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43 ----------------------------------------------
스파일리 행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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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은 라이트세이버를 역소환하고는 오른팔을 들어 왼팔에 붙어 있는 웜의 머리를 잡아뜯었다. 얼마나 꽉 물고 있었는지 물린 곳이 움푹패여들어가 장갑이 우그러질 정도였다.
‘핵무기에도 파괴되지 않은 장갑이 손상되다니...’
콰직!
준은 바닥에 떨어져 바둥거리는 머리를 발로 밟아 으깨고는 몸통만 남은 웜을 처리하기 위해 움직였다. 다시금 소환된 라이트세이버가 번득이자, 이렇다 할 공격수단이 없던 몸통들이 순식간에 분해되며 수십조각으로 잘려나갔다.
“뒤.”
에피알게나스가 입을 열었다. 두 번째 웜이 기이한 소리를 지르며 입을 쩍 벌리며 달려들었다. 이 대형웜들은 순수한 물리력을 가진 외도. 이렇다할 특수능력이 없는 대신 단 하나 있는 공격능력인 물어뜯기의 힘이 엄청났다.
휘익.
준은 재빨리 땅을 박차며 두 번째 웜의 공격을 회피하고는 라이트세이버에 마나를 밀어넣었다. 순식간에 20미터가량으로 자라난 검이 웜의 머리통을 싹둑, 하고 잘랐다. 제법 강력한 녀석이지만 로버를 타고 휘두르는 라이트세이버의 위력을 감당할 정도는 아니었다. 방어력보다는 생존능력이 강한 타입이었기 때문에 좀 더 수월한 면도 있었다.
휘익!
잘린 머리통이 스스로 움직이더니 로버의 머리통을 물어뜯기 위해 달려들었다. 본능적으로 가장 급소라고 생각되는 머리를 공격하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웜보다는 로버의 움직임이 빨랐다. 준은 상체를 슬쩍 뒤로 젖히며 그대로 오른발을 치켜들었다.
빠아악!
로버가 상체를 뒤로 젖힌 상태에서 오른발로 웜의 머리통을 차올렸다. 약간은 우스꽝스러운 자세였지만 그 위력은 결코 우습지 않았다. 엄청난 높이로 솟아오른 웜의 머리통이 산산이 부서지며 허공에서 흩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덜덜덜.
크로울리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움직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로버와 웜의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마치 현실이 아니라 꿈속에서 일어나는 일 처럼 느껴졌다.
“로... 로버.”
그는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머리속에서 하나의 단어를 끄집어 낼 수 있었다. 델타스피릿의 최종병기라고 불리는, 하지만 인터넷에 떠도는 조작된 영상이라며 치부되었던 로봇의 존재가 그제서야 떠오른 것이다.
그 로봇은 나타나자마자 하나의 웜을 그대로 쪼개더니 순식간에 두 마리째의 웜도 머리를 터뜨려버렸다. 중간에 약간의 피해는 입었을 지만 위기를 겪은 모양새는 아니었다. 자신들이 절대로 이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 두 마리의 파란색 외도를 채 1분도 되지 않은 시간에 참살해버린 것을 보고는 거의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로버는 머리통이 박살 난 채 몸통으로 들이받는 나머지 잔해들을 일일이 빛나는 검으로 해체하고는 발로 짓이겼다. 파란색외도인 만큼 마지막까지 방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녀석이 나타난지 채 5분이 되지 않아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다. 하지만 그 사이 갤럭시 인더스트리에서 입은 피해는 상당했다. 로버와 웜의 전투에 휘말려 수십명의 헌터가 사망했고, 부상자는 수백에 이르렀다.
전멸의 위기에서 살아난 것을 생각하면 투정할 상황은 아니었지만 심각한 피해를 입은 것은 사실이었다.
쿠웅. 쿠웅.
그리고 웜을 모두 해체했다고 생각했는지 로버가 몸을 돌려 천천히 자신들이 있느 곳을 향해 다가왔다.
[여기 책임자가 누구냐?]
