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젝트 델타-296화 (296/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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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버스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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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리고 그 순간 준은 염동력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어째서인지 지금까지 제대로 발동하지 않았던 염동력이 본능이 이성을 압도하려는 순간 돌아온 것이다.

“준님?”

준은 그 찰나의 순간에 서은설의 몸을 자신에게서 떼어놓아 침대로 던져버렸다. 약간은 거칠었지만 제대로 힘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녀의 기분까지 배려해 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후우...”

준은 가까스로 그녀에게서 벗어나고는 질끈 눈을 감았다. 아직도 온몸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가시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탓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자신이 유혹에 넘어간 것이었고 그녀는 자신의 행동에 맞추어 움직였을 뿐이다.

“그... 화났어?”

서은설은 약간 겁먹은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밀쳐졌으니 기분이 상할법도 한데 그보다는 준의 기분을 먼저 살피는 것이다.

준은 대답대신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역시... 내가 좀 성급했지?”

“...나중에 이야기 하자.”

“미안.”

“아니. 네가 미안해 할 건 없어. 그냥 내가 너무 안이했던 것 같아. 네가 그럴 거라는 거 예상못했던 것도 아니고.”

‘어쩌면 나도 그러길 바랬던 건지도 모르지.’

뒷말은 삼킨 채 준은 한숨을 쉬었다. 서은설이 자신을 보는 눈이 심상치 않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멀리 두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친구였고, 동료였다. 그런 이유로 그녀를 멀리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 감정을 제대로 컨트롤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준은 그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본래 가지고 있던 호감과, 펠로우쉽의 호감도 시스템으로 인해 서은설은 이미 폭주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그녀의 탓만은 아니야.’

이 모든 것을 그녀의 탓으로 돌려선 안되었다. 자신 역시 서은설에 대한 미련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겁먹은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서은설의 모습에 참을 수 없는 욕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럼 난 가볼게.”

“그래.”

어느누구도 사과할 이유는 없는 일이다. 그저 남자와 여자였고, 서로에 대한 감정이 남아있었고, 준이 그것을 거부하지 않았을 따름이다.

그 이외에 어떤 이유도 변명에 불과했다. 준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히며 그녀의 숙소를 빠져나왔다.

문밖에는 루나가 서 있었다.

“아아.”

준은 완전히 굳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현장을 들킨 것은 아니지만, 사실상 그와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준. 무슨 일이야?”

그리고 서은설이 고개를 내밀었다. 루나와 시선을 마주친 그녀가 깜짝 놀라며 황급히 다시 방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지금 일 끝난 거야?”

“네. 이제 막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었어요.”

“그래.”

어째서 그녀가 여기에 있는지 따위를 물을 필요는 없었다. 누군가에게 들었거나, 혹은 여자의 감일 수도 있었다. 그도 아니라면 준과 서은설이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 챈 누군가가 그녀에게 몰래 알려주었을 수도 있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그녀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잠시 안에 들어가도 될까요?”

“아. 나는 이제 막 나오려는 참인데.”

“아니. 서은설양에게 말하는 거였어요.”

“아.”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상황에서 무슨 변명을 해도 먹히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는 조용히 문에서 비켜섰다.

“들어가도 되죠?”

“네? 네. 들어오세요.”

서은설은 황급히 방안을 정리하고는 그녀를 맞이했다. 준은 가만히 루나의 등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그녀는 굉장히 화가 나 있었다.

“그럼. 준은 이만 가봐요.”

“아. 그래.”

쿵.

철문이 거칠게 닫히고, 준은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일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형태로 흘러가고 있었다.

끼익.

준은 미닫이로 되어있는 식당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여전히 식당칸 안은 술에 취한 사람들과 즐겁게 떠드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다. 몇몇은 준을 흘깃 쳐다보며 그의 표정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지만, 대다수는 이미 그런 것을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술에 취해 있었다.

준은 마스터와 밥이 있는 바에 앉았다.

“무슨일이 있었던 거냐?”

마스터가 입을 열었다.

“루나가 왔어.”

짧은 한 마디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뜻을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닌 두 사람이었다. 밥이 입을 열었다.

“혹시 사고라도 친거냐?”

“아니. 가까스로 그 전에서 멈추긴 했지만.”

“그 전이라면...”

“그만. 상상하지말고. 어쨌거나 이거, 두 사람도 연관되어 있는거지?”

“일이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긴 했지만.”

밥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랬어?”

탁.

마스터가 준의 앞에 위스키 잔을 하나 내려놓았다. 준은 갑자기 목이 타는 것을 느끼며 스트레이트 잔을 한번에 털어넣었다. 뜨거운 열기가 목구멍에서 확 달아오르며 약간은 기분이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 녀석 최근들어 너무 힘들어 하는 것 같더라고. 오랜만에 만나는 거기도 하고, 그저 잠깐 기분이라도 내라고 그랬던 거지. 설마 그렇고 그렇게 될지는 몰랐지만.”

밥도 조금은 경솔했다는 생각이 드는지 준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된거야?”

“루나가 서은설과 이야기 하고 있어. 나는 쫓겨났고.”

“미안한 짓을 했군.”

어지간해서는 실수를 하지 않는 마스터였지만, 이번일에는 할 말이 없는 듯 표정이 어두웠다.

“그러니까 애초에 왜...”

“너도 임마. 태도를 확실히 하지 않으니까 그런거 아니야?”

드륵.

막스가 의자를 끌어다 앉으며 준의 어깨의 손을 올렸다. 준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 내 잘못이라고 생각은 해. 그래도 그 녀석을 모른 척 할 수는 없는 거잖아.”

“그러니까 마음은 있는 거냐?”

“아니라고는 못하지만.”

