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4 ----------------------------------------------
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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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니...”
준은 막스의 프로필을 살폈다. 그가 10레벨로 오르면서 얻은 새 직업중 하나가 다름아닌 ‘정치가’였다. 직업기술로 두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입법’이고 하나는 ‘웅변’이었다. 입법은 일정규모 이상의 조직에 규칙을 정해 강제성을 발효하도록 하는 기술이었다. 하지만 나머지 하나인 ‘웅변’은 아직 제대로 시연을 해보인 적이 없었다.
“빨리 날짜 잡으라고. 준비도 좀 해야하니까.”
“가능한한 빠른 편이 좋습니다. 아직 대규모 소요사태는 일지 않았지만 여기저기에서 불온한 조짐이 보이고 있으니까요. 그나마 헌터들 사이에서는 델타스피릿의 소문이 좋아서 다행입니다.”
사실 수라드 행성이 아직까지 대규모 패닉상태로 빠져들지 않은 것은 어디까지나 헌터들 덕분이었다. 준이 일전에 ARM기를 보급하며 헌터들에게 30퍼센트 이상의 추가이득을 보게끔 해주었던 것의 영향 때문에 그들은 내심 델타스피릿이 이대로 수라드 행성을 계속해서 장악했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다. 게다가 수라드 행성에는 델타폰도 상당히 퍼져있었다. 심지어 소수이지만 펠로우쉽 멤버도 있었다. 준이 직접 계약을 맺은 이들도 아니었고, 호랑이 길드에게 물어보아도 자신들과는 관련없는 이들이라고 하니 알카트뢰즈에서 흘러들어온 이들과 어떻게 연관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보니 헌터들 사이에서 적극적으로 델타스피릿에 대해서 옹호하는 발언들을 하고 있었다. 사실상 군대를 제외하면 가장 강력한 무력을 지니고 있는 이들이 잠잠하니 일반인들로서는 들고 일어나려고 해도 섣불리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지상에는 여전히 새크리파이스 소속의 군인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그들이 플랫폼으로 올 수 없는 이상, 함대를 이끌고 있는 양주안을 거역하고 폭동을 일으킬 수도 없었고, 그래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게다가 급료마저도 정상지급되고 있으니 오히려 다른 이들보다 더 얌전하게 있는 중이었다. 어차피 조만간 새크리파이스에서 다시 플랫폼의 통제권을 빼앗아 올테니 가만히 기다려보자는 식인 것 같았다.
“플랫폼에 방송시스템 있지? 비상방송으로 돌리고 세시간 있다고 바로 송출 준비해.”
“세시간? 너무 짧잖아.”
막스가 자리에서 펄쩍 뛰며 입을 열었다.
“앞으로 부족해질 물자에 대해서는 굳이 말하지 말고, 문제없으니까 조용히 일상생활을 이어나가라고만 하면 돼. 딱히 뭐 대단한 걸 할필요는 없다고. 지금 수라드 행성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그들의 생활이 안정적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거니까.”
“그게 아니라 스타일링을 할 시간이 부족하잖냐. 생애 첫 방송출연인데.”
“그 소리였냐... 하긴 뭔가 필요하긴 하겠군.”
준은 막스의 험악한 얼굴을 보며 흠, 하고 낮은 숨을 내뱉었다. 아무리 직업이 정치가이고, 웅변스킬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일단 겉으로 보이는 외모가 심각하게 문제가 있었다.
“그러니까 혹시라도 이번 기회에 유명인이 되어서 광고같은 걸 찍을 수도 있지 않겠냐? 잘하면 연예인과 결혼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꿈은 거기까지만 꾸고. 이번 기회에 상처라도 제거하는 건 어때? 에피알게나스에게 부탁하면 될텐데.”
“무슨 소릴. 상처는 남자의 훈장이다.”
막스는 자랑스럽다는 듯 입을 열었다. 준은 그 미적감각에 동의할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고개를 끄덕였다. 취향은 존중받아야 마땅한 것이니까.
“어쨌건 그럼 최대한 빨리 준비를 마치고 와. 네 준비가 끝나는 대로 방송시간을 잡을테니까.”
“그럼 잠시후에 보도록 하자. 그보다 이곳에 메이크업을 해줄 사람이 있어?”
