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53 ----------------------------------------------
스파일리 행성
*
*
*
정신을 차리고 보니 훌쩍 자라버린 그녀를 보면 좀 더 함께 있어주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란도넬 행성에 오랜시간 머무른 것도 그녀가 더 성장하기 전에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준은 그녀에게 펠로우쉽 통신을 통해 메시지를 보내고는 천천히 눈을 떴다. 란도넬은 지금 한창 새벽인 시간. 잠들어 있거나 아니면 자경단 역할을 한다고 밤거리를 헤매고 있을 수도 있었다.
“얼마나 남았어?”
“아직 제법. 그래도 거의 다왔어. 저쪽에 보이는 계단을 통해서 내려가면 돼. 꼬리가 붙기 전에 움직여야지.”
검은거인들의 추격때문에 오랜시간 이곳에 머무를 수는 없었다. 준은 어느정도 마나가 회복된 것을 느끼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저 안에 뭐가 있던지 간에 얼른 회수하고 돌아가야지. 가능하면 네번째 전투가 있기 전에 돌아가고 싶어.”
“델타스피릿 말이구나.”
“아아. 사망자가 나왔다고. 내 생각보다 외도의 숫자가 많은 것 같아. 다음번엔 더 많은 희생이 있을 수도 있어. 기껏 고생해서 키워놓았는데 죽어버리면 아깝잖아.”
“걱정되는 거야?”
“모든 사람을 책임 질수는 없지만, 내 손에 닿는 사람들은 지키고 싶거든. 그럼 가자.”
준은 에피알게나스를 데리고 인펙터들이 있을 곳으로 생각되는 목적지로 향해 다가갔다. 오리진의 조각이 반짝이는 위치이자, 지구라트 전체를 움직이는 중추기관이 있는 곳이었다.
쩌억.
곧 초록과 갈색의 진득한 젤리 덩어리이 가득한 좁은 길이 나타났다. 음식물 찌꺼기같기도 하고, 죽은 점막덩어리 같기도 한 그것들을 준은 일일이 염동력으로 치워내며 걸었다. 길은 좁았고, 비스듬히 아래로 계속해서 내려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커다란 구멍이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건...”
“여기서 한참 내려가야돼. 여기까지는 그 거인들이 쫓아오진 못할테니까 천천히 내려가자.”
직경 100미터는 될법한 시커먼 원형의 구멍을 따라서 나선형의 계단이 있었다. 겨우 사람하나가 겨우 지나갈 법한 좁은 길이었다.
혹시나 함정이 있을까 싶어 준은 곡갱이 몇 개를 꺼내었다.
쿵. 쿵.
계단은 튼튼했다. 하지만 함정이 있다면 눈에 보이게 설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염동력을 이용하거나 관성제어를 이용해 날아서 내려갈 수도 있었지만 일단은 계단으로 내려가는 것을 선택했다. 그 선택은 함정이나, 혹은 다른 습격이 확인 된 이후에 해도 늦지 않았다.
준은 계속해서 염동력을 이용해 바닥을 두들기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두 사람이 절반 이상 내려올 때까지 함정은 없었고, 예상되었던 외도의 습격도 없었다.
“란도넬에서는 이런 비슷한 곳에서 비행형 외도가 덤벼들었었는데. 제법 신사적이군.”
준은 이 아래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사내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준과 협상을 하고 싶어했다. 그에게 있어 베스트시나리오는 준이 자신과 협력하여 갤럭시 인더스트리를 물리치는 것일테니 가급적이면 멀쩡한 상태로 만나길 원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생각하기엔 제법 전투가 있었어.”
“멋대로 길을 내고 오다보니 그런 걸 수도 있고. 사실 이 커다란 지구라트를 휘젓는 것 치고는 전투가 적었던 것도 사실이잖아.”
조금 더 내려가자 커다란 소리가 일정하게 들여왔다.
