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51 ----------------------------------------------
스파일리 행성
*
*
*
예전의 그였다면 마냥 부러워하며 질투심으로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얼마든지 더 성장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해야 할 일은 끊임없이 노력하여 그 자리에 도달하는 것 뿐이었다.
위웅비는 외도들을 처리하고 있는 란테르트를 보았다. 실력은 일취월장하고 있었고 지금에 와서는 자신과 비등한 실력자가 되었다.
위웅비는 란테르트가 얼마나 노력해왔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그런 노력은 자신뿐만 아니라 유관덕과 장이삼까지도 변하게 만들었다. 늘 불만에 차있던 최하급 인생에서 벗어나 앞으로 한걸음씩 전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모든 기회를 만들어 준것은 다름아닌 델타스피릿이었다.
‘내 평생의 운을 모두 여기다가 쏟아부은 모양이야.’
삼십대 중반이 되어 겨우 얻은 인생의 마지막 기회였다. 그는 결코 이 시간들을 헛되어 보내지 않겠다며 또 한 번 다짐했다.
살아남은 외도들을 모두 정리한 헌터들은 사망자들의 시신을 한데 모아 관에 넣었다. 총 사망자 수는 십여 명이었지만 사망자가 있다는 사실은 모두를 침울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애초에 헌터생활이라는 것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사실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각오가 되어있지 않은 이들도 물론 있었다. 몇몇은 견디지 못하고 돌아가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막스는 군말없이 그들을 알바트로스로 향하는 셔틀에 태워 시신과 함께 올려보내었다. 가는 사람은 막지 않는 것이 회사의 방침이었고, 그것은 준의 성격이 반영된 것이다. 누구든 스스로 헌신할 준비가 되어있는 이들만이 함께 일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그들이 다시금 돌아오고 싶어한다면, 또 그때는 조건없이 받아들일 것이다. 그만큼 헌터는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동료가 죽는 걸 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니군요.”
전투가 끝나고 숙소로 돌아온 란테르트가 입을 열었다. 같은 방을 쓰고 있던 위웅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는 일상적인 일이다. 오랜시간 헌터일을 해왔고 그 긴 세월동안 살아남은 이들은 유관덕과 장이삼 뿐이다. 피를 나눈 형제는 아니지만, 그 고난의 세월을 함께 지내 온 만큼이나 가까울 수밖에 없는 사이가 되었다.
“익숙해질거야.”
“그렇게 되겠죠. 헌터라는 건 생각만큼 멋있기만 한 직업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제야 알았단 말이야?”
위웅비는 킬킬거리며 웃었다. 경박해 보이는 웃음이었지만 결코 가볍지 만은 않았다.
“알고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실제로 경험하는 것은 참 많이 다르네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몰라도 되는 일이지. 몰라야 하는 일이고.”
“이런 괴물들이 실제로 눈앞에 존재한다는 것도 믿기 어려운 일이고. 제가 알던 세상은 일부일 뿐이었다는 게... 뭐랄까. 눈이 있으면서도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익숙해지면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일 뿐이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마.”
“그래야지요. 헌데 사장님은 어디로 가신건가요? 이번 전투에서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시던데.”
란테르트는 훈련의 막바지에 그와 상대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만약 그가 있었다면 이번에도 별 다른 피해없이 적들을 물리쳤을 것이다.
“글쎄. 로버를 가지고 나간걸 보면 뭔가 중요한 일이 있는 모양이야. 우리가 상상도 하기 힘든 적을 상대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런 사람도 긴장할 만한 적이 있을까요? 카렌 입스위치보다 훨씬 더 강하다고 하던데.”
란테르트는 투구벌레를 상대하던 카렌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의 힘은 감히 그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강력했다. 도저히 칼이 박히지 않을 것 같은 강력한 외도의 껍질을 일격에 베어내고, 눈에보이지 않은 속도로 움직이면서도 어지간한 공격은 몸으로 받아낼 수도 있다. 여성이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의 터프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는 전사였다.