“플랫폼에도 미용사는 있으니까. 찾아보면 그런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
“포로 중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안내해드리지요.”
“그럼 부탁하지.”
막스와 양주안이 준에게 경례를 하고 소장실을 빠져나갔다. 준은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고보니 에피알게나스의 몸이 좋지 않던 것 같던데. 정밀검사를 좀 해봐야 할 것 같아.”
“그런가요. 제가 알기로 그녀의 능력은 완전회복일텐데요.”
“그러니까 심각한 건 아닐까 의심이 된다는 거야.”
알파의 조각은 생명유지시스템과 결합하여 그녀의 몸속에 자리잡았다. 그녀가 가지는 힐링능력은 타인에게 행할때보다도 오히려 자기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는데 더욱 특화되어 있었다. 즉, 어떤 질병이나 상처도 그녀는 순식간에 치유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시지만 정신을 잃었다는 것은 그녀의 회복능력으로도 치유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그녀를 좀먹고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능력으로도 회복이 안되는 것이라면... 우리의 의료기술로 치유가 가능하겠습니까?”
“모르지. 그래도 일단은 뭐라도 해보는 게 낫지 않겠어? 그녀를 잃는 것은 단순히 힐러 한명을 잃는 것과는 달라. 그녀가 가지고 있을 방대한 지식과 경험을 모두 잃어버리게 되는 거라고. 앞으로 뭐가 더 나타날지도 모르는데.”
“혹시 모르니 외도에 대한 정보를 문서로 만들어 달라고 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그건 나중에. 지금 부탁했다가는 이상한 오해를 받을 수 있으니까.”
“그렇다해도 만약 그녀의 상태가 정말로 위중하다면 시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건... 어쩔 수 없겠지.”
만에 하나, 정말로 그녀의 상세가 위중하여 손쓸 수 없는 상황이라면 제임스의 말대로 그녀의 지식을 모두 문서화 하여 남기는 것이 옳은 일이다. 하지만 죽어가는 사람에게 그런 일을 부탁한다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를 생각해보면 선뜻 그런 일을 부탁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필요하기도 하고... 젠장. 사람이 아프다는데 이런 생각이나 하고 앉았으니.’
준은 고개를 저으며 쓸데없는 생각들을 지웠다. 아직 그녀의 상태가 어떤지 확실히 알지도 못하면서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잠시후 나타난 막스의 모습을 보며 준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메이크업을 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험악한 인상을 모두 가리기에는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혹시나 싶어 카메라테스트를 해보았지만 아무래도 초고화질 영상으로 전송하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괜찮을까?”
“보정이 가능하니 문제없습니다. 수염이나 머리도 깨끗이 정리했고, 상처는 가릴 수 있습니다.”
준이 입을 열자, 제임스가 대답했다.
“뭐, 그렇다면 괜찮겠지. 그럼 준비마치면 바로 방송시작해.”
“구경이라도 하시겠습니까?”
“그럴 생각이야. 뭐라고 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이미 막스가 직접써온 대본을 읽어본 준이었다. 내용상 문제는 전혀 없었다. 준도 막스의 언변은 어느정도 인정하고 있었다. 평소 이미지가 좋지 않아서 그렇지 능력을 발휘할때는 제대로 하는 녀석이었다.
“와와. 막스 오빠 방송 데뷔하는 거에요?”
“하핫. 미리 사인이라도 해줄까?”
“꺄앗! 영광이에욧!”
서은설이 호들갑을 떨면서 종이와 펜을 내밀었고, 막스가 껄껄웃으며 사인을 휘갈겼다.
"나참. 대체 뭐하는 잣이야?“
스튜디오에서 빠져나와 준의 옆에 앉은 서은설을 향해 준이 입을 열었다.
“한창 들떠있는데 어때? 기분 좀 맞춰 주는게 뭐 어렵다고.”
“뭐, 그거야 그렇지. 그래도 나는 그런 짓은 못하겠다.”
준은 피식하고 웃음을 흘렸다. 서은설의 밝은 성격덕분에 델타스피릿의 분위기가 좋아진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녀의 진짜 능력은 마법사 쪽보다는 저 친화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렘 한복판에 떨어뜨려 놓아도 그 쪽 사람들과 모두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을 정도였다.
“아. 시작한다.”