방금의 전투여파 때문일까? 머리가 굳어버린 크로울리가 제때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거리자, 다시한번 로버의 입에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말하지 않겠다는 건가?]
“아... 저, 접니다!”
크로울리가 겨우 쥐어짜듯이 목소리를 내자, 로버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그러자 거대한 로봇의 가슴이 반쯤 열리더니, 거기에서 사람 하나가 뛰어내렸다. 상당히 젊은, 아직 앳된 얼굴이 남아있는 청년이었다.
크로울리는 한 눈에 그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델타스피릿의 대표인 준 알스버그였다.
‘젊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정말이지 상상이상이로군.’
그래도 삼십줄에는 들어섰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는 외모였다. 하지만 저 강력한 로버를 움직이는 자가 준 알스버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그가 입을 열었다.
“이름?”
“네?”
“이름이 뭐냐고?”
“크로울리 젠킨스입니다.”
“크로울리 젠킨스라...”
준은 델타시스템을 통해서 크로울리 젠킨스라는 이름을 검색했다. 델타OS를 통해 인터넷을 연동한 것이다. 얼마전에 위성을 쏘아올리며 두 개의 통신망을 연동함으로서 가능해진 방법이었다.
잠시후, 준의 눈앞에 크로울리 젠킨스라는 이름과 관련된 정보가 떠올랐다. 수많은 정보중에서 헌터와 갤럭시 인더스트리 소속이라는 추가정보까지 있으니 어렵지 않게 그에 대한 정보를 찾을 수 있었다.
‘갤럭시 인더스트리 소속의 중급헌터. 딱히 직책은 없지만 대우는 과장급. 근속년수도 높고, 연봉도 10억이 넘는군... 중급헌터가 이정도 대우를 받는다면 나름 핵심인사일 확률도 있겠군.’
거기에 시스템이 추가로 끌어온 정보에는 내부자료인 연봉까지 기재되어 있었다. 아마도 델타시스템이 자체적으로 해킹한 정보까지 끌어오는 듯 했다.
중급헌터라고 해도 10년 이상 근속년수를 가진 인물이다. 이정도 인원을 통솔하는 것도 그렇고 결코 낮은 지위라고 할 수 없었다.
“우리쪽 주둔지에 외도를 몰아넣은 것이 그쪽 생각인가?”
“그건.... 아니, 아닙니다.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갑자기 ‘그 일’을 물어올 줄은 몰랐던 크로울리는 잠시 당황하다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지만, 스스로도 이미 시인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깨달았다.
“제법 귀찮았어. 덕분에 여기에 오는게 늦을 뻔 했지.”
“아닙니다. 저희는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우기는 수밖에 없었다. 크로울리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럴 수록 더욱 수상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뭘 안했다는 건지... 아니. 됐다. 이제와서 그런 걸 캐물어봐야 의미도 없고. 다만 한가지는 확실히 해두도록 하지.”
“무얼 말입니까?”
“공격시도는 외도들이 먼저했고, 나는 선제방어를 하고 있다는 점.”
“무슨...?”
크로울리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준의 말에 눈을 꿈벅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아니, 평소라면 알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방금 전 엄청난 전투를 보고 난 때문인지 머리가 굳은 듯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게다가 갤럭시 인더스트리의 사람들이 피해를 입고 있으니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기업인으로서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않겠어?”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지구라트는 내가 치우도록 하지. 구경이나 하고 있으라는 말이야.”
“그, 그건...”
크로울리는 그제서야 준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스파일리 행성은 파티마제국과 갤럭시 인더스트리가 양분하고 있는 행성. 때문에 갤럭시 쪽의 영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상호간의 협의가 있어야 했다.
하지만 파티마제국쪽에 있던 델타스피릿이 외도의 습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그에 선제방어를 한다는 명분으로 갤럭시 인더스트리의 영역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건 억지입니다.”
“그래. 억지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덕분에 너희들이 목숨을 건졌잖아? 굳이 감사받을 생각은 없으니까 날 방해하지나 말라고. 아참 그리고 이거 가져가고.”
