어제는 제법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절대로 도망치지 못할걸?”
“애초에 도망친 적도 없는데.”
“수업 끝나고 옥상으로 오도록.”
제임스는 이를 뿌드득 갈며 검둥이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검둥이는 귀찮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굳이 수업 끝날때까지 기다릴 필요있어? 지금 가지.”
“친구가 열 명이나 되다니. 부럽다.”
“놀리는 거지?”
“응.”
엘라가 배시시 웃으며 검둥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의 제임스는 어제와 달리 살기가 등등한 상태였다. 아무리 엘라가 뭘 모른다고 해도 저렇게 죽일 듯이 쳐다보는 녀석을 보고 친구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적당히 하고 와. 펄이랑 같이 갈래?”
“저 녀석들 다 죽일 일 있냐.”
검둥이가 펄을 흘깃 보고는 입을 열었다. 그녀는 손 쓰는 데 전혀 주저함이 없었다. 그나마 검둥이가 있어서 통제가 되고 있지만 만약 저 녀석들이 자신이 아닌 펄에게 시비를 걸었다면 다들 팔이나 다리 하나씩은 내어줘야 했을 것이다. 어쩌면 실수를 가장해서 머리를 날릴 지도 모른다.
휘이잉-
이제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부는 배스커빌 중학교의 옥상. 검둥이의 앞에 열명의 중학생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그중에 한 명이 유독 눈에 띄었는데 180이 넘는 키에 온몸이 근육질인 녀석이었다.
아무리 봐도 최소 스무살은 넘어 보였다.
“소개하지. 이 녀석은 우리집안에서 운영하는 헌터교습소 출신의 블록이라고 한다. 네 녀석을 손봐줄 친구지.”
“그러냐.”
검둥이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하품을 하자 제임스가 웃음을 흘렸다.
“후후. 그렇게 여유부리는 것도 그게 끝이다. 이 녀석은 겨우 열네 살 밖에 안됐지만 벌써 마나를 다룰 줄 안다고.”
“별로 빠른 것도 아닌데.”
검둥이는 블록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중학생이라고 할 수 없는 큰 키와 근육질의 몸. 아무래도 유전자 변형과 함께 스테로이드 계열의 약물을 장기간 투입한 것 같았다. 과거라면 그런 약물이 신체에 악영향을 끼쳤겠지만 최근에 와서는 충분히 부작용을 제어할 수 있는 새로운 약물들이 많이 개발되었다.
헌터지망생들은 신체의 단련과 함께 그런 약물들을 다량 복용하는 것이 익숙해져 있었다. 특히 탱커를 지망하는 이들은 근육을 키우기 위해서 더 많은 양을 섭취했다. 아주 부작용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것이 주는 힘에 비해서는 미미한 정도다 보니 그쪽에서는 영양제정도로 생각하고 먹는 모양이었다.
“뭐라고?”
“그렇잖아. 열다섯에 겨우 마나를 다루다니. 태어나면서부터 마나를 다루는 녀석들도 있는데.”
실제로 십만명당 하나 꼴로 그런 녀석들이 태어난다. 그런 이들은 어린시절부터 특별대우를 받으면서 헌터가 되기 위한 수련을 받는데, 그런 재능을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상급의 벽앞에서 좌절한다.
하물며 겨우 열다섯에 마나를 다루는 수준이라니, 상급헌터도 때려잡는 검둥이의 입장에서는 코웃음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뿌득.
검둥이의 말이 비아냥으로 들렸는지 블록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두 사람이 서로 가까이 서자 덩치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났다. 인간형태의 검둥이는 겨우 150 정도에 불과했다. 그에 비해 블록은 180이 넘었으니 성인과 아이가 서로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제임스. 정말 이 녀석에게 당했단 말이야?”
“그게 작아보여도 보통내기가 아니야. 정말 순식간에 당했다니까.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지도 못했어.”
“흠. 스피드 타입인 모양이군.”
“아니. 애초에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그냥 네가 멋대로 뻗어버린거 아니었냐.”
“시끄러워! 블록, 저 녀석 다시는 저 입을 놀리지 못하게 이빨을 다 뽑아버리라고.”
“그거야 내 전문이지. 크크.”
블록이 목을 좌우로 움직이자 근육 사이의 기포가 터지면서 뚜둑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참. 혹시 이 녀석 죽여도 되냐?”
“가급적이면 죽이지마. 귀찮아 지니까.”
“스치기만 해도 죽을 것 같아서 말이지.”
“젠장. 알아서 해. 아버지에게 말하면 알아서 해결해 주겠지.”
“졸린다. 뭐든지 할거면 빨리해.”
“그렇지 않아도 시작하려는 참이었다. 하앗!”
쾅!
블록이 검둥이의 얼굴에 주먹을 내질렀다. 키 차이가 워낙 크다보니 하단 찌르기 형태가 되었지만 어쨌든 제법 훈련을 탄탄하게 받았는지 상당한 힘이 실린 공격이었다.
물론 검둥이에게는 어림도 없는 공격이었다.
“흠... 다른거 없어?”
“무... 무슨 말도 안되는.”
블록의 동공이 급격히 커졌다. 틀림없이 녀석을 날려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검둥이가 검지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주먹을 막고 있었다. 아무리 눈을 깜빡여봐도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뭐야. 봐주는 거냐? 적당히 하고 빨리 해치워버려.”
제임스가 뒤에서 야유를 하며 외쳤다. 블록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이 녀석 뭐지...? 보통 녀석이 아닌 거 같은데?’
외모가 워낙 어린데다가 이상한 코스프레를 하고 다니는 걸로 봐선 그냥 제정신이 아닌 녀석쯤으로 치부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혹시 수인족 같은건가?’
유전자 변형으로 인해서 야생동물의 힘을 가진 인간이 있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다. 물론 실제로 발견 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게 괴담같은 게 아니라 정말이었다면 지금 눈앞에 있는 녀석이 바로 그런 녀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 혹시... 무슨 실험 같은 걸 받은 거냐?”
꿈틀.
그리고 놀랍게도 그 추측은 제법 사실과 들어맞았다. 검둥이의 표정이 급격히 싸늘하게 변했다. 블록이 다시한번 입을 열었다.
“저, 정말인가 본데. 그럼 너 진짜 수인족...”
뻐억!
쾅!
가죽부대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블록이 몸이 허공을 날아 그대로 옥상에 있는 물탱크에 틀어박혔다.
휘잉-
쏴아아-
물탱크가 부서지며 안에 있던 물이 엄청난 기세로 쏟아졌다. 제임스와 아이들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검둥이와 블록을 번갈아 가면서 쳐다보았다.
“주, 죽은거 아니야...?”
“모, 몰라. 어떻게 하지?”
조금씩 움직이던 아이들은 이윽고 모두 제임스의 뒤에 숨어서 검둥이의 눈치를 살폈다. 졸지에 제일 맨앞에 서게 된 제임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저기...”
“말 해.”
“목숨만 살려주시면 안될까요?”
“거기 있어봐. 지금 생각 좀 해보고.”
검둥이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적당히 손봐줄 생각이었는데 ‘실험’ 이야기에 그만 화가나서 너무 힘을 실었다. 잘못하면 정말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녀석들이 아무리 안하무인에 건방지게 굴었다고는 해도 애시당초 서로 힘의 차이가 극심한 상황에서 과하게 손을 쓴 감이 있었다.
검둥이는 한숨을 크게 쉬고는 입을 열었다.
“병원에 전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