서은설이 인벤토리에서 팝콘을 꺼내들고는 씹기 시작했다. 그녀도 최근 5레벨을 돌파해 인벤토리를 승인해준 상태였다. 그녀는 그안에 온갖 잡동사니를 넣어두고 다녔는데 그 중 상당수기 화장품과 먹을 것들로 채워져 있었다.
“하루종일 그렇게 먹으면서 살이 안찌는 거 보면 신기하다니까.”
준이 입을 열자 서은설이 방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다 네 덕분이지. 펠로우쉽 이거 말이야. 정말 대박이라니까. 아무리 먹어도 살이 안쪄.”
“그런 기능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상처를 회복하고 신체 능력을 전성기로 끌어올리는 정도의 효과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지금 그녀가 말하는 것은 금시초문이었다.
“나도 처음엔 몰랐는데 나중에 델타포럼에 누가 글을 올렸더라니까. 자기가 원래 엄청 뚱뚱했는데 펠로우쉽 계약을 맺은 이후로 차츰 살이 빠지더지 날씬해졌다고 하더라고. 그걸 보고 나도 시험해보기로 한거지.”
“그럼 인벤토리에 과자나 음료가 잔뜩 들어있던게 다 그거 시험해보려고 그런거였냐?”
“겸사겸사. 원래 먹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그런데 잠깐. 너 지금 나의 인벤토리를 훔쳐봤다는 거야?”
서은설이 깜짝 놀라며 준을 돌아 보았다. 준은 찔끔하며 입을 열었다.
“아. 그, 그게 말이지. 훔쳐봤다기 보다는 조금 궁금해서...”
“그게 왜 궁금한데? 내가 거기에 뭘 넣고 다니는게 왜 그렇게 궁금한데? 혹시 내가 뭐 이상한 거라도 넣고 다녔을 까봐 그런거야? 아니면 나에대해서 궁금한거라도 있었던거야?”
“궁금하기보다는...”
준은 자신에게 슬금슬금 몸을 밀착하는 서은설을 피해 상체를 젖혔다.
턱.
서은설이 준의 허리를 잡아채고는 휙 당기며 속삭였다.
“물어보면 가르쳐 줬을텐데.”
“너 임마... 그런거 아니라니까.”
준은 그녀를 슬쩍 밀치고는 고개를 돌렸다. 서은설은 칫, 하고 혀를 한번 차더니 다시 스튜디오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막, 방송이 시작되고 있었다. 막스는 포마드를 발라 잘 빗어넘긴 머리를 하고 약간은 긴장된 얼굴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수고했어요.”
“첫 방송의 소감은?”
서은설과 준이 막 스튜디오를 빠져나오는 막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는 손수건을 들어 이마를 훔치고는 입을 열었다.
“뭐가 뭔지도 모르겠던데. 사람을 보고 말하는게 아니라 카메라를 보고 말하는 거다보니 반응도 모르겠고. 원래 상대방을 보면서 말을 해야 뭔가 나도 신이나서 이야기를 할텐데.”
그는 뭔가 불만족스러운 듯 했다.
“그런 것 치고는 잘하던데.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손깍지를 끼면서 상체를 내밀때는 순간 흠칫했다니까. 마치 말을 듣지 않으면 전부 죽여버릴 거라는 걸 암시하는 것 같았어.”
“끙. 그렇게 무섭게 보였냐?”
“살기 같은게 느껴지던데.”
준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사실 이번 방송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녹화방송이라 재촬영을 하거나 아니만 편집의 힘으로 어떻게든 할 테지만, 원본만 놓고 보면 동네 양아치들이 ‘우리는 나쁜사람 아니에요~’하는 것과 별다를바 없는 태도였다.
하지만 또 묘한 것이 그의 말에는 은근히 설득력이 있었다. 텍스트로만 볼때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진실됨이 있었다. 막스에게 가져다 붙이기에는 다소 민망한 단어였지만 그것 외에 다른 말로 설명하기가 힘들었다.
어쩌면 그것이 '웅변'스킬의 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끙. 그래도 들을만은 했지?”
막스의 말에 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그거면 됐어. 연예인 할 것도 아니고.”
“아까랑 말이 다른데.”
“연예인을 만나고 싶다고 했지. 연예인이 되겠다고는 안했는데.”
“꿈도 크시구만.”
준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애써 감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