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1 ----------------------------------------------
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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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그다지 인식하지 못했었지만, 의외로 내부는 상당히 깔끔한 편이었다. 복잡한 기계장치나 선 등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티타늄 케이스 안쪽으로 잘 숨겨져 있었고 탑승석 내부는 한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좌석과 그 사람이 로버를 조작하기 위한 콘솔정도였다.
흉갑이 닫히고 정상적으로 로버가 동작하면 탑승자에게 시각정보를 신경을 통해 전해주기 때문에 외부시야는 문제가 없었다.
거기에 로버의 장점이라면 사각이 없다는 것 정도였다. 애초에 인간이 아닌 로봇이다 보니, 동체 곳곳에 카메라가 달려있었고 탑승자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서도 가만히 앉아 360도 방향의 모든 시각정보를 인식할 수 있었다.
최초에는 이 감각이 어색한지라 적응하는데 시간이 꽤 걸리겠지만 어느정도 익숙해지면 오히려 편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웃차.”
준은 열린 로버의 탑승석 안으로 들어섰다. 안쪽 구조는 눈으로 볼 수 없어 알 수 없었지만 공간 자체를 넓히는 것은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겉으로 보기에 가슴을 좀 더 앞으로 툭 튀어나오게 만들기만 하면 되었다.
[대체 뭘 하려는 거냐?]
“말하자면 가슴확대수술...이랄까?”
[나는 내 가슴에 딱히 불만은 없다만.]
“내가 불만이야.”
[가슴이 큰 쪽이 취향인건가?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뭔가 대화가 점점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는 기분이지만. 어쨌든 반대하지 않는다니까 다행이군.”
의외로 로버는 순순히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준은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개조 당사자에게 이유정도는 알려야 했다.
“에피알게나스 혼자서는 너를 조종할 수가 없잖아. 나까지 두 명이 타려면 탑승석을 좀 늘려야 하고, 그러려면 이쪽의 부피가 좀 커질 수밖에 없겠지.”
[일단 왜 네가 타려는 건데? 더러운 남자를 태울 생각은 없는데?]
“10초만 움직이고 말거냐?”
[으음...]
“아니 그전에. 꼭 그 ‘조건’이 맞아야 하는건가?”
[나에게 조건은 꼭 필요한 거다. 까다롭지 않은 녀석도 있긴 한 것 같지만. 나로선 조건이 맞질 않으면 움직이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아.]
“그게 절대적인 거냐는 거지. 예를 들어 조건에 맞는 탑승자가 없고, 내가 조종하지 않으면 파괴될 위험에 빠져있다고 해도?”
[꼭 그렇다면야 안 될 건 없겠지. 기본적으로 기동에 문제는 없으니까.]
“그러면 굳이 그녀가 필요없다는 거잖아.”
[그걸 그런식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하지. 그건 그야말로 죽기 싫어서 하는 행동이니까. 목에 칼을 들이밀고 똥을 먹으라고 하면 안먹을거냐?]
“끙... 사람을 똥취급 하는거냐?”
[말이 그렇다는 이야기지.]
“어쨌거나. 그녀가 있으면 좀 저항감이 덜한 것 같으니까. 두 사람이 탈 수 있도록 개조하려는 거야. 에피알게나스 혼자서는 긴 시간 기동할 수 없으니까. 어쨌든 병기이니 만큼 제대로 능력을 발휘해 볼 생각은 있겠지?”
[아아. 그런거라면 맡기지. 네 말대로 태어난 이상 남들처럼 제대로 움직이고 싶은 생각은 있으니까.]
“음? 한번도 전투에 참여한 적이 없는건가?”
[사정이 있었다. 굳이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궁금하다면 말해줄 수도 있다.]
“아니. 별로 안궁금한데.”
[어째서 나 같은 뛰어난 전투병기가 전투에 투입되지 못했는지 궁금하지 않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로버는 어쩐지 쓸쓸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준은 별로 궁금하지 않았지만, 로버가 자꾸만 물어보길 바라는 눈치였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질문을 던졌다.
“알았어. 왜 그런 곳에 처박혀 있었던 건데?”
[때는 아주 오래전으로 돌아간다. 로오나가 몬스터에게 승기를 빼앗기고 점점 쇠락하고 있을 무렵이었지. 그때는 생산기지도 상당수 점거되어 생산병력 자체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던 시점이었다.]