쿵. 쿵. 쿵.
“심장소리로군.”
“지구라트의 심장?”
“그래. 거의 도착한 것 같아.”
지구라트는 각자 서로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었지만 공통점도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지구라트를 살아있게 하는 심장의 존재였다. 우주선으로 따지면 엔진과 같다고 할 수 있었다. 심장이 파괴된다고 해서 지구라트가 폭발하지는 않지만 더 이상은 성장하거나 외도의 보금자리 역할을 수행할 수 없었다.
물론 정신파를 사용하기 위한 두뇌의 존재도 반드시 필요했는데, 이 경우는 자신에게 대화를 걸어왔던 인펙터가 두뇌의 역할을 맡고 있는 듯 했다.
나선형의 긴 계단을 내려와 바닥에 도착할 무렵에는 구멍의 크기가 약 절반가까이로 줄어들었다. 구멍 자체는 약간 원뿔을 거꾸로 뒤집어 놓은 것처럼 생겼는데, 나선형의 계단 때문에 이런 형태의 구조물이 된 것 같았다. 주변을 둘러보자 예의 검은 액체가 주변을 둘러싼 벽에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액체는 바닥에서 출렁이고 있었는데 쇠막대를 꺼내어 집어넣어 보니 그 깊이가 거의 준의 가슴까지 올 정도였다.
쿵. 쿵. 쿵. 쿵.
준이 서 있는 계단의 반대쪽엔 직경 20미터는 되어보이는 거대한 심장이 있었다. 그리고 방의 한가운데, 몸의 절반이 검은액체에 담겨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이 있었다. 그는 상체만을 내어놓은 채 준과 에피알게나스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키는 거의 3미터에 달했고, 비쩍마른 피부위로 거미줄처럼 혈선이 그어져 있었다. 사내가 입을 열었다.
“꽤나 요란하게도 오는 군.”
“길이 너무 어려워서.”
준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는 준에게 접촉을 시도했던 인펙터였다.
“그래서. 대답은?”
“그 전에 물어볼게 있는데.”
“뭐지?”
“이거 말이야. 대체 뭐하는 거지?”
준은 계단위에 서서 발밑에 찰랑거리는 검은 액체를 가리켰다. 사내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에너지를 수집해서 운반하기 위한 거다. 지구라트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지. 이 정도 규모의 기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당량의 에너지가 필요하고, 그 힘을 얻기 위한 방법이 필요하니까.”
“그게 전부인건가?”
“이 액체는 인간의 피와 같은 것이지. 생존을 위한 것일 뿐. 다른 의미는 없다.”
“지금까지 봤던 다른 지구라트에는 없던데?”
“외도들은 그럴 필요가 없겠지. 타 종족의 생명력을 섭취하면서 힘을 키워가니까. 하지만 우리는 공존을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번거로운 방식을 택하는 것이지.”
“제법 설득력이 있군.”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미간을 한번 찡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거짓을 말 할 거라면 너를 이곳까지 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제 슬슬 결론을 내려줬으면 하는데.”
“만약 내가 너에게 조각을 받는다면 나머지 7개, 아니 8개 지구라트도 내버려 둬야 한다는 건가?”
“그건 내 알바가 아니다.”
“냉정하군. 네 말대로라면 같은 연구를 하던 동료였을 텐데. 갤럭시 인더스트리에 대항하고자 한다면 서로 연합을 하는 편이 낫지 않은가?”
“각자 서로 의견이 달라 흩어졌으니 그들의 생각까지 내가 결정내릴 수는 없는 문제다. 누군가는 나처럼 협상을 하려 할 것이고, 누군가는 거부하겠지. 나는 전자를 택한 것 뿐이다.”