단점이라면 사생활이 지저분하다는 점 정도이지만, 이 세계에서 그런 흠은 사소한 문제일 뿐이었다. 한때는 사장에게도 추파를 날렸다고 하지만 지금은 흥미를 잃고 다른 사냥감을 물색하는 중이라고 했다.
“카렌뿐이겠냐. 당장 머릿속에 주인장 보다 강한 놈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인데.”
“확실히 그 정도가 되면 혼자 움직이는 편이 편하긴 하겠군요.”
“그래도 굳이 회사를 세우고 헌터를 육성하는 걸 보면 뭔가 생각이 있긴 한 것 같아.”
“궁금하냐?”
“전승!”
“전승.”
그때 두 사람이 있는 숙소로 막스가 들어왔다. 그 역시 다음 외도습격의 방어를 위해 몇가지 지시를 하고 잠시 말을 붙일 사람이 필요해 위웅비를 만나러 온 것이다. 준이 없으면 가장 심심한 것은 막스였다. 장민성은 수련하느라 바쁜 몸이었고, 카렌과는 말을 섞기 시작하면 결국 싸우게 된다. 오펜하이머는 애초에 대화가 되지 않는 녀석이었다.
막스는 무언가 대단한 비밀을 털어놓듯이 은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준이 델타스피릿을 세운 이유는 말이지...”
꿀꺽.
란테르트와 위웅비가 침을 삼켰다. 막스가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바로 이 몸을 먹여살리기 위해서지.”
“...대장님. 이러시깁니까?”
위웅비가 툴툴거리자 막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야. 애초에 별거 있겠냐. 먹고 살자고 세운 기업이고, 어쩌다보니 커진거지. 그러고보니 외도의 침입에서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거창한 이유가 있긴 한데 애초에 나중에 세워진 목표고 사실 그런 거 알게 뭐냐. 당장 우리가 살기 바쁜데.”
“하긴 그게 정답일 수도 있겠네요.”
위웅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외도를 막아내는 것은 전세계가 힘을 합쳐야 하는 문제였다.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애초에 준은 빚이 있었고, 그 빚을 갚기 위해서 기업을 만들었다. 순식간에 갚아버리긴 했지만 목적을 이루었다고 기업을 해체해 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준과 에피알게나스는 빠른 속도로 지구라트의 핵이 있는 위치로 달렸다. 벽과 바닥을 뚫고 도착한 곳은 거의 운동장 만한 크기의 공간에 모여있는 외도들이었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잠들어 있는 듯 보였는데, 몸의 절반 가량이 검은 액체에 잠겨 있는 상태였다.
“이게 뭘까?”
“모르겠어. 다만 무언가 기분나쁜 것이라는 건 확실해.”
에피알게나스가 검은액체에 살짝 손가락을 넣었다 빼고는 말을 이었다.
“엑조틱 에너지를 빨아들이고 있어.”
“그래?”
그녀의 말에 준도 검은 액체에 손을 집어 넣었다.
-정체불명의 힘에 의해 마나가 81손실됩니다.
-정체불명의 힘에 의해 경험치가 손실됩니다. 손실된 경험치 1899.
“이크.”
준은 황급히 검은액체에서 손을 빼내었다. 끈적거리는 질감도 기분 나빴지만 피땀흘려 얻은 경험치가 빠져나간다는 것은 더 불쾌한 일이었다.
“몬스터들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 이상해.”
“시험해 보면 알겠지.”
준은 에피알게나스의 말에 니들건을 쏘았다. 타탁! 하는 소리와 함께 쇠못이 죽은 듯 늘어져 있는 외도들의 몸에 박혔다. 하지만 녀석들은 조금 몸을 움찔거릴 뿐 적극적으로 공격을 할 의사가 없어보였다.
“죽은 건 아닌 듯 한데. 힘이 없어보이지?”
“공격을 받고도 반응이 더디다는 건 확실히 이상해.”
“잠이 덜 깨서 그런 것일리는 없고...”