준은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염동력이 돌아오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무언가 델타에 오류가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그의 무의식에 반응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준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음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정말 소름끼치게 싫었던가 하면 오히려 그 반대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순간에는 어쩌면 이렇게 되기를 원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럼 됐지. 솔직하게 말하고 얼른 잡아두라고. 지금 이 동네에서 그 녀석을 노리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어휴. 어쩌다 이렇게 어리버리한 녀석에게만 그렇게 여자가 붙는지. 나 같으면 벌써...”

“씁. 거기까지만 해.”

“뭐. 알아서 하라는 이야기지.”

“그래. 어쨌거나 루나에게만 부담을 줘서는 안되겠지.”

우유부단한 태도를 취하게 되면 힘든 쪽은 당연하게도 루나였다. 그녀를 사랑하는 만큼, 그녀에게 이런 일로 힘들게 만들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결국은 선택의 문제다. 어느쪽을 택하든 누군가는 괴로울 것이다. 그 선택을 그들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나도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벌써가게?”

“결론이 났으면 빨리 움직여야지.”

“그래. 어느쪽으로 할거야?”

막스는 지금 상황이 재미있는지 입가에 웃음을 띄고 있었다. 엄청나게 얄미웠지만, 덕분에 조금은 똑바로 지금 상황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것없어.”

서은설의 숙소에 도착한 준은 벨을 누르고는 심호흡을 했다. 솔직히 말해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어떤 외도를 앞에두고도 느끼지 않았던 두려운 감정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하지만 도망칠 수 없는 문제다.

문이 열리고, 도망치지 말자며 준은 그렇게 수십번을 되뇌이며 그녀의 방안으로 들어섰다. 헌데 그 방안에는 서은설의 모습 대신 루나가 홀로 탁자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녀석은?”

“잠깐 제 방으로 보냈어요.”

“내가 올 줄 알고 있었던 건가?”

“적어도 내가 아는 당신이라면. 그럴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녀를 내보낼 생각을 하고 있지요?”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은설이 동료이자 친구인 것은 맞다. 하지만 그로 인해 루나에게 상처가 된다면 그런 관계는 빠르게 정리하는 게 맞는 일이다. 말로 풀면 쉬운 일이었지만, 이 결심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저를 위해서 그럴 필요는 없어요.”

“널 위해서가 아니야. 나 자신이 욕망에 휘둘리고 싶지 않은 것뿐이야. 옳지 않은 일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라고.”

“고마워요.”

루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준을 끌어안았다. 아직도 화가 나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녀의 다정한 모습에 준은 조금이지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화 안내는 거야?”

“화가 안난다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전 누구보다도 그녀를 이해해요.”

루나는 준을 강하게 끌어안으며 서은설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미안해. 솔직히 이런 상황까지 생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어쩔 생각이에요?”

루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할 만큼, 그녀는 긴장하고 있었다.

“내가 떠날게. 이 순간이 오지 않길 바랐는데.”

서은설은 그렇게 말하며 눈을 감았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그 보다 더 큰 감정은 분노였다. 차라리 그를 따라갔었다면 이런 일이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말도 안되는 소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계속해서 그 생각만을 반복했다. 내가 있었다면. 내가 그곳에 있었더라면.

그랬다면 어쩌면 서로의 입장이 뒤바뀌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고마워요.”

루나는 그렇게 말했다.

“뭐가. 나는 네 남편을 잡아먹으려고 한 나쁜 여자인걸.”

“그 동안 엘라를 잘 돌봐줬잖아요.”

“그것도 나쁜 마음으로 그런거야.”

“그랬다면 엘라가 먼저 알아챘을 거에요. 그 아이는 영리하니까요.”

“영리하다는 정도가 아니지만.”

서은설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쩌다 그 아이를 처음에 맡게 된 것인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마 준에게 잘 보이고 싶어 시작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동안 꽤나 정이 들었다. 때로는 이 아이가 자신의 아이였으면 하는 때도 있었다. 그것은 다른 이유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 아이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기 때문이엇다.

“엘라에게는 당분간 멀리 여행을 떠난다고 전해줘.”

루나는 대답대신 고개를 저었다. 서은설은 그녀의 몸짓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지 못해 가만히 그녀를 응시했다.

“이런 말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당분간 엘라를 계속 봐주셨으면 해요.”

“뭐?”

서은설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곳에는 당신이 떠난 다면 슬퍼할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당신 그렇게 안봤는데, 꽤 잔인한 사람이잖아? 그렇게 복수하고 싶다는 거야?”

“복수라.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그게 당신을 얼마나 괴롭게 할지 누구보다도 제가 더 잘알고 있으니까요.”

“그걸 알면, 그냥 떠나게 해줘.”

사실 허락을 받고 말고할 문제는 아니었다. 그녀는 원한다면 언제든 떠날 수 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것은 그녀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더 준의 곁에 함께 있고 싶다. 그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뛴다. 날카로우면서도 차분한 갈색 눈동자와 미려한 곡선을 그리며 웃는 그 미소를 보고 있노라면 그 것만으로도 살아있을 가치를 느꼈다.

언제부터였을까? 어쩌면 처음만났을 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괴한의 습격에 총상을 입고 죽어가던 와중에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 준이었다는 것은, 지금까지도 누구에게 알리지 않았던 사실이었다.

어쩌면 그와 헤어질때 그를 한번이라도 잡았다면 지금과는 또 다른 상황이 펼쳐졌을 수도 있었다. 그가 플랫폼으로 가기 전에 무언가 한 마디라도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면 그는 루나보다는 틀림없이 자신을 택해주었을 것이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더더욱 견디기 힘들어졌다. 그리고 그 사실을, 루나도 알고 있음이 분명할텐데도, 그녀는 자신에게 남아달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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