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45 ----------------------------------------------
스파일리 행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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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에게 무슨 기능이 있는지도 모르는 거냐?”
[내가 날 만든 것이 아니니 모를 수도 있잖은가. 너는 그럼 네 소화기관의 움직임에 대해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는가?]
“됐다.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지. 헌데 그럼 직접 말을 걸 수도 있는 건가?”
준의 물음에 에피알게나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것까진 모르겠어. 인간의 말을 번역해서 외도의 주파수로 보내는 방법이 불가능한 건 아닌 것 같지만, 자료가 많이 부족해. 애초에 정신파라는 것이 언어도 아니니까. 그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변환한 것 뿐이야.”
“눈알 녀석을 쥐어짜면 뭔가 나올지도 모르겠군.”
준은 란도넬 행성에 있는 눈알외도를 떠올렸다. 녀석은 직접적으로 정신파를 이용해 외도를 통제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 루나가 녀석을 연구 중이었고, 녀석이 발산하는 정신파에 대해서 뭔가 알 수 있을지도 몰랐다.
-루나. 지금 대화 가능해?
-가능해요. 무슨 일이에요?
-지금 혹시 눈알외도의 정신파에 대한 자료를 데이터베이스에 업로드 해줄수 있어?
-지금 연구실이니까 금방 가능할거에요. 헌데 무슨 일이에요?
-아. 외도와 대화를 좀 해볼까 해서.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위험한 상황인 건 아니죠?
-딱히 그렇진 않아. 주변에 외도가 좀 많기는 하지만 딱히 공격받는 것도 아니고.
로버에 탄 준에게 피해를 입히기 위해서는 최소한 초록색 외도 이상은 되어야 했다. 그것도 한두 마리로는 힘들었다. 준이 지구라트에 도착하기 전 두 마리의 파란색 외도를 5분도 되기 전에 피떡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초록색이 아닌 파란색 외도로 최소 다섯 마리 이상은 상대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만약 준이 불리해져 도망치고자 마음을 먹으면 어렵지 않게 도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 수였다. 로버의 속도는 지상의 외도가 따라잡기에는 거의 불가능했으니까.
준이 수천마리의 외도 한가운데서도 이렇게 느긋하게 있을 수 있는데는 로버의 힘에 대한 믿음을 바탕에 둔 것이었다.
준은 조용히 외도들의 움직임을 살피며 루나의 회신을 기다렸다. 루나가 준에게 파일을 주는 방식은 알카트뢰즈에 있을 때 성인영상을 넘겨주던 것과 동일한 방식이었다.
곧 그녀에게서 회신이 왔다.
-일단 지금까지 정리된 자료에요. 그래봤자 해석가능한 단어가 천개를 넘지는 못해요. 헌데 정신파를 해석하기 위한 시스템이 없으면 안될텐데요?
-아. 로버에 비슷한 시스템이 탑재되어 있는 것 같아.
-그래요? 그럼 나중에 로버를 좀 조사해봐도 될까요?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은데.
-나는 괜찮은데, 이 녀석이 괜찮다고 할 지는 모르겠네. 어쨌든 고마워. 잘 쓸게. 공짜로 사용하는 것 같아서 좀 그렇네.
-어차피 준 덕분에 연구를 하는 건데요? 당신이 쓰지 않으면 어디서 쓰겠어요.
루나는 현재 알카트뢰즈에서는 기대히기 어려웠던 최고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거기다가 생일같은 기념일 때마다 각종 연구장비들을 선물로 받으면서 그녀의 연구시설은 제법 고가의 기기들로 가득 찬 상황이었다.
거기다가 그녀 자체가 기계를 설계에서 부터 제작까지 할 수 있는 능력자였기 때문에 없는 실험기기들은 스스로 만들기까지 했으니, 현재 외도연구학 분야에서 델타스피릿 산하의 외도연구소는 거의 최정상급의 연구를 진행할 수 있었다. 그 점 때문에 조금씩이지만 각 대학의 박사과정 연구원들의 지원자들도 늘고 있는 추세였다.
루나와 통신을 마친 준은 그녀가 올려준 데이터를 델타OS와 연동하여 로버에 적용시켰다.