“흐음. 그래서? 망해가는 종족의 최후의 결전병기, 뭐 이런건가?”
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단숨에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는 병기가 필요했지. 그래서 태어난 것이 바로 나와 같은 로버다.]
“하나만 있는 건 아니라는 소리군.”
그 점은 에피알게나스에게서도 이미 들은 이야기였다. 최후의 결전시기, 로버는 수만대 이상이 활약했다.
익히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외도는 그 힘에 비례해 크기가 커진다. 파란색 외도만 해도 크기가 최소 20미터를 넘어간다. 인간형 외도였단 시어도어 대령같은 특이 개체가 있긴 했지만 그는 예외에 들어가는 경우였다.
어쨌거나 만약 파란색 이상의 외도가 나타난다면 그 크기가 수백미터에서 수킬로미터까지 가는 경우도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런 녀석을 단순히 사람의 힘으로 물리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물론 그 경우 검이나 활같은 무기로는 상대가 안되는 만큼, 함포레벨의 병기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운용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고, 그를 대체하기 위해서 로버가 필요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로버는 순조롭게 생산되었고, 몬스터와의 싸움도 조금은 비등하게 가져갈 수 있었지. 하지만 그들은 더욱 강해졌고, 로버도 더욱 강한개체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타나게 된 것이 바로 최후의 결전병기라고 할 수 있는 이 몸이다.]
“그렇군. 잘 알았다. 그럼 개조해도 되는거지?”
[감탄하지 않는거냐? 우러러보지 않아도 되는거냐?]
“자기자랑은 그쯤에서 됐어.”
뭔가 대단한 이야기라도 나올줄 알았건만, 결론이 자기자랑으로 흘러가자 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동출력의 로버 10기를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 최첨단 소재를 사용해서 파괴된 부위의 자가수복도 가능하며, 감마선 폭발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의 내구력을 지니고 있다.]
“네네. 알겠습니다.”
준은 그렇게 말하며 머릿속에서 설계도를 고쳐나갔다. 감마선 폭발은 우주레벨에서 나타나는 가장 강력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현상이다. 그걸 맞고 멀쩡할 수 있다는 걸 믿어줄 리가 없었다.
막말로 한번 일어나면 우주의 끝에서 끝까지 닿을 정도의 에너지를 분출하는데, 그정도면 신소재고 뭐고 양자레벨로 분해되어 사라지는 것이 수순이었다.
‘뻥도 정도껏 쳐야 믿어주지.’
준은 로버가 떠는 말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개조준비를 해나갔다.
[안듣는거냐? 안듣는거지?]
“그럴 리가. 다 듣고 있어.”
[솔직히 감마선폭발은 거짓말이다.]
“아아. 역시 대단하군.”
[역시 안듣고 있잖아!]
“시끄러우니까 소리지르지마. 여기 방음 생각보다 잘 안된다고.”
준은 쩌렁쩌렁 울리는 로버의 목소리에 귀를 틀어막으며 인상을 썼다. 아니나 다를까 로버의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거대로봇이라는 점 때문에 나름 이목을 끄는 모양이었다.
개조라는 게 아무리 제작스킬을 사용한다고 해도 단시간에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로버의 기술력 자체를 자신이 따라갈 수 없다보니 준이 손댈 수 있는 부분도 상당히 한정적이었다.
-현재의 제작레벨로는 로버의 소재를 추가할 수 없습니다. 개조에 실패합니다.
“끙.”
준은 실패 메시지를 들으며 한숨을 쉬었다. 간단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생각보다 난관이 컸다. 두 사람이 탈 수 있도록 탑승석을 개조하려고 하자, 필연적으로 흉갑의 크기가 커져야 했고 그러다보니 엑조틱 에너지만으로 초초하르듐 소재를 만들어내야 하는 난제가 있었다. 하지만 현재의 기술레벨로는 그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준은 문득 스치는 생각에 질문을 던졌다.
-잠깐. 그러면 제작레벨이 상급 말고 그위에 더 있다는 거야?
-그것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전에는 잘만 이야기 해주더니.
-그 이상의 정보는 공개불가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아니. 뭐, 됐어. 그정도만 해도 알 수 있으니까.
사실 시스템에 물어본 것은 그저 확인차였다. ‘현재’의 기술레벨로는 지금 로버의 소재를 생산할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을 때 이미 확신할 수 있었다.
‘상급보다 더 등급을 올릴 수 있어.’
