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31 ----------------------------------------------
결전
*
*
*
“너는 중요한 인재야. 몸 상태가 어떻든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너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생각하라고.”
“알아. 그정도는.”
“그러면 제대로 이야기 해야할거 아니야.”
“그래서 이야기 했어. 문제없다고.”
계속해서 같은 이야기의 반복이었다. 준은 답답함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 정신을 잃은 건 뭐야!”
“알 필요 없어.”
하얀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그녀는 차가운 태도로 입을 열었다.
“로오나 인은 전부 그런 식인가? 어째서 그렇게 이기적인거지?”
“이기적이라고 생각하기 전에, 내가 왜 말하지 않을까를 먼저 생각해.”
“뭐라고...?”
준은 잠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에피알게나스는 볼일이 끝났으면 가보라는 듯 문밖으로 턱짓을 했다. 준은 가만히 그녀의 맞은 편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래. 단순히 감춘다고만 생각했지 왜 감추는 지를 생각하지 않았어.”
“알면 이제 나가.”
“아니... 그래도 알기 전에는 못나가겠는데.”
“고집이 세네.”
그녀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네 말대로 생각한다 해도, 추측만으로 내가 알 방법은 없는 거니까. 문제가 뭐든지 간에 난 알아야겠어.”
“문제는 없어.”
“그 말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군.”
“걱정할 필요도 없다고 했어.”
“하지만 완전회복능력자인 네가 정신을 잃었다는 걸 그냥 두고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지.”
“당연하지. 이건 아픈 게 아니니까.”
“그럼 대체 뭔데?”
에피알게나스는 대답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은 움찔하며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얼굴 빛은 조금 붉에 달아올라 있었다. 마치 그날, 그녀가 정신을 잃기 전 보았던 그녀의 상태와 비슷했다. 준은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상한 감각이 온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뜨거운 불기둥이 그의 정수리를 파고들어 온몸을 관통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자박. 자박.
에피알게나스는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준을 향해 다가갔다.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어느새 준의 앞에 선 그녀는 투명한 손가락을 뻗어 그의 뺨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공예품이나 다름없는 그녀의 얼굴이 시야 전체에 가득쳤다.
“무슨...”
“내 이름은 나르 에피알게나스 리무야르 아웬드나야.”
“왜 갑자기 통성명을 하는거야?””로오나는 이름에 그 사람의 삶을 각인해.“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완성자고, 구원자이며, 번영하며 생존해. 오리진을 완성할 책임과 이 우주를 구원해야하는 의무가 있어. 그리고 멸망한 종족의 번영과 생존을 이어나가야 해.”
“그건...”
“그때. 내가 정신을 잃었던 것 같아?”
에피알게나스는 조용히 준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는 멍하니 에피알게나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별처럼 반짝였다. 그녀의 작은 입술이 그의 시선을 빼앗았다.
두근.
심장소리가 울려퍼졌다.
츕.
입술과 입술이 닿았다. 뇌수를 타고 전류가 흘렀다.
그걸로 간단히, 준의 이성이 날아갔다.
“흡.”
준은 거칠게 그녀의 입술을 빨아들였다. 정신없이 입술을 탐하고, 그녀의 혀를 빨았다. 집요하고도 탐욕스럽게 그는 그녀의 타액을 갈구했다.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꽉 쥐었다. 한 손은 거칠게 그녀의 머리채를 잡았다.
그 모습은 사랑의 행위가 아닌, 포식 행위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준은 호흡곤란을 느끼며 그녀에게서 입술을 떼었다.
하아. 하아.
준은 거칠게 숨을 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시의 휴식조차도 안타까웠다. 붉은 입술. 피처럼 발간 그 욕망의 근원이 채우지 못한 갈증을 일으켰다.
준은 그녀의 입술을, 하얀 이를, 그녀의 붉은 혀를 핥았다. 농밀하고도 진한 키스가 이어지고 준은 그녀의 어깨에 올렸던 손을 가슴에 올렸다.
“으음...”