몸의 절반은 외도인 만큼 그의 말을 모두 믿을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사내의 말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물론 준에게 있어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이 자리에서 저 인펙터로 추정되는 사내를 제거하는 것이다. 그는 외도였고 인간과는 공존이 불가능한 생리학적 이유가 있다. 하지만 준은 이미 눈알외도를 수하로 넣었던 경험이 있다. 만약 가능하다면 저 사내도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살아있는 지구라트를 보유한다는 것은 제법 연구에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지구라트를 소유한다는 것은 그에 속한 외도를 손에 넣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적이기만 한 외도를 장악할 수 있다는 것은 제법 매혹적인 일이었다.
준은 고심 끝에 입을 열었다.
“조건이 두 가지 있다.”
“원하는게 많군.”
사내는 제법 불쾌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미래가 준의 생각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 더 이상 불만을 표하지는 않았다.
“그 검은거인도 그렇고, 너희들이 연구하는 진화프로그램은 그냥 두기에는 위험해. 때문에 우리쪽 사람이 상주하면서 감시할 사람이 있어야 한다.”
“뭐라고? 네놈도 우리의 연구를 노리는 거냐!”
갑자기 사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사내의 몸에는 두 사람의 인격이 공존한다. 한 사람이 제법 이성적으로 판단하는데 능하다면 나머지 한 사람은 매우 감정적이었다. 그때그때 느끼는 기분을 그대로 표출하는 듯 했다.
이미 어느정도는 예상한 일이었기에 준은 동요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노린다라.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군. 좋게 생각해보면 이는 너희들에게도 기회가 될 수 있다. 우리 델타스피릿은 외도연구에 대해서만큼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연구진을 보유하고 있으니까. 그중의 핵심인물을 투입할 생각이다. 연구결과를 공유하면서 서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
“너희들을 어떻게 믿고!”
“믿음이 없는 건 서로 마찬가지지. 너희들이 이곳에서 외도를 생산해서 인류를 공격하지 않을거라는 보장이 있나? 이 검은액체에서 생산되고 있는 거인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심각한 위협이다. 그것의 정체에 대해서 당장 묻지는 않지. 하지만 관련 연구는 우리와 공유되어야 한다. 그것이 올바르게 쓰인다는 확신이 없이 어떻게 내가 너희들을 보호할 수 있지?”
“이건 내 생각과 다른데.”
준의 말에 사내는 무거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오리진의 조각으로는 정녕 부족한 건가?”
“외도의 존재를 용인하는 것만으로도 나로서는 상당한 양보를 한 셈이다. 이곳으로 오기 전까지만 해도 어떻게 네 녀석을 제거할까 하는 생각을 했으니까.”
“뭐라고?”
“하지만 한편으로 기회를 주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지. 지금까지 본적없는 지구라트의 구조, 새로운 외도의 형태. 그것들을 만들어 낼 만큼의 지식이 있다면 향후 증식할 외도를 상대하는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받아들인다면 곧 이곳으로 연구진을 파견하도록 하지. 하지만 거부한다면 어떤 결론이 내려질지는 알겠지?”
“아무래도 내 생각이 틀렸던 것 같군. 넌 생각보다 더 위험한 녀석이야.”
사내의 눈동자가 불길하게 번득였다. 준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대답은?”
“그런 조건을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
“내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거지?”
“서로 긴말할 필요 있을까?”
준이 라이트세이버를 들어보였다. 사내의 몸에서는 형언하기 힘든 힘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는 오리진의 조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무엇이든 제대로 사용하는 법을 알고 있다면 준이 상상하는 것 이상의 힘을 뿜어낼지도 몰랐다. 다행인 것은 그것을 몸에 흡수한 것이 아니라 결정형태로 가지고 있다는 것.
오리진의 조각을 외부에 둔 것만으로는 모든 힘을 뽑아낼 수 없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강하게 얽혔고, 먼저 손을 든 것은 인펙터 쪽이었다.
“좋아. 그럼 두 번째 조건은 뭐지?”
“이런거지.”
딱.
준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마른 사내의 동공이 흔들리며 당황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