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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척행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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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 비엔나(Vienna).
준이 나고 자란 곳이다. 행성은 비교적 어둡고 침침하며 대기의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은 편이었다. 일년 내내 비가 내리고 태양은 거의 비춰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온실효과 때문에 온도는 높은, 그러니까 사람이 살기 불가능한 곳은 아니었지만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꽤나 불편함을 느껴야만 하는 곳이었다.
새크리파이스의 영향력 하에 있는 행성으로, 인구의 대부분이 1차산업에 종사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만 나는 습지식물을 재배해서 수출하는 것으로 경제가 돌아가는 데, 그 정체는 다름아닌 향정신성의약품, 즉 마약을 제조하는데 사용되었다.
준은 아버지가 헌터다 보니 그 일을 한 적은 없었다. 준도 유난히 비상한 머리 때문에 대부분 공부와는 담을 쌓은 또래 아이들과는 쉽게 어울릴 수가 없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어릴때부터 마약제조에 뛰어들었고, 개중 질이 좋지 않은 이들은 직접 제조한 마약을 사용하기도 했다.
준이 그런 이들에게 말려들지 않은 이유는 빠른 월반 덕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같은 학년이라 해도 나이차이가 심하게 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의 성적이 좋으니 오히려 준을 더 멀리 것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갈 때 즈음에는 아예 서로 없는 사람 취급을 했다고 봐야했다.
그렇다보니 준에게는 학창시절의 추억 같은 것은 거의 없었다. 관심이 있는 것은 공학이었고, 집에서 하루종일 아버지의 차량 엔진을 만지작 거리는 것이 일이었다.
준은 엘라를 향해 입을 열었다.
“비가 많이 오고, 항상 어두운 곳이었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항상 표정이 어두웠지.”
“별로네.”
“알파시티가 훨씬 좋지.”
준은 창을 통해 비쳐지는 이스카야 행성을 보며 입을 열었다. 우연히 플랫폼을 구입하게 되고, 행성을 개척하는 일을 하면서 준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을 했다. 건물을 짓고, 상하수도를 건설하고, 배수관을 파면서도 그다지 힘들거나 지루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자신이 꿈꾸던 일이기도 했다. 어둡고 칙칙한 행성이 아니라, 밝고 따뜻한 행성에서 살고 싶었던 어린시절의 자신이 떠오른 것이다.
준은 자신의 어린 딸이 자신과 같은 환경에서 자라지 않음을 진심으로 감사했다.
다음날. 준은 새 행성 ‘글리제 d'를 향해 알바트로스를 출진시켰다. 항성 글리제의 행성인 글리제 d는 미개척행성인 만큼 아직 이렇다 할 이름이 붙여져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준은 그 행성의 이름을 ‘엘라’라고 붙이기로 마음먹었다. 진짜 엘라는 지금 준의 무릎위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루나의 허락을 얻어 신 행성까지 그녀와 함께 다녀오기로 한 것이다. 준은 그녀의 검은 머리를 쓸어내리며 워프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약간의 흔들림과 함께 공간이 급속히 뒤로 밀려나며 별빛이 빠르게 스쳐가기 시작했다.
“와아... 별이 쏟아져.”
무엇이든 처음 경험하는 엘라의 눈에는 모든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준은 귀엽다는 듯, 그녀를 안고서는 워프의 기동원리에 대해서 일일이 설명해 주었다. 별다른 기대를 한 것은 아니지만 의외로 그녀는 대략의 원리를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확실히 머리 하나는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와는 확실히 다르군.”
엘라의 머리위에 앉아 있던 시미의 머리를 툭 건드리며 준이 입을 열었다. 멍때리고 있던 시미가 화들짝 놀라며 입을 열었다.
“뭐에요?”
“공부 좀 하라고. 엘라에게 따라잡히면 부끄럽지 않겠어?”
“상관없어요오. 시미는 외도니까. 외도의 본분에 충실하면 돼요.”
“아니.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만.”
외도의 본분이라 하면 일단 인간을 사냥하는 것이다. 준은 잠깐이지만 인간을 사냥하는 시미를 상상해보고는 웃음을 흘렸다. 만약 그녀에게 사냥당하는 인간이 있다면 그 녀석은 분명히 로리콘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개척행성 ‘엘라’까지는 알바트로스의 속력으로 약 열흘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준은 그 사이를 그냥 낭비할 생각은 없었다.