꽤나 오랫동안 준은 상급이 제작등급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도 그럴 것이, 상급제작등급의 설명은 ‘현존하는’모든 기술의 재현이었고, 그것만으로도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에피알게나스가 나타나고 델타의 실체가 어느정도 드러난 지금 준의 생각은 당연히 그 다음으로 뻗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로버를 생산할 정도로 고도의 기술력을 발휘했던 오리진이, 비록 조각의 일부라고는 하나 델타의 제작능력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리 없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현 등급보다 한 단계 더 높아지면 어쩌면 로오나의 기술력으로만 만들 수 있는 물품을 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렇다면 골치아프게 이녀석을 설득할 필요도없어.’
개성이 강한 이 녀석을 움직이는데는 생각보다 많은 품이든다. 에피알게나스가 반드시 필요했고 말이 많다보니 대하는 것 자체기 피곤했다. 하지만 등급을 올려 로버를 제작할 수 있게 되면 굳이 이녀석에게 목맬이유가 없이 다른 녀석을 만들어 타고다니면 그만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로오나의 기술은 외도를 상대할 수 있는 로봇을 제작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외도를 상대할 수 있는 것은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인간만이 가능하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준이 엑조틱에너지를 사용하는 로봇을 만들면 더 이상 헌터들이 목숨을 잃어가며 전투를 치르지 않아도 되었다.
‘헌터들이 전부 나를 죽이려고 달려들지도 모르겠군.’
물론 의도야 좋을 수 있지만, 만약 정말로 그렇게 되면 졸지에 실업자 신세가 될 헌터들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단체로 준을 죽이려고 달려들지도 모를 일이다.
‘뭐, 그거야 적당히 조절하면 되겠지.’
어차피 우주는 넓고 외도는 많다. 준이 적당히 그들의 생존권을 보장해주면서 델타스피릿의 이득을 챙기는 방향으로 결정체 생산을 조절하는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그것도 기술을 손에 넣고 난 이후의 이야기였다. 지금으로선 아직 꿈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현재 레벨로는 안되는 것 같고 말이지.’
현재 제작을 위한 기술인 ‘엔지니어링’의 숙련도는 애저녁에 99퍼센트를 찍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1퍼센트가 부족해 레벨이 오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즉, 그 이야기는 준의 레벨이 상급 이상으로 제작등급을 올릴 정도로 높지 않다는 뜻이었다.
-상급이상으로 등급을 올리기 위해서는 몇레벨이어야 되는거야?
-답변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끙. 요새 엄청 불친절하네.
준은 고개를 저었다. 어느순간부터 시스템이 불친절한 고객센터를 상대하는 것처럼 제대로 이야기 해주는 것이 없었다. 아무래도 일정레벨 이상의 질문은 답하지 않도록 정해져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까지는 레벨이 낮아 쉽게 답해주었던 것으로 생각되었다.
‘추세로 봐서는 20레벨이 되면 오를 것 같긴한데...’
현재 레벨은 18. 조각을 얻은 뒤로 순식간에 레벨업을 하는 바람에 찍은 숫자였다. 다음레벨에 필요한 경험치가 대략 1천~2천만 사이라는 것을 감안해보면 올리기 어려운 정도는 아니었다. 당장 지금만해도 거의 1천만에 가까운 숫자의 경험치가 쌓여있었다. 그동안 잡은 외도도 외도였지만 그보다는 꾸준히 들어오는 펠로우쉽과 델타폰의 수입때문이었다.
‘거기다가 결정체까지 하면 2천만은 금방 찍을 것 같긴한데...’
이스카야행성에서 긁어모은 결정체의 수까지 하면 1천만은 훌쩍 넘어간다. 하지만 기껏 모은 결정체를 경험치로 돌리기에는 아무래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처럼만 해도 한달 안에 1레벨은 더 찍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20레벨까지는 몇 달 걸리겠지만... 당장 급한 건 아니니까.’
연합내의 다수 기업에게 척을 진 상황이긴 하지만 위기에 빠졌다고 하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있었다. 직접적으로 트러블이 있는 곳은 새크리파이스 뿐이고 그들만 정리하면 나머지와의 관계는 알아서 회복될 것이다.
당장 갤럭시 인더스트리와의 우호관계는 지속되고 있는 만큼 그쪽에서 여론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새크리파이스가 워낙 강경하게 움직이고 있지만, 준이 그들을 격파하고 그 세력을 흡수해버리면 그들도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