바람을 넣은 풍선처럼 탄력적인 가슴이 느껴졌다. 옷 위로는 만족하지 못하겠다는 듯, 그의 손이 거침없이 에피알게나스의 앞섶을 파고 들었다.
‘뜨거워.’
화상을 입는 것은 아닐까 착각할 정도의 열기. 그녀의 살결은 놀랍도록 부드러웠고 그 이상으로 뜨거웠다.
그리고 준이 막, 그녀의 상의를 끌어내리려는 순간. 에피알게나스의 몸이 놀랍도록 차갑게 식었다.
“아...?”
준은 번득 정신을 차렸다.
“자, 잠깐.”
그는 황급히 그녀의 몸에서 손을 떼었다. 에피알게나스는 옷을 추스르고는 몸을 일으켰다. 흐트러진 입가와 머리를 정리하자,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그녀는 처음 그대로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나, 나는 그러니까...”
그는 반사적으로 변명을 하려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절대로 변명으로 해결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처음이 어떻게 시작되었던 것인지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그는 빠져들어 있었다.
‘내가 먼저였나? 아니, 그녀가 먼저였던 것 같은데...’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이미 일어난 사실. 그는 가까스로 쓸데없는 말이 튀어나오는 것을 막고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에피알게나스는 보기 드물게도 미소를 지었다.
“왜 그래? 문제있어?”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해줄 수 있겠어?”
“내가 왜 생명유지장치에 들어있었을까 하는 것의 답이야. 애초부터 나는 알파와 융합된 채 그곳에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나는 이 우주로 온 로오나의 최후의 보험이라고 할 수 있어.”
“설마 너희들은 그 결과를 예측한 거야?”
준은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로오나는 대규모 선단을 이용해 웜홀 통과를 계획했다. 수천대의 함정에 수십만명의 로오나들이 탑승한 채 이 우주로 넘어왔다. 하지만 그 중에서 살아남은 것은 현재까지 에피알게나스 한 명 뿐.
“오리진의 계산으로는 성공확률이 약 12퍼센트였어. 때문에 그들은 실패할 경우를 생각해서 계획을 차선책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지. 만에 하나 실패하더라도, 종족을 이어나갈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한거야.”
“그게 너라는 거야?”
에피알게나스는 대답대신 준에게서 한걸음 물러나며 마치 춤을 추듯 한바퀴 돌았다. 그녀의 하얀 머리칼이 허공에서 별처럼 반짝였다.
그야말로, 미의 화신이었다. 누구라도 지금의 그녀를 보면 반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것이다. 그 누구도 그녀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성을 가장 유혹하기 쉬운 형태로 만들어져있어.”
“만들어져있다니... 설마...?”
그녀도 오리진에 의해서 만들어진 인공지능 로봇인 것인가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아니.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야. 단지 생리학적으로 약간 변형을 거쳤다고 봐야하겠지. 현재 나의 모든 것은 이성을 유혹하기 위해서 만들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그런...”
준은 방금 전 자신이 그녀의 유혹에 너무나도 간단히 넘어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루나의 얼굴이 스치며,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어쩐지 그녀를 배신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자책하지마. 네가 아니라 누구라도 거부할 수 없었을 테니까.”
“그럼, 그때 그건...”
“본능적으로 너를 유혹하려고 했던 것 뿐이야.”
“하지만 그때 나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는데.”
“내가 의식을 끊었으니까.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거든.”
“때?”
“지금은, 로버가 필요하잖아. 내가 일을 저지르면 그 녀석이 나를 태워주려고 하지 않을테니까.”
“어째서 나인지 물어봐도 될까? 굳이 내가 아니라도... 로오나인도 있잖아.”
준은 도른을 떠올렸다. 비록 외도화가 되어있다고는 하나, 그는 원래 로오나 인이었다. 유전적으로 상이한 자신보다는 어쩌면 그쪽이 더 번영에는 어울릴 지도 모른다.
에피알게나스는 풋, 하고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나도 취향이라는 게 있으니까.”
“어?”