일단 던전안의 상태는 생각보다 순조롭게 돌아가고 있었다. 얼마 후면 바깥으로 나올 수 있다는 생각때문인지 사고를 일으키지 않으려 애쓰는 티가 보였다. 가장 걱정된 것은 샬롯과 멜기오스 였는데 그들은 던전핵이 있던 방에서 꼼짝하지 않고 두 사람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준은 엘라를 서은설에게 맡기고는 함선의 투기장을 찾았다. 그곳에는 많은 병사들이 훈련을 하며 몸을 단련하고 있었다. 이미 무리어미를 퇴치하며 상당히 레벨업을 한 상태였기 때문에 상당수가 9레벨에 도달해 있었고, 일부는 10레벨을 찍은 이도 있었다. 10레벨과 9레벨은 상당한 차이가 났는데 일단 체력과 마나가 크게 상승하고, 기술 숙련도의 상승속도도 빨랐다. 거기다가 새 직업을 하나 선택할 수 있게 되면서 전사와 마법사를 병행한다던가 하는 일도 가능하게 되었다.
거기다가 펠로우쉽의 TO도 늘어났다. 지금까지 5명이었던 펠로우쉽 계약자를 10명까지 늘릴 수 있는 것이다.
이래저래 레벨업이 주는 효용이 크다보니 준도 그들의 실력을 끌어올릴 생각이었다.
“무슨 일이야? 최근에는 투기장 안오더니.”
막스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 어지간해서는 준과 상대가 안되다보니 대부분 그와의 대련을 피했고, 그러다 보니 준도 점점 발길이 뜸해진 상태였다.
“던전을 하나 열 생각이야.”
“이곳에서?”
“응. 훈련도 좋지만 일단 경험치를 얻을 수 있는 실전을 거치면 확실히 더 강해지지 않겠어?”
“그야 나도 좋지만. 그거 한번에 10만씩 들어가는 거잖아.”
“그러니까 일종의 경험치 분배 같은거지.”
“호오. 공짜인가?”
“돈 받을까?”
준이 슬쩍 운을 띄우자 막스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10만의 경험치면 돈으로 환산할 경우 100억의 가치가 있었다. 그런 돈을 일개 월급장이가 지급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저번에 무리어미를 퇴치하면서 쌓인 경험치가 꽤 되는 편이야.”
“위험하지는 않을까?”
“위험하겠지. 아무리 내가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실전인데. 던전핵을 장악하기 전에는 죽으면 끝이니까 조심하라고.”
던전의 경우 준에게 귀속되기 전까지는 일반 던전과 다를바가 없었다. 때문에 지금 준에게 귀속된 던전처럼 죽었다고 살아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뭐, 지금 이곳에 있는 녀석들 중에서 그렇게 쉽게 당할놈은 없을거다. 그건 내가 보장하지.”
“좋아. 그럼 준비하고 있어.”
현재 업무에 들어가 있는 이들을 제외하고 약 스무명 정도가 모였다. 오늘 오지 못한 이들은 나중에 우선적으로 배정해 불만이 없도록 할 생각이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공간.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그곳에서 은백색의 모노리스(Monolith:사각형의 돌기둥) 하나가 툭 떠올랐다. 모노리스의 겉면에는 ‘SACRIFICE'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차례대로 하나 둘씩 같은 형태의 모노리스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완벽한 구의 형태로 서로를 마주보도록 생겨난 모노리스의 숫자는 100개. 하나하나가 연합 100대기업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완전히 로딩이 끝나자 모노리스가 차츰 사람의 모습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100인회의 일원으로 각 기업에서 파견한 정치인들이었다. 각 인물들은 기업명으로 통일되며 개인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았다.
[안건은?]
테서렉트 공간의 의장이 입을 열었다. 그는 갤럭시 인더스트리의 사람으로 이곳에서 가장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존재였다.
현재 이들이 있는 곳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4차원 테서렉트 공간. 직접적으로 만날 수 없는 연합조직원들의 의사소통을 활발하게 하기 위해 막대한 예산을 들여 완성한 가상의 공간이었다.
이곳은 바깥과 완전히 고립되어 어떤 간섭도 불가능했으며, 통신감청이나, 해킹으로 인한 정보의 유출도 불가능했다. 그 어떤 장비도 가지고 들어갈 수 없기에 오로지 이곳에서는 대화로만 모든 결정이 이루어졌고 그것은 어떤 데이터베이스에서도 저장되지 않았다.
때문에 연합의 가장 중요한 안건은 바로 이 테서렉트 공간에서 결정이 내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만큼 중요한 일이 아니면 자주 소환되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델타스피릿에 대한 문제입니다.]
새크리파이스가 입을 열었다.
[얼마전에 전투를 벌였다고 들었네. 결과가 좋지 않았나보군.]
갤럭시 인더스트리의 말에 새크리파이스의 표정이 굳었다.
[그들과 손을 잡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말하지만 그들은 위험합니다. 연합의 새로운 위협이 될 수 있습니다.]