-시스템. 이 데이터들을 로버의 정신파 번역기에 업로드 부탁해.
-사용자의 요청을 처리합니다........ 언어변환 과정중....... 업로드 완료. 로버의 정신파 해석 시스템을 활성화 하시겠습니까?
-응.
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로버의 내부에 시끄러운 소음이 가득 찼다. 그 소리는 마치 쇠를 긁는 듯해서, 준은 순간적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기기기긱---
“으읏... 뭐야 이건? 소리 좀 줄여!”
[음. 누가 멋대로 내 안에서 조작을 하는 모양인데.]
“그거 AI 시스템이야. 어쨌든 소리 좀 줄이라고!”
준이 신경질적으로 외치자, 곧 로버안을 가득 채우던 괴기한 소리가 잦아들었다. 에피알게나스가 가볍게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내가 줄였어. 마음대로 시스템 건드리지 마.”
“내가 한 거 아니야. AI가 한 거라고.”
“어쨌든. 로버는 기본적으로 오리진에서 생산된 물건이라고. 델타의 시스템이라고 해도 내부 구조를 전부 이해하지는 못해.”
“너는 안다는 거야?”
“적어도 이런 류의 기기에 대해서는 익숙해.”
“알았어. 그럼 당분간은 좀 부탁해.”
준은 그렇게 말하고 시스템에게 말을 걸었다.
-제대로 못하냐? 귀 떨어질 뻔 했다고.
-청각을 담당하는 생체기관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현재 문제없이 기능하고 있습니다.
-...내가 말을 말지. 어쨌든 뭔가 오류가 있는 것 같은데 일단 체크만 좀 해봐. 아무거나 건드리지 말고.
-로버의 구조는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본인이 말했듯 에피알게나스님에게 맡기시는 편이 낫습니다.
-그럼 자료 업로드는 실패한 건가?
-데이터는 성공적으로 업로드 되었습니다.
-일단 다행이군.
시스템 AI의 말에 준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버는 현재 준의 제작기술로도 만들 수 없는 물건이었다. AI도 준의 레벨이 상승하면서 함께 그 기능이 업그레이드 되는데 아직까지는 로버를 통제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에피알게나스. 정신파 해석 좀 부탁해. 아까보다는 좀 나을거야.”
“알았어. 잠시만 기다려.”
에피알게나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로버자체는 그녀에게 낯선 기계였지만 그것을 조작하는 방식은 익숙한 형태의 것이었다. 그녀가 능숙하게 콘솔을 조작하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쇳소리가 조금씩 익숙한 언어로 변환되어 들리기 시작했다.
이곳을 떠나라. 싸우고 싶지 않다.
“싸우고 싶지 않다...라.”
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외도에게 있어 인간은 타협불가능한 적이었고, 그 반대의 경우도 그러했다. 헌데 이들은 지금까지의 적대적인 행동과는 달리 준과 싸우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죽일 듯이 덤벼놓고 이제와서 싸우고 싶지 않다고 해봐야. 거절하겠다고 전해.”
“알았어.”
에피알게나스가 로버를 통해 정신파를 발산했다. 그러자 외도들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부산스러워졌다. 녀석들은 당장이라도 로버를 공격할 듯이 적대적인 기운을 뿜어냈다. 하지만 준의 신경을 쓰이게 하는 것은 그런 외도들의 기운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소모되고 있는 경험치였다.
에피알게나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별 대답이 없어. 계속 떠나달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는 중이야.”
“시간을 끌려는 것일 지도 모르겠군.”
어째서 갑자기 공격을 멈추고 대화를 시도하는 것인지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만약 그 의도가 시간을 끌려는 것이라면, 지구라트 안에서 무언가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말려들 필요는 없겠지.”
준은 그렇게 말하며 라이트세이버를 뽑았다. 노란색에 가까운 빛이 검의 형태가 되어 로버의 오른 손에 쥐어졌다.
로버가 다른 병기에 비해 가진 가장 큰 장점은 다름아닌 사용자의 기술을 그대로 구현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 과정에서 대량의 엑조틱 에너지가 소모되고, 그 효율이 일반적인 병기를 사용하는 것에 비해 턱없이 낮긴 하지만 단순 화력만으로 따지자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위력을 뽑아낼 수 있었다.