준은 가만히 생각했다. 검은액체가 경험치와 마나를 빨아들인 다는 것과 관련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넓은 공간에는 얼핏보아도 수백마리에 이르는 외도들이 있었고, 넓은 공간을 감싸는 벽의 갈라진 틈에서는 끈적한 검은 액체들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불길한데.”
아무래도 저 검은액체는 바닥에서 죽은 듯이 잠자고 있는 외도들의 힘을 빨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다는 생각에 준은 인벤토리에서 소형 레일건 다섯 기를 꺼내들었다. 루나가 준에게 선물한 개인용 레일건을 카피해 거기에 델타엔진을 결합한 물건이었다. 하나하나가 무게가 상당해 많은 수를 운용할 수 없고, 초탄 발사 이후 재장전 시간이 지나치게 긴 것이 단점이긴 했지만, 전자기장제어를 사용하는 것에 비해 마나의 소모를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준은 그렇게 제작해 두었던 레일건 다섯 기를 이용해 일제사격을 시작했다.
쾅!
레일건이 엄청난 불길과 함께 굉음을 터뜨렸다. 초탄이 검은액체와 함께 잠들어 있던 외도들을 직선으로 돌파하며 기화시켰다. 하지만 공간 자체가 워낙 넓다보니 처치한 것은 일부일 뿐이었다.
재충전 시간 1분이 지나 다시한번 레일건을 발사했다. 두 번째 폭발과 함께 다시한번 수십마리의 외도를 산화시킨 준은 레일건에 의해 구멍이 뚤린 반대편 벽을 통해 검은액체가 줄줄 새어나가는 것을 확인했다.
“이래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건가?”
벽에 구멍을 뚫어가며 외도를 정리하고 있는 준이 의아해 할 무렵.
쿠르르-
지구라트 전체가 떨리며 검은 액체들이 서서히 모여들기 시작했다. 서서히 자라나는 그것은 인간과 유사한 형태를 띄기 시작했다. 형체가 흐릿한 그림자처럼 생긴 그것은 약 5미터 정도까지 자라났고, 그 이상으로는 커지지 않았다.
“준.”
“알아.”
아무래도 저 검은액체는 바닥에 잠겨있는 외도의 힘을 흡수해 끌어모으는 역할을 하는 듯 했다. 그렇게 모은 에너지가 어디로 가는지는 궁금해 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 눈앞에서 자라나고 있는 저 검은 형체가 바로 그 힘의 결집체일 것이다.
준은 그 검은색의 덩어리를 향해 레일건을 조준했다.
딱.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다시한번 레일건이 불을 뿜었다.
콰앙!
철퍽!
그리고 그 검은액체 덩어리의 몸을 관통한 탄자는 그대로 녀석의 몸에 커다란 구멍을 남기고 사라졌다. 준은 만족스럽지 않은 얼굴로 입술을 잘근씹었다.
“안 먹히는 데.”
꾸우우우-
그 검고, 커다란 액체덩어리는 타르덩어리처럼 끈적거렸고, 번들거리면서도 불규칙적인 무늬를 가진 채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녀석은 채 몇 초가 지나지 않아 구멍난 몸을 다시 메꾸었고, 준은 재충전시간을 기다렸다가 다시한번 레일건을 발사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녀석은 잠시 주춤하는 듯 하더니 다시 몸을 복구했다.
“이걸로는 안될 거 같아. 데미지가 전혀 들어가지 않고 있어.”
“레일건의 데미지가 먹히지 않으면 어떻게 상대할 생각이야?”
"그렇다고 구경만 할 수는 없잖아.“
일단 레일건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준은 니들건을 우수수 쏟아내었다. 니들건이 한차례 검은형체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것들은 예상대로 거의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하고 검은형체의 안으로 빨려들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니들건도 안되고.”
다음은 다연발 화염방사기인 식스팩이었다. 여섯 개의 가스팩을 거의 폭발시키듯이 짜내어 불길을 일으키는 물건이었다.
콰앙! 화르륵!
하지만 식스팩의 모든 탄환을 소모했음에도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