[신생기업 하나가 그리도 두려운가?]
[전투정보 로그를 전송하겠습니다.]
새크리파이스가 두말없이 이스카야 해역에서 일어난 전투 정보를 모두에게 전송했다. 새크리파이스가 크게 당했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 자세한 전투경과를 모르던 이들은 전투데이터를 보고는 모두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것이 사실인가? 어떤 무기도 통하지 않는 장갑이라고?]
세키부네가 입을 열었다. 세키부네는 도박으로 일어선 기업으로 이름만 대면 알만한 카지노등을 엄청나게 소유하고 있는 기업이었다. 물론 음지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설도박장과 그를 통한 고리 사채를 통해서도 막대한 이익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반물질 탄도, 수폭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에게 위협이 될 거라는 이야기는 억측이 아닌가. 오히려 내가 알기로는 그쪽에서 먼저 공격을 한 것으로 아는데.]
엔터프라이즈가 입을 열었다. 그들은 군수산업체로 최근들어 갤럭시 인더스트리의 세력 확장에 경계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은 공격적으로 레이드 산업에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현재 결정체 가격도 시세의 30퍼센트 이상 가격을 쳐주면서 쓸어담고 있지요.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연합 전체에서 결정체 생산가가 영향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그건 문제가 없다.]
갤럭시 인더스트리가 말을 이었다.
[그들이 결정체 매입을 하는 것은 사실이나, 판매가 전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그런 식이라면 조만간 가진 자금이 떨어지겠지. 겨우 돈 몇푼으로 결정체 가격이 좌지우지되기는 힘들지.]
[그렇지만...]
[그보다 문제는 그 정체모를 함선이군. 어떤 무기도 통하지 않는다면 사실상 그들을 견제할 방법이 없는 것 아닌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선제방어 개념으로 그들을 타격했으니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는 포로교환 협상도 거부했습니다.]
[징징대는 소리 좀 하지말지.]
세키부네가 손사래를 치며 입을 열었다. 둘 다 연방시절의 일본계 기업에서 갈라져 나온 이들이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편이었다.
[뭐라고?]
새크리파이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세키부네는 팔짱을 끼고 느긋한 태도를 취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원하는 바가 무엇이지?]
갤럭시 인더스트리에서 입을 열자 새크리파이스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입을 열었다.
[확인해보니 델타스피릿은 파티마제국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그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엔터프라이즈가 입을 열었다. 그들 역시 연합에서 사업을 하고는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연방출신이었다. 본사 역시 연방에 위치하고 있었다.
[최근 연합과 파티마제국 사이에 마찰이 좀 있지 않습니까? 통상금지를 걸어 그들을 고립시키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결정체 매입과 정체를 알 수 없는 함선하나를 가지고 있다고 말인가?]
갤럭시 인더스트리가 말도 안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갤럭시 입장에서는 아직 델타스피릿이 이용가치가 있었다. 무턱대고 그들을 잘라낸다고 해도 이쪽에서는 이득될 일이 없었다. 차라리 새크리파이스를 버리는 쪽이 더 이득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을 겁박한다면 그 기술을 얻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 같은 상황에서 반물질탄을 막아낼 수 있는 기술이 있는 기업은 상당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흐음...]
확실히 그 제안은 달콤했다. 하지만 갤럭시 입장에서는 탐탁치 않은 내용이기도 했다. 현재 델타스피릿과 밀접하게 연관을 맺고 있는 곳은 자신들이 유일했다. 시간과 돈을 충분히 들여 그들의 기술을 얻어낼 수 있다면 다른 기업들을 압도적으로 앞서나갈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경쟁사인 파인애플사를 몰락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굳이 델타를 고립시켜 그들의 기술을 다른 이들과 공유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백인회의 나머지 기업들은 생각이 다른 듯 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엔터프라이즈가 입을 열었다. 군수산업체인 그들은 우주선 생산에 가장 열을 올리고 있는 기업중 하나였다. 만약 반물질 탄을 튕겨낼 수 있는 장갑기술을 손에 넣는다면 가장 큰 이득을 볼 것으로 예상되는 이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들을 제외하고서도 하나 둘씩 찬성의견을 내는 이들이 늘었다.
갤럭시 인더스트리 입장에서는 싫어도 동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들의 세력이 가장 크다고는 해도 이 백인회 안에서는 단 한표의 의결권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골치아프게 됐군.’
통상금지가 발효되면 델타는 외부에서 그 어떤 매매행위를 할 수가 없다. 아주 간단히 말해 밀이나 쌀과 같은 기본 식량조차도 조달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파티마제국으로 돌아가던가, 아니면 항복을 하고 자신들의 기술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연합의 전 기업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수도 없으니, 결국 외통수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