준이 구현한 라이트세이버는 그대로 로버의 오른손에 쥐어졌고, 로버의 사이즈에 맞추어 크기도 함께 커졌다. 크기만 커진 것이 아니라, 그 위력 역시 준에 손에 들렸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새크리파이스와의 전투에서도 입증되었듯, 중형전함을 일격에 토막 낼 정도의 강력한 절삭력은 외도에게도 어김없이 적용되었고 거의 20미터 이상 늘어난 라이트세이버는 사방에서 달려드는 외도를 단 일격에 참살하기에 충분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촤아아아!
단 일 검에 수십마리의 외도가 두 토막이 났다. 마치 먹이를 향해 달려드는 바퀴떼처럼 새카맣게 외도들이 모여들고 있었지만, 녀석들은 로버의 몸에 닿기도 전에 실드에 막히고 라이트세이버의 썰려나갔다.
그렇게 죽어나간 외도들의 몸속에 있던 결정체들이 로버의 발치에 무수하게 쌓여갔다. 누군가 그 장면을 보았다면 하늘에서 결정체의 비가 쏟아진다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외도들은 무력했고, 준에게 경험치를 제공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크하하하하!]
로버의 시끄러운 웃음소리를 무시하며 준은 검을 휘둘렀다. 이렇다할 검술을 익히지 못한 준이었지만, 라이트세이버는 기술의 부족을 감춰줄 만큼 강력했고 로버는 준의 민첩한 움직임을 그대로 재현해 낼 만큼 뛰어난 로봇이었다.
콰앙!
그렇게 베어넘긴 외도의 숫자가 수백을 넘고 서서히 놈들의 공세가 뜸해지기 시작할때 쯤, 준은 강렬한 폭발음과 함께 둔중한 충격을 느꼈다.
“큭! 이건 뭐야?”
“후방에 다수의 헌터가 있어.”
“뭐라고?”
준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혹시 이곳까지 오는 길에 만난 녀석들인가 했지만 그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델타스피릿이나 파티마제국의 소속 헌터들이 아닌 이상 갤럭시 쪽 헌터들인 것 만큼은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들고 있던 로켓런처에서 발사한 발사체들이 로버가 있는 곳을 향해 떨어졌다.
“젠장.”
콰앙! 쾅! 콰르르!
거의 백여발에 이르는 로켓들이 지구라트의 앞마당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준은 두 팔을 교차한 채 실드를 펼쳤지만 모든 공격을 막지는 못했다.
쿠웅!
“아악!”
로켓런처의 폭발력에 실드가 날아가고 로버가 거칠게 흔들렸다. 에피알게나스의 비명소리가 짧게 터졌다.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좁은 조종석 어딘가에 머리를 부딪힌 듯 피가 흐르고 있었다.
“괜찮아?”
“문제없어.”
그녀는 낮은 신음을 흘리며 상처를 향해 손을 가져다 대었다. 빛이 터지며 순식간에 피가 멎었다. 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신들을 공격한 헌터들을 보았다.
“로켓런처라니. 언제 또 저런 걸 만든거야?”
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엑조틱 웨폰을 만들 정도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는 갤럭시 인더스트리였다. 게다가 알카트뢰즈에서 얻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결정체 폭탄제조기술까지 가지고 있었으니 만들고자 하면 못만들 것도 없었다.
준의 D2전차에 비하면 조악한 물건이었지만 수가 많아지면 그런 단점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실제로 양전자포까지 튕겨내는 로버에 타격을 입힐 정도였으니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이었다.
외도들이 입은 피해도 상당했다. 준을 공격하기 위해 달려들었던 대부분의 외도가 폭발에 휘말려 잿더미로 변했다.
그러자 기세좋게 덤벼들던 외도들도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로버만으로도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서 새롭게 나타난 헌터들을 상대할 수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좋지 않군.”
크로울리의 병력들이 전부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준의 착각이었다. 갤럭시 인더스트리의 병력이 이곳까지 당도한 이상 어느쪽이든 조각을 얻기 위해서는 상대를 제거해야했다. 준은 가급적이면 그들과 분쟁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싸우지 않고 조각만을 가져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