준은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그 말인 즉슨, 그녀가 자신을 마음에 들어한다는 소리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너는 오리진의 조각을 품고 있는 상태야. 오리진은 기본적으로 로오나 인의 유전자 정보를 담고 있고. 지금 네 신체는 이미 인간의 유전자와는 많이 상이해져 있는 상태. 오히려 로오나에 가깝다고 할 수 있어.”
“그런건가...?”
준은 자신의 몸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보아도 평소의 자신과 다를 것이 없었다.
“로오나 인이라고 특별하게 다르게 생기지는 않았어.”
“아. 하긴 그렇겠군.”
애초에 그녀 역시 다른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다르나고 느껴질 만큼 압도적인 미모를 지니고 있긴 했지만.
“이정도면 설명은 충분한 것 같아.”
“그나마 몸 상태가 이상한 것은 아니라니 다행이군. 혹시라도 네가 죽게 되면 어떨까 하고 걱정했는데.”
“그게 전부?”
“무슨...”
“방금 있었던 일에 대해서 소감을 듣고 싶어.”
“소, 소감이라니!”
준은 얼굴을 붉히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애써 언급하고 있지 않았는데 그녀가 정곡을 찔러온 것이다.
“그야. 정보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지금은 때가 아니라 이 정도에서 그쳤지만 적당한 시기가 오면 확실히 받아낼 생각이야.”
“뭘 받아낸다는... 아니 됐다. 대답하지마.”
준은 그녀가 무슨 말을 꺼낼지 떠올리고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준은 몇 번의 심문 끝에 마리엘로부터 의외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함대의 상당수가 현재 정비를 위해서 엔터프라이즈 사의 모행성으로 가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무리어미 습격으로 인해서 함대 몇 개가 큰 타격을 입은 모양이더라고. 우주공간에서 요격하려고 했던 모양인데. 외도에게는 전혀 먹히지 않았던 거겠지.”
“헌데 무리어미는 공격능력이 없지 않았습니까?”
“공격을 도로 튕겨낸 모양이야. 반물질 탄을 되돌린 모양이더라고.”
“놈들이 공격을 주저한 이유가 있었군요.”
준이 만난 새크리파이스의 함대는 4전대 뿐. 수라드 행성에도 전함은 있었지만 하나의 함대로 온전히 기동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나마도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당했다.
“다만 남은 게 얼마나 될지는 모른다고 하더군.”
“어차피 얼마나 남았든 가실 생각이셨잖습니까?”
“수라드나 이스카야 행성이 공격받을 가능성이 줄어들게 되는거니, 나로선 반길만한 일이지.”
준은 공간이동을 통해 순식간에 함선 알바트로스를 이동시킬 수 있었다. 일단 공간이동용 웜홀을 만들고 알바트로스를 인벤토리에 넣은 다음, 이동하면 되는 것이다. 다만 거기에도 문제는 있었다.
공간이동 능력은 시그마의 조각으로 이루어지는데, 델타의 종속된 형태로는 하루에 한번밖에 사용할 수 없었다. 즉, 일단 돌아오면 다시 원위치로 가기 위해서는 하루라는 시간이 더 걸리는 것이다.
그리고 공간이동 지점을 설정하기 위한 일종의 세이브 포인트, 그러니까 인근의 행성에 내려야 한다는 불편함도 있었다. 공간이동 웜홀은 한번이라도 가본 장소에만 열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렇게 여러 가지 난점이 있긴 하지만 사실 그리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준이 없을 경우 생길 문제에 비하면 그런 페널티들은 충분히 감수할 만한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삐잉- 삐잉- 삐잉-
그때 플랫폼 전체에 비상신호가 울렸다. 그리고 곧바로 펠로우쉽 통신을 통해 그에게 정보가 전해졌다. 서은설이었다.
-준. 수라드 행성 쪽으로 워프신호가 감지되고 있어. 중력파의 정도로 봐서는 거의 3개 함대급이야.
-알았어. 통제실로 갈테니까 다들 준비시켜.
“습격입니까?”
제임스의 말에 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게도 멀리까지 갈 수고를 덜어주는 군.”
준은 델타스피릿의 제복상의를 집어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