준은 그렇게 말하고는 불에 완전히 타버린 어그로시스템을 하나 꺼내놓았다. 제법 무게가 나가는 물건이지만 준은 마치 공깃돌 처럼 가볍게 던졌다.
쿵.
“이게 뭡니까?”
“아아. 우리회사에서 제작한 기계인데. 우리 숙소 바로 옆에 있는 시추시설에 그게 설치되어 있었던데 말이지. 누가 무슨 의도로 설치했는지는 뻔하지만 굳이 말하진 않을게. 그 안에 보면 일련번호가 있거든. 그거 보니까 갤럭시에 팔아치운 물건이더라고. 개조를 했으니 A/S는 못해주겠고, 그래도 원래 주인에게는 돌려줘야겠다 생각해서.”
“그렇다고 이게 우리쪽에서 나왔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증거?”
준이 표정을 굳인 채 크로울리를 향해 다가가 그의 멱살을 쥐었다. 준에 비해 한 뼘은 더 큰 크로울리가 맥없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내가 증거를 아무리 가져다가 바친들, 너희들이 과연 인정할까?”
“그... 큭.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어찌나 멱살을 강하게 쥐었는지 크로울리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아무리 저항하려고 해도 손발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염동력은 본래 마나를 사용하는 헌터를 상대로는 제대로 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미 완전히 기선을 제압당한 크로울리는 마나를 일으켜 저항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피잉!
텁!
준은 자신의 뒤통수로 날아오는 무언가를 느끼고는 왼손을 뒤로 뻗었다. 그의 손에 잡힌 것은 다름아닌 대형 쇠못이었다. 니들건에 들어가는 탄환과 같은 물건. 준은 크로울리를 바닥에 내던지고는 몸을 돌려 자신을 공격한 이를 바라보았다.
“제기랄. 너무 느려서 써먹지도 못하겠군.”
이브라힘이 투덜거리며 손에 들고 있던 니들건을 버리며 준을 노려보았다. 준은 그를 유심히 살펴보고는 대충 결론을 내렸다.
‘눈빛이나 기세로 봐서는 적어도 중급은 아닌 것 같고. 상급헌터인데 니들건을 사용한 걸로 봐선 원거리 딜러는 아니야. 탱커나 근접딜러겠군.’
실제로 이브라힘은 근접딜러였다. 대형 웜을 잡을 때 원거리에서 능력을 발휘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쇠사슬을 통해서 전류를 방출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전류발현 능력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선 반드시 적과 접촉할 필요가 있었다.
“이건 공격의사로 간주해도 되겠나?”
“시끄러워. 네가 델타스피릿의 대장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 땅은 우리 갤럭시 인더스트리의 영역이다. 여기서까지 네가 마음대로 할 권리는 없어.”
“이것 참. 죽어가는 놈들 살려줬더니 별 소릴 다듣는 군.”
“닥쳐. 도와달라고 한 적 없다.”
“그래. 그런 적 없지. 어쨌든 내 마음대로 끼어든 것이니까. 하지만 그 덕분에 목숨을 건졌으면 그냥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네 놈이 하는 짓이 영 꼴보기 싫어서 말이야.”
이브라힘도 로버의 전투를 눈으로 보았다. 상급헌터들은 대체로 그렇지만, 어느수준 이상에 이르면 자신보다 강한자는 없다는 착각에 빠지곤 한다. 하지만 이브라힘의 경우는 더욱 그러할 수 밖에 없었는데. 갤럭시 인더스트리의 상급헌터 중에서도 수위권에 드는 실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혼자서 파란색 외도인 대형 웜을 제압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실력은 입증된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준 알스버그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다만 운 좋게 로봇을 손에 넣었고 무기가 좋아 웜을 처리했다고 생각 하고 있었다.
“그래서 뭐 어쩌려고?”
준이 손에 쥐고 있던 쇠못을 허공으로 띄우며 입을 열었다. 파직, 하고 가볍게 스파크가 일었다. 이브라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너도 전류발현 능력이 있는 건가?”
“그것만 있을까.”
“재미있군. 상대할 맛이 나겠어.”
“그건 네 생각이지.”
준은 허공에 띄워놓은